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연극에서의 역할놀이
나라고 알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모습 그 모습이 나는 아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나’,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내가 진정한 나일까? 나라고 여기는 그 모든 나는 다만 아상(我相), 에고의 감옥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선생님일수도 있고, 사장일수도 있으며, 스님일수도 있으며, 학생일수도 있으며, 공무원일수도 있고, 부모이거나 자식일수도 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회사에서는 사장일수도 있고, 과장일수도 있으며, 말단 사원일수도 있고, 집에 오면 한 가정의 가장 일수도 있고, 자식일수도 있고, 또 주말에 있는 모임에 가면 구 모암의 회장일수도 있고, 총무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의 아상, 우리의 에고, 우리의 위상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우리가 바로 그 모임에서 해야 할 몫의 연극을 해 내면서 살아간다.
어디 그 뿐인가. 가게에 가면 손님이 되었다가, 차를 타면 승객이 되고, 복지시설에서는 자원봉사자가 된다. 하루에도, 아니 매 순간 우리의 자아는 그 상황에 걸맞은 연극을 한다. 바로 그 역할이 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에 맞는 그 역할들의 특성은 어떠한가? 어느 한 역할만이 본래적인 자아이거나, ‘나의 본질은 이거야’라고 특정할 만한 정해진 본연의 역할이 있는가? 아니다 정해진 역할은 없다. 역할은 끊임없이 바뀔 뿐이다. 바로 이 역할 놀이, 연극의 배역을 끊임없이 상황 따라 바꾸어가는 바로 이 영화에서의 배역 놀이야말로 우리 삶의 생생한 현실이다. 그때그때마다 바로 이 상황극을 잘 할 줄 아는 것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삶에서의 배역을 충실히 잘 해 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배역이 주어질 때 바로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배역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완전히 용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 바로 그 배역과 그 배역의 행위와 완전히 하나 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그 배역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최고의 배우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배역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완전히 그 역할에 몰입함으로써 바로 그 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영화가 끝나고 다른 영화, 다른 배역이 주어지면 곧바로 또 다시 새로운 배역에 완전히 용해됨으로써 이전에 했던 역할을 잊고 새롭게 주어진 역할과 하나를 이룰 줄 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이 역할놀극이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역할이 주어질 때 그 역할에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으로 최선의 연극을 다하되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바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지언정 그 역할이 나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잠시 인연 따라 주어진 배역과 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배역을 최선의 집중으로 행할지언정 그 역할 자체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 배역은 실체적인 ‘내’가 아니다. 잠시 내가 연극을 한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배우는 한 영화가 끝나고 새 영화를 시작할 때 이전 영화 속에서의 배역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배역에 100% 에너지를 쏟는다. 과거의 배역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배역이었을 뿐임을 알기 때문에 과거의 배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 배역에 빠져 있는 한 새로운 배역을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삶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켜보아야 할 실천덕목이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우리 삶은 고통과 번뇌와 마주칠수밖에 없게 된다. 그 배역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배역이 단순히 하나의 배역이 아니라 ‘나’라는 정체성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상의 감옥이며, 에고의 거친 감옥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내가 이 생에서, 또 지금 이 순간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펼쳐내고 있는 그 역할에 충실하며, 그 역할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울 지언정, 그 역할을 ‘나’라고 동일시하지 않고, 그 역할에 집착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다. 언제든 재미있게 역할놀이를 할지라도, 역할을 그만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오면 가볍게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을 때 삶이라는 연극은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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