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장백산-1 2024. 7. 23. 21:34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14. 자신에 대한 정의

나를 어떤 이름과 동일시하면 진정한 본인 모습 전달 안돼
과거 삶 이야기 · 직업 · 고향도 잠시  걸처입고 있는 것에 불과해

처음으로 어떤 모임을 가게 되면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순서가 있다. 그럴 때 보면 보통 자신을 1~2분 안에 누구라고 빨리 정의해서 전달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통상적으로 그런 짧은 시간에는 본인의 이름을 먼저 말하게 되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더불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어떤 이는 누구 소개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고향이나 나이, 학교, 취미, 가족 관계, 본인이 경험했던 흥미로운 일화 같은 것을 사람들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긴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것이 본인을 1~2분 만에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엄청나게 다양한 본인의 모습 중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주 극소수의 사실만을 짧게 편집해서 전달할 뿐이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식의 소개는 사실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예를 들어, 나를 어떤 이름과 동일시하는 것은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이름이란 태어나면서 부모가 인위적으로 나를 지칭하는 말로 선택했을 뿐이지, 이름이 원래 진짜 내 모습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 이름을 받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받은 이름이 싫으면 개명까지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더 깊이 들어간다. 자신을 주어진 이름과 동일시 하는 것이 엄청 인위적인 일이듯이, 그 어떤 과거 삶의 이야기나 직업, 고향, 학교, 취미, 가족 관계도 사실 원래부터의 내가 아니고 맨 몸에 옷을 입히듯,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잠시 걸처입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말한다. 마치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종이 인형과도 같이 가위로 자른 예쁘고 다양한 옷들을 몸에 잠시 걸어 놓은 것과 유사하다. 왜냐면 그러한 과거 이야기나 직업, 고향, 학교, 취미, 가족 관계는 말 그대로, 과거 이야기나 직업, 고향, 학교, 취미, 가족 관계를 알려 줄 뿐 그 경험을 한 자를 드러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그런 경험들의 총체가 바로 나이다”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경험들 이전에는 내가 없다가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내가 생긴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게 된다. 더불어, 그런 경험들은 무상해서 이내 변화하기에 대부분의 경험들은 지금 여기 바로 본인 눈앞에는 없다. 선불교 공부인이 궁금한 것은 “현재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내가 무엇이냐?”는 진실이지 예전에 어떤 경험을 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무엇인가가 살아서 이 글을 이렇게 읽고 있다. 이 글을 읽는 경험이 내가 아니고, 이 글을 경험하는 자가 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자가 대체 ‘이뭐꼬’?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한 경험의 내용을 경험하는 자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본인을 소개할 때 자신이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주로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본인 경험에 집착하고 더 나아가서는 본인의 정체성도 그 경험을 가지고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경험의 내용은 경험한 자가 아니다. 내 삶의 다양한 경험들, 이야기들로 나를 치장하기 이전부터 항상 영원히 존재해 왔던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경험들이 다 지나가도 경험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항상 남아있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힌트를 한 가지 주자면 만약 그 나를 대상화해서 언어로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경험이지 경험하는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나를 평화롭다고 묘사했다면, 평화로운 상태는 경험일 뿐,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이 된다. 왜냐면 평화로운 상태가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상화해서 묘사할 수 없지만 항상 이렇게 살아서 모든 경험을 하는 ‘나’는 무엇인가?

대상화해서 묘사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그 ‘나’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면 알 수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지금도 이렇게 이 글을 읽고 있지 않는가? 결코 알 수는 없지만 항상 언제나 함께 하는 ‘나’는 무엇인가?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38호 / 2024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