[기고] 국제정치 ‘현실’과 ‘가치’ 기반 외교, 그 모순에 대하여
외교 독트린은 국가(행정부)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반영하며 국제정치에서 실현코자 하는 목적을 간명히 담고 있는 외교정책의 원칙이다. 명시적으로 표명된 바 없지만, 만약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독트린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라는 가치에 기반한 진영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월6일, 외교부가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하는 일제 강제징용 해결안을 발표하면서 강조한 것은 과거사 문제 해결이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였다. 마찬가지로 4월26일 한·미 정상회담의 ‘워싱턴 선언’과 윤석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자유”라는 사실은 현 정부의 독트린이 “자유”라는 가치 기반의 진영화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은용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21세기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한 흐름으로 포착되고 있는 권위주의 정권과 민족주의의 세계적 확산 속에서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국가적 관심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정책적 대응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외교적 교리가 되면서 배타적 진영이 만들어지고 복잡한 현실을 가치 기반의 이분법(二分法)으로 재단하여 정작 필요한 현실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자유” 진영 밖에 있는 국가들은 자신이 속한 선한 내집단(in-group)을 위협하는 외집단(out-group)으로 단순 일반화되면서 그들과의 협력은 멀어지게 된다. 오히려 내집단의 구성원들 간에 견고한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외집단에 대한 집단적 경계와 억제가 외교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현 정부가 북한이나 중국에 대응하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로 자유주의에 대한 “위협”과 자유주의 진영의 “연대”를 병렬적으로 함께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 기반의 이분법적 세계관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국제정치는 양분된 흑백의 논리로 이해될 수 없다. 국제정치의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에 이르러 국제정치의 행위자와 거버넌스가 더욱 다양해지고 이슈와 영역이 상호중첩되면서 현재 국제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매우 복잡하고 다원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물론 미·중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제정치 현실의 전부가 아닐뿐더러 그러한 경쟁을 가치로 환원하여 진영화시키면서 외교 독트린으로 실천하는 것은 보수주의(정권)에 맞지도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그에 조응하는 외교정책의 목표와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주의’(realism)라는 국제정치 세계관과 보수주의 정치세력의 핵심 미덕이다. 윤석열 정부는 명실상부 보수정부다. 보수정부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가치에 기반한 외교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는 정권이거나 혹은 미국과 같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세계 최강국에서나 천명하는 독트린이다. 그리고 심지어 미국조차도 가치 기반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패권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하여 선(아군)과 악(적군)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전 세계에 미국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했던 ‘부시 독트린’은 한편으로 많은 지역에서 강한 반미 정서를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과대팽창과 물적 역량의 소진으로 이어져 결국 미국 패권은 하강기를 맞게 되었다.
패권국도, 그렇다고 약소국도 아닌 한국은 가치 기반의 경직된 진영화가 아니라 현실 기반의 전략적 유연화를 외교 독트린으로 삼고, 국익을 사안별로 세밀하게 설정하고 실용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 정부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엄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남고 나아가 번영하는 합리적 선택일 것이다.
은용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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