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깨달아 있다고?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 깨달음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 혹은 내가 과연 깨달음을 이룰수 있기는 한건가 등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없을까 여부가 아닌 '언제' 깨달을 것인가 하는 시기다.
왜 시기인가? 깨달음은 누구나 얻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아니 깨달음이라는 말 자체가 관념화되어 있어서 그렇지, 깨달음은 사실 누구에게나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달음을 별도로 얻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존재 자체, 삶 자체가, 이렇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깨달음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별도의 특별한 깨달음을 얻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드러나 보여주고 있는 깨달음 그 진리를 언제쯤 자각할지의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깨달음을 언제 자각할지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오랜 윤회가 필요할 지는 모를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우린 모두 깨달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 아니 이미 깨달음 그 진리 자체로써 살고 있으니, 그같은 사실을 언제쯤 알게 될지 시기의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깨달을 수 있나 없나는 무의미하다. 다만 누구나 깨달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쯤 알게 될까 하는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깨달음의 시기를 조금 앞당기고 싶어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부처가 다만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빨리 깨달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꿈이야 언젠가 깨게 되어 있는 것인데, 꿈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으니, 그것이 싫어서 빨리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보니 깨달아야 할 중생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필요도 없음을 알고 열반에 들려고 했다. 그러나 범천의 권청을 통해 법을 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것은 범천만 자비심이 있고, 부처님은 자비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의 관점에서는 중생의 고 또한 환상이지만, 범천에게 그 환상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괴로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범천은 부처님께 어차피 꿈은 깰 것이라도, 될 수 있으면 빨리 고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빨리 꿈을 깨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결국 깨달음은 ‘시간’의 문제다. 조금 더 빨리 깨닫거나, 조금 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우린 모두 꿈에서 깨어날 우리 모두는 깨달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자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로 그 관건이 되는 '시간'의 실체가 환상이라는 점이다. 즉 언제 깨닫게 될 것인가 하는 이 절체절명의 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공해지는 것이다.
깨닫고자 애쓸 필요가 없으며, 깨닫고자 하는 모든 인위적 노력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일념즉시무량겁. 지금 이 순간이 무량한 시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깨닫는 것과 미래의 어느 날 깨닫는 것이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 과거와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깨닫는 것과 미래에 깨닫는 것이 전혀 차이가 없다. 그 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린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 온 건가! 어디를 향해 그리도 바삐 달려가고 있던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리 깨달으려고 애쓰고 노력해 온 것일까? 이제 어찌하겠는가. 그렇다. 그 모든 깨닫고자 하는 노력을 멈출 때다. 더 이상 깨달음을 향해 달려갈 곳이 없다. 깨닫기 위한 그 모든 노력과, 수행과, 애씀과, 질주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깨닫고자 하는 그 모든 욕망과 허상을 깨고 그저 편안히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거룩한 시공에 힘을 빼고 앉아 있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냥그저 휴식하라. 다만 존재하라. 이제 그만 멈추라.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기를 멈추고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doing이라는 행위의 삶을 being이라는 존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듯 그동안의 모든 유위적 행과 노력을 멈추고 쉴 때 우리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관객이 되어 편안히 쉬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것(지관,정혜) 말고 무엇을 더 하려고 하는가.
2014.06.04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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