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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장백산-1 2025. 2. 3. 21:35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6祖 혜능 나의 법문은 무념(無念)을 종(宗,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 바탕)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 뿌리)으로 삼습니다. 무상은 모습에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며, 무념은 생각을 하지만 생각이 없는 것이고, 무주는 사람의 본성을 말합니다.

 

무주(無住)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선(禪)공부의 목표는 머무는 바 없이 행하는 데 있다.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하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머문다는 것은 곧 집착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 한 가지 대상에 머물게 되면, 그 대상에 사로잡히고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분별들이 전부 공(空)한 줄 알면 그 어떤 것 그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무아(無我)인 줄 알아 어떤 것도 집착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연기(緣起)를 알아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임을 깨닫는다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과 싸우고 부딪히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그런 짓이 공한 줄을 알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으로써 마음을 담아두지 않는다. 당연히 복수하거나 해칠 생각을 내지 않는다.

 

마음이 머물지 않고 흘러가도록 함에도, 이미 지나간 생각과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이 계속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번뇌 망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얽매임이지 무주가 아니다.

 

모든 것에  매 순간 머물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런 까닭에 무주(無住) 를 혜능의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는다. 심지어 그것이 불법이거나, 열반이거나, 해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무상(無相)은 밖애 았는 것 보이는 일체의 상(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相)은 일체 삼라만상의 제각각의 특색 있는 모습, 형상, 모양을 말한다. 정신적인 것 또한 이미지로 마음에서 그려낼 수 있기 때문에 그 또한 상이다. 모습, 즉 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모습에 얽매이고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상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좋은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여성들은 좋은 명품 가방 같은 것을 소유하면 스스로 높아진다는 상에 사로잡힌다.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소유물의 모양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착각을 일으킨다. 외모를 가꾸려고 하거나, ‘척’하는 모든 행동들이 전부 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높다거나 낮다는 상,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상, 부자라거나 가난하다는 상, 좋다거나 싫다는 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상이다.

 

사실 상(相)은 마음속의 하나의 이미지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내 스스로 다른 것과 이것을 비교해서 분별하기 때문에 상이 생겨난다. 그래서 상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삶의 경험이 다르면 상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 세상 70억 가까이 되는 인구가 저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는 결혼하기 싫은 대상도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이 전부 똑같고, 마음에 고정지은 상(相)이 다 같다면,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대상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고정된 실체로써 좋은 사람이고, 싫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싫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분별이 다르기에, 자기 마음속의 상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분별상(分別相)이라고 한다.

 

저마다의 분별이 다 다르기에 상도 다 다른 것이다. 그러니 그 상이 고정된 것일 수도 없고, 다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상이란 다 허망한 것일 뿐, 진실한 것이 아니다.

 

 

무상(無相)은 바로 그 점을 설한다. 고정된 실체적인 모습, 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스스로 고정된 상이 있을 지언즉,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고정된 상은 없다.

 

무상이 곧 본체이며, 바탕인 이유는 무상이야말로 일체 모든 만법의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고 하여 상이 없다는 것만이 참으로 진실한 상일 수 있다. 무상이야말로 만법의 참된 실상이지만,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무상을 상으로 착각하고, 그 착각된 허망한 모양이 진짜라고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 상에 집착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겨난다.

 

또한 혜능의 가르침은 무념(無念)을 으뜸으로 삼는다.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무념은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 이 말의 본뜻은 정말로 하나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 일으키면서도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생각의 본성이 공함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본성이 공하다는 자각, 그것이 바로 무념이다.

 

모든 경계 위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마음이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공한 줄을 아는 까닭이다. 대상경계를 생각하면서도 그 대상경계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경계를 따라 마음이 이리 저리로 휘둘리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념을 듣게 되면, 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생각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생각을 끊어 없애려고 할 필요는 없다. 생각은 끊어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념은 생각을 끊어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그 생각만이 옳다고 믿고, 그생각을 타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자신도 괴롭고 남들도 괴롭힌다. 그런 까닭에  혜능의 가르침에서는 무념을 으뜸으로 삼는다.

 

무념을 실천하는 사람은, 생각을 하되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니, 삶에서 과도한 고집이 없어 유연하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 인연 따라 삶을 온전히 내맡기며 자연스럽게 흐른다. 자기의 생각을 타인에게 고집하지 않으니, 대인관계도 원만할 수밖에 없다.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 자성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삿된 견해다. 무념, 무주, 무상을 말하지만, 이것은 모두 ‘이것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전부 다 아니라는 사실을 뜻하는 방편일 뿐이다. 어느 것 하나에도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무념도 생각하지 말고, 무주에도 머물지 말며, 무상을 모양 지어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참된 무념, 무주, 무상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