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기업사회, 그 끔직함을....

장백산-1 2009. 1. 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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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사회, 그 두려움을 지금이라도 깨우쳐야…
번호 190325  글쓴이 이사급 과장  조회 540  누리 114 (114/0)  등록일 2009-1-1 04:32 대문 7 추천


기업사회, 그 두려움을 지금이라도 깨우쳐야…
(서프라이즈 / 이사급 과장 / 2009-01-0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새벽에 해돋이 보러 가까운 산에 오르기로 식구들과 약속했어요. 여느 때와 같이 이번에도 절에서 떡국을 낸다고 마누라가 얘기하더군요. 재작년엔 성공했지만, 작년엔 너무 많은 인파로 얻어먹질 못했어요.

  

저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원할 겁니다. 3 가지를요.

첫째, 앞으로 4년 동안 국민이 잘 버텨주어 살아남게 해달라고 둘째, 실직자 신세인 나와 오늘부터 나와 함께 동반 실직자가 된 마누라… 이렇게 둘이 빠른 시일 안에 취업하게 해 달라고 셋째, 4년 후 제발 국민이 정신 차리고 짝퉁 우익은 이 사회에서 발 못 붙이게 해달라고요.

 

아래 붙이려는 글이 벌써 재작년에 쓴 글이 되는군요. 당시 글을 보면 지금의 미디어관련 언론통합법과 금산분리, 수도권 규제완화, 출자총액폐지, 법인세 감세, 토목 사업, 자본 집단에 중복 지원 등 일련의 조치들……

이 모든 것이 삼성, 조중동 같은 국내 악덕 자본가들, 또 그들과 제휴 내지 연계성을 갖는 거대한 초국적 자본 그룹들이 한통속이 되어 만든 '기업사회'로 영원한 불평등을 더욱 고착시키려는 노력이겠죠.

 

마침 이번엔 그들의 대변자가 아닌 '그들 자신' 中 하나인 이명박이 이젠 굳이 <정경유착>이란 것을 들이대지 않아도 알아서 해내고 있으니까요.

부패 수구세력과 그들의 선전지인 앱솔룻파워 찌라시 조중동과 그들의 입맛에 맞는 부패 자본이 있으니까요.

 

이젠 부패 자본이 부패 수구세력을 조종하고 선도하는 시대가 된 기업사회니까요.

벌써 역사교과서 수정, 감사 청원, 고소와 고발, 수입산 미국쇠고기 시식회, 건국절 행사, 청소년 우익사관 주입, 6.25 전적지 국토순례 등 이념논란의 중심에도 전경련이나 상공회의소, 경총이 총대를 메고 솔선하여 진두지휘 하니까요.

 

그들이 세뇌용으로 만들어낸 주술적 新種 담론인 『힘 있는 사람들이 좀 부패하다 한들 뭐가 큰 문제냐』,『무능한 민주정부와 경제를 못살리는 청렴함은 아무짝에도 필요없다』는 식의 이 시대 대중들의 암묵적인 방관태도와 인식에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힘듭니다. 4년 후에도 진실의 팩트도 못보고 또다시 지난 선거에서의 좁은 시야라면… 생각하기도 힘이 듭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의 여태까지의 '삼성특검 반대' 국민적 연대라는 모양, 그리고 삼성 같은 재벌이 잘못한 게 확실하지만 '그래도 삼성이 있어야 한다'는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코포크라시 신드롬이 사라지지 않는 한 힘듭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모든 사회 불합리는 기업사회의 문제로 그 인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원초적인 진단에 따른 정확한 처방이 나오겠죠.


 

 

김동춘 저서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을 읽고 드는 생각
(2007 / 이사급 과장)


학자들은 그게 경제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경영학자든 간에 『CEO출신이 정치를 하려 든다는 것』은 난센스라며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연구 대상이었고, 수없이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근거는 CEO적 사고와 시각의 한계를 꼽으며 역사적으로 이미 그 전부인 前例에 있어 모두 실패했음을 얘기한다.

물론 긍정적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소수론에 지나지 않는다. 학자들 견해는 대충 그렇게 결론이 나고 있다. 학자들의 그런 주장에 있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맘대로지만, 학자들의 '다수론'인 견해를 무시할 순 없다.

 

92년 대선 때 CEO 출신의 고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나오는 바람에 당시 학계의 연구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CEO출신이 정치권력에 진출은 수많은 논문을 낳는 학문연구의 주요한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지금 대선 이슈도 경제아젠다와 경쟁이란 미명아래 성장담론이 주요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도 'CEO 출신 대통령'을 주요하게 꼽는다. 이는 곧 경제 대통령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사실, 1992년 대선 때 현대그룹 정주영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 이래 기업 총수나 CEO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미 연구가 끝나 결론이 나왔지만 이 시점에서 다시 연구대상이다.

