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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이 바탕을 이룬 수행자

장백산-1 2024. 7. 24. 16:04

자비심이 바탕을 이룬 수행자

 

사람들이 깨닫고자 하는 이유는, 깨달았을 때 중생들을 구제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을 자비심(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이끌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불교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바로 이 자각,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지혜이고, 이러한 동체대비의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자비심)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곧 자비이고, 깨달음이 곧 자비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성숙되었느냐를 살펴보려고 한다면,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머고 살시 위해서 하고 있는 이 직업이나 일 또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똑같이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이 사회봉사단체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을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 개인적인 기복이나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意圖)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사랑(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도 복이 안 붙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자비(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은 너무나도 평범해집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고 하잖아요. 깨달았다고 해서 휙휙 날아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거나 뭐 아는 소리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 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위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깨닫게 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상대를 나처럼 아끼는 동체대비가 삶의 의도요,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