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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의 삶의 방식

장백산-1 2024. 2. 22. 16:15

중도의 삶의 방식


불교의 가르침은 연기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실체가 있어서 실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써 잠시 만들어진 물거품 같은 가합(假合)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가합은 말 그대로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로 인연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견고하다고 믿고 있고, 좋다고 죽을 것처럼 집착하거나, 없으면 안 될 거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입니다. 나와 세상, 물질과 정신 그 모든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그저 가짜로 화합된 것일 뿐이지요. 그러니 목숨 걸고 심각하게 지켜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집착심으로 가지려고 할 것도 없고, 있던 것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해서 심각하게 괴로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가짜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잠시 머물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는 환영과도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나라는 존재가 진짜인 줄 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인 줄 알고,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줄 알고, 내 소유물이 언제까지고 내 것인줄 알고, 자식이 진짜 내 자식인 줄 알고, 알량한 지식에 집착하거나, 명예나 자존심에 집착하는 등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고, 가짜였던 것입니다. 전혀 집착할만한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진짜인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집착을 하고, 집착을 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빠집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진짜라고 여기는데서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착각 또한 생겨납니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누구도 잘났다거나 못났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삶 자체가 환영인 줄 알고 인연 따라 잠깐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아무리 잘살아도 나보다 못사는 사람을 우습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좋아한다고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미워한다고 과도하게 거부하지도 않겠지요. 실체인 줄 알고, 진짜인 줄 착각하기 때문에 좋은 것은 더 가까이 하려고 집착하게 되고 싫은 것은 멀리 하려고 거부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잘난 사람도 없고 절대적으로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상대적으로 더 잘난 사람 앞에서는 못난 것이고 못난 사람 앞에서는 잘난 사람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와 중도적인 시각입니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중도적인 시각이 열리게 되어 우월감과 열등감을 내려놓게 됩니다.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어 저절로 중도적인 관찰이 이루어집니다. 세상 만물 모든 존재를 중도로써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입니다.

 연기를 모르는 데서 모든 괴로움이 싹틉니다. 과도하게 한 쪽으로 치우쳐 좋다 나쁘다 분별하여 극단을 취하며 사는 데에서 모든 괴로움이 만들어집니다. 그럼 괴로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도를 알고 실천하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道聖諦)가 바로 중도를 의미합니다.

나는 중도적인가? 나는 지혜로운가? 이 질문에 답해보려면, 나는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남들과 비교하면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가? 이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