 

흔히, 교과서(Text book)에도 안 나오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저널에도 없을 것이다. 그 같은 논거로 수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피하니깐…. 기업가는 돈만 있으면 되지 정치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배워왔다. 내 말이 아니라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있다고 김동춘 교수니 우석훈 교수, 김상조, 권영준, 홍종학, 이필상 교수가 대동소이한 말을 한다. 심지어 내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신 교수님에게서도 94년 당시 그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교과서에는 저렇게 나와 있다 한다.

 

현재 외국의 CEO출신이 한 나라의 통치자인 경우는 태국의 탁신 정도에 그친다. 탁신도 역대 CEO출신 대통령이나 수상들처럼 친기업, 규제완화 내지 규제철폐로 외국 자본으로 국내 경기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결과는 자기 나라의 자본가들과 권력가들만 좋은 일 시켜주었을 뿐, 양극화라는 소득불균형과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이 정치까지 하려고 한다. 독특한 한국사회 상황과 연결돼 있다. 나쁘다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CEO 대통령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CEO정신으로 국가를 운영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국가운영에는 강한 도덕주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국민은 기업체의 직원이 아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에는 복지와 공공의 복리라는 공정성과 공공성이 담보되어야 할 정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공정성과 공익이 강조되어야 할 영역과 복지라 하는 곳에까지 '경쟁'과 '기업 정신'을 부추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과 민생에까지 경쟁과 기업적 사고를 심으려는 것은 이미 20C 초반 까지의 자유방임주의 경제체제의 붕괴를 경험한 전례가 있다.

 

기업에서는, 前년도 실적이 CEO의 성에 차지 않는다면, CEO는 분명 새해 신년사에서 칼날 같고 싸늘한 독설을 내뱉을 것이 뻔하다. 사실 실적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이윤은 전혀 줄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는 기업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직원들의 군기 잡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 이런 신년사 뒤에는 이를 빌미로 강제나 다름없는 인사 태풍이 있다. 이미 고용 없이도 성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한 번 내쫓기면 인생 끝이다.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오히려 연봉이 줄어든다.

 

이게 바로 기업사회이다. 80년 이후의 경제사조인 신자유주의를 만든 그 연출가가 바로 기업이다. 국제적 대자본가들이 원하던 사회, 다국적 기업이란 이름으로 우리 일상 속속 깊이 자리매김해온 자본투기 세력들이 기업사회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그런 틀 위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대미문ㆍ전인미답이랄 수 있는 계기까지 마련하려고 한다. 그게 바로 CEO출신의 정치권력까지 넘보는 것에 이르고 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미국 등 몇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권력자가 자본가랑 밀월하고 유착하였다 해도 이 정도로 직접 정치권력의 전면에 스스로 나서는 경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없었다. 그만큼 선진국 국민들은 그 병폐를 널리 알고 두려움을 가진 나머지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CEO출신 자신들도 자신들의 경영 철학으로는 통치철학으로 담아내는 것에 큰 부담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행복度 낮은 高스트레스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한국도 라틴아메리카처럼 기업사회가 앞으로도 계속 지속 승승장구할 거로 전망하지 않는다. 남아메리카는 미국 시카고大 출신의 유학파들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그 나라들은 거의 개발이라고는 되지 않은 환경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영국의 타임지나 BBC와 유엔 등에서 조사하는 각국의 행복지수 순위에서는 남미국가들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度는 예전보다 형편없이 뒤로 쳐지고 있고 방글라데시와 부탄 등 다국적 기업이 별로 관심 갖지 않는 나라에 선두를 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보다는 행복도가 훨씬 앞섰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갈 만큼 갔다고 본다. 기업에 대한 비판은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고, 재벌의 기업가나 재벌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에 대해 감히 누구도 문제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기업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기업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커지느냐가 향후 기업사회를 좌우할 것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의 지속성과 국제적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거라고 본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미국 內 지식인의 목소리가 커지고 진보의 힘이 커지는 변화를 겪는 것처럼, 또 라틴아메리카에서 나타나는 좌파의 역풍처럼, 영국 노동당 내에서의 블레어아젠다 비판처럼… 이런 견제력이 생겨나면 이 추세는 계속될 수 없다.

 

한국은 고(高)스트레스 사회이며 빈부 양극화가 극심하고 행복지수나 성취감ㆍ만족도가 낮다. 그렇기 때문에 분배정책을 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복지증진과 기회균등, 지방균형발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대로 더 심각한 기업사회로 가면 약육강식의 사회가 될 테고, 중국처럼 대중시위나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방치할 리 만무하다, 국민이……

 

이미 오래전부터 선진국에선 CEO출신이 정권까지 거머쥐려는 게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고 받아들여져 왔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엔 사회적 약자가 있다. 사회적 소수자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헤아려 생각해 보면 그 '사회적 약자'가 곧 우리이거나 언제든 '나'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 다수자인 '민중'이란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뒤처진 사람에게 자립만을 강조하는 CEO의 사고를 국민 전체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는 너무도 두렵지 않은가? 경쟁에서 승리해 '낙오자' 딱지 안 붙인 것만으로도 자긍심을 갖고 살 것인가? 과연 승리일까?

