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혁명 당시를 묘사한 그림들. [32] | 나그네 eas***
- 번호 7840 200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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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사건 이때 지키던 수비군은 시민군에 의해 처형됨
수비군은 수적으로 불리해서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항복했지만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거이 맞아죽었다 소수만 총살됨
이그림의 앞의 여인 그림의 모델이 여인숙을 운영하는 아줌마였다고 한다 거의 도시빈민과 분노한 상인과 근로자였다 지방확산은 농민들이 이었당
혁명후 공회
공회에서 모든걸 결정했다.
모인사람들은 요세로 치면 야당인사, 재야인사, 시민단체관계자 시민군중 주요직책을 맡은사람이었다.
루이 16세 처형 국왕은 처형대상이 아니었으나 시민들이 분노 때문에 처형함
오스트리아로 도주중 자신의 모습이 세겨진 동전때문에 그곳 시민들에게 붙잡혀 시민군에게 넘겨짐 마리 앙뜨아네트는 국왕처형후 금발이 백발로 변했다고 한다
반혁명 세력은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위와 같이 단두대에 의해 공식처형되었당 단두대는 귀족에게 쓰는 처형방식이라고함
보통은 교수형과 총살형이었음 단두대는 종교인이나 왕족 법조계인사 행정관리 영관급이상의 장교 정치가등의 유력인사들 이었다.
당시 지배계층구조
당시 계층의 분류
계속해서 잔존 왕당파와의 전투
이때 계속해서 돈이나 이권 때문에 외국에 간섭이 심화되고 잔류 왕당파가 계속해서 반혁명을 해으나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결속만 다지는꼴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발전해야할 역량이 군사적으로
발휘하게 되므로서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발휘하면서 군사대국이 되었다.
나폴레옹 그는 혁명 당시 예비사관이었당 (요즘 의 예비군장교) 전문적인 포병장교가 부족했당
나폴레옹은 정식 육군사관학교 (당시에는 귀족만 갈수있었다)출신이 아닌 지금 우리로 치면 학사나 삼사 예비역사관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한다. 당시 식민지로 여겨던 코르시카 출신으로 그런학교에가서 영관급장교(그것도 잘해야 중령) 이상은 기대 할수 없었다
그의몰락은 혁명정신ㅈ(자유,평등,박애)을 배신(다른나라의 자유와 평등을 제한)하므로써 국민들에게 외면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해 소지 없애기 위해 이건 자유민주주의 혁명이었음
이후 프랑스 외세에 대항하며 성장했읍니다.
이후법체계가 엄격했읍니다.
빠삐용, 소설이지만 몬테크리스토백작, 레미제라블등이 나올정도로 엄격했는데 이유가 혁명후 약탈을 방지하기 위한조치였고 잔존해 있는 왕당파를 숙청하기 위한 이유였읍니다. 그걸 일시적으로 잡은 왕당파도 이용했읍니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경감(거이무학)도 원례는 하급순찰군(요세로 치면 파출소순경)에서 한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감으로 혁명후 출세한 겁니다.
지금의 프랑스는 자유민주주의 기본모델이 될정도로 민주화 되고 대기업이 아닌 자영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의 의견과 주장이 관철되는 정치경제사회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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