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항상 언제나 매 순간 저절로 알아차려질 뿐, 알아차리는 놈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다.

장백산-1 2023. 12. 20. 14:21

항상 언제나 매 순간 저절로 알아차려질 뿐, 알아차리는 놈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다.


몸이 내가 아니다. 생각이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놈, 보는 놈, 듣는 놈, 냄새 맡는 놈, 맛을 보는 몸, 촉감을 느끼는 놈, 이런 순수하게 자각하는 놈이 참나라고 하거나,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말도 방편일 뿐이다. 보는 놈, 듣는 놈, 냄새 맡는 놈, 맛을 보는 몸, 촉감을 느끼는 놈, 생각을 하는 놈 이라고 하는 순수의식, 불성은 따로 없다. 그냥 그저 지금 여기 이대로 이러할 뿐이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모든 것이 저절로 흘러가고 저절로 알아차려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모든 것을 아는 놈이 불성이라고 순수의식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자각하는 놈'이란 것을 따로 만들어 놓는 분별이 될 뿐이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은 불성, 순수의식, 주인공, 본래면목을 방편으로 설했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것들은 없다고 고구정녕 강조하고 있다.
그냥 그저 세상이 삶이 저절로 경험되고, 경험되는 세상이 삶이 저절로 알아차려질 뿐이다.

왜 저절로 알아차리는 놈을 따로 떼내어 불성,  순수의식, 주인공, 본래면목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방편으로 그런 표현을 쓸 수는 있지만, 그런 방편에는 반드시 지금 이 글과 같은 방편을 깨뜨려 주는 말이 함께 쓰여야 한다.

견성이라는 방편의 말도 마찬가지다. 견성이란 말 속에는 견성한 사람이 있고,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나를 견성했거나 안 했거나 하는 둘 중에 하나로 나눠놓을 수밖에 없다. 견성이라는 말 속에는 견성할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견성을 할 나, 깨달을 '나'가 있다면, 그같은 견성이나 깨달음은 견성이나 깨달음일 수 없다.

그냥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이 삶, 이 세상을 알아차리고 경험하는 것 이것이 전부다. 알아차리고 경험하는 것 그건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항상 그저 매 순간 저절로 알아차려질 뿐, 알아차리는 놈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을 뿐이다.

괴로온 감정도 저절로 생겨났다 저절로 사라지고, 행복감도 저절로 생겨났다 저절로 사라지지만,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사라지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생멸법(生滅法)일 뿐이다. 괴로울 때 그저 그러함이 알아차려지고, 행복할 때 그저 그러함이 저절로 경험되어질 뿐이다. 괴로움이라고 이름짓든, 행복감이라고 이름짓든, 그것과는 상관 없이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 사라지면 그뿐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라.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내 것이라고 여겨 '나는 괴로워'라고 할 필요는 없다. 생겨났을 때 그것을 붙잡아 집착할 필요도 없다. 생겨나고 사라지면 그 뿐이다. 끝! 이처럼 삶에는 모든 일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고 사라진 적도 없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