경쟁하지 말라 해도, 경쟁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경쟁하는 세상에서 굳이 '자율적 경쟁'을 늘 달고 말하던 후보가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경쟁 속에서도 자립할 여건 조성과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여야 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의 공통된 책무이고 숙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시장논리로만 해석하는 CEO출신의 대통령이 세상에 거의 없는 것도, 국가원수라면 커다란 국정운영이념으로서의 공정성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선진국 국민들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 굉장한 성과는 어디까지나 기업을 위한 과정이었고, 그 의도가 기업활동의 일부분이고 어차피 좋은 정책입안과 실제 경영에 반영한 것이라도 합리적 이윤추구의 일면인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극도로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기업윤리에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는, 사회적 윤리와는 차원이 다른 '좀 덜 엄격한 상업윤리의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그 잣대일 뿐이라 본다. 국정에는 공정성과 공익성 담보가 얼마나 중요하리라는 건, 성장을 주장하는 데 있어 언제나 같이 놓고 꼭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이미 살고 있다. 고용은 성장과 어찌 보면 별개의 문제이고, 글로벌한 大자본 세력이나 국내의 기업재벌ㆍ언론재벌ㆍ대기업 등의 성장으로 그것을 이루려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고, 그나마 현재 실제로 대부분의 고용을 책임진 중소기업을 투자욕구를 자극해 고용문제를 해소한다는 것도 시간이 촉박하다. 그러나 김상조 권영준 김종인 등의 재야의 경제학자나 김종인 교수 같은 분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래도 바로 앞의 말을 한다. 길게 보고 깊게 보고 가야 한다며 꾸준한 군살 빼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후보가 주장하는 허울뿐인 '경제아젠다'를 면밀히 분석하고 고민이나 해보는 것인가? 이미 OECD 국가, 경제 선진국들은 경제성장률이 답보나 1~2% 성장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 여겨지고 있는 세상이다. 고도성장의 시대는 OECD나 G7에선 찾을 수 없다. 여기서 현재 국면에서 CEO적 사고란 '이벤트, 단기 경기부양책, 토목사업' 이런 것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보길 바란다. 국민총생산이 아닌 국민소득 면에서 말이다……

 

남미의 시카고학파라는 시카고 아이들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유학한 자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경제성장의 담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는 남미가 우리나라의 7,80년대 중반까지의 고도성장을 하는 시기라고 여기게 되는데, 근본적으로 전체 그 나라 국민의 행복과 가계성장 무관하게 양극화 문제가 대두된다는 점은 배려와 사회통합, 복지 이런 것에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남미 국가에선 지금 극도의 기업사회로 빠르게 진행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사회에 살고 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업가적인 사고 보다는 오히려 성장가치와 함께 성장을 국민의 것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회통합의 과정을 이루어나가고 사회안전망을 중시하는 것 등이 중요히 인식되는 가치로 자리 잡아야만 기업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상쇄시키는 것이라 본다.

 

성장이 답보상태인 많은 OECD는 보잘것없는 성장률에도 안달이 나거나 안절부절 하지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엔 그보다도 안정적 성장세 유지와 양보, 즉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정규직에서의 양보와 타협, 산업체 전반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의 양보와 중소기업에의 보다 큰 혜택 이런 사회통합의 과정이 성장을 담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회안전망 구축을 노무현 대통령이 수구 부패세력과 혹은 민주노동당 양쪽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욕을 얻어먹었고, 삼성이란 거대 자본과 IMF구제금융 조건으로 외국 자본의 침략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국내외 거대자본으로부터 국민을 지켜내려고 법률과 제도적 보장으로 규제와 통제 그리고 공권력에 의한 '조정'을 고마워해야지 한나라당과 같은 논리로 박대하면 우린 영원한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종말을 멍청하게도 우리 스스로가 재촉하는 것이라 본다.

 

권력자가 자본의 대변자 노릇을 해도 엄청난 모순을 보아 왔는데, 이젠 직접 자본 세력이 대변자 없이 본인 스스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거머쥐고 돈벌이가 될 유일한 진출하지 못한 영역인 금융과 공공부문 사업, 공익성 짙은 관급 사업, 그리고 언론 미디어까지 진출하려는 것이 뻔한데, 왜 그것이 불러올 제 목 조르기를 모른단 말인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두려움을 이미 체험하거나 깨닫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 이사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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