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문의 쑈

맹군아 준포야 이분 뒷꿈치라도 쫒아가거라...

장백산-1 2009. 2. 4. 19:59


어떤 사장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장입니다.

 

이 사장은 착합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입을 말합니다.

직원 회식이 있었답니다. 이런 수다 저런 수다 떨던 중에 여직원이 등산을 좋아한다며 근사한 스틱을 쥐고 산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며칠 후였답니다. 이 사장이 스틱 두 자루를 건네더랍니다. 자전거를 타고 종로에 나가 스틱을 사왔더랍니다.

 

말단 직원이 대놓고 말했답니다. 지난해 여름에 이 사장에게 "휴가비 좀 주면 안 되나요"라고 투덜거렸답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누구 하나 휴가비 얘기를 꺼내지 못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이 사장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몇 푼 안 되지만 지갑에 있던 지폐를 모두 꺼내주더랍니다.

이 사장은 무능합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평가합니다.

 

맺고 끊는 걸 분명히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만고만한 기획사와 올망졸망한 회사를 상대하다보니 인쇄대금을 떼이기 일쑤인데도 박정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금 결제를 하지 않은 채 연락을 몇 달간 끊었던 거래처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한 번만 더'를 간청하면 내치지 못하고 인쇄를 해준답니다. 그리곤 또 떼인 답니다. 이렇게 해서 누적된 미수금이 10억 원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총부채 10억 원과 똑같은 액수라고 합니다.

 

이 사장은 책망합니다.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한 달여 전에 직원 한 명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경기 한파에 인쇄 매출이 절반으로 줄자 어쩔 수 없이 공장 직원 한 명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공장장과 고참 직원이 감원이 불가피하다고 건의했고 결국 이 사장은 직원을 6명에서 5명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 사장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가 영업만 제대로 했다면 물량이 줄지 않았을 것이고, 물량이 줄지 않았으면 잔업을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직원을 내보낼 일도, 잔업수당을 받지 못해 급여가 30% 가까이 자동 삭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자책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영업을 못 했기에 이렇게 자책하는 걸까요?

일화 하나를 털어놓더군요. 몇 년 전 추석을 앞두고 큰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자기들 거래처가 7곳 있는데 추석 때 인사를 오지 않은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까놓고' 말하더랍니다.

이 사장은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18년 동안 인쇄일을 하면서 '선물'이든 '뇌물'이든 그 어떤 '물건'도 바친 적이 없습니다. 접대성 음주를 한 적도 없습니다. '공장얘기' 빼고 막걸리 한 잔 걸친 적은 있지만 접대성 폭탄주는 돌린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토로하더군요. "돌아보면 그게 최고의 영업덕목은 아니었다"고 자조하더군요.

이 사장을 만난 게 설 연휴 직전이었습니다. 1월 24일, 충무로 한켠의 허름한 식당에서였습니다.

술을 한 잔씩 돌리더군요. 창피하다고, 미안하다고, 자신이 추잡스럽게 느껴진다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면서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군요. 상여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됐다고, 그냥 적금 들어놓았다고 생각해 달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더군요.

 

이쯤 됐으면 직원들 얼굴이 굳어질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 숙인 사장을 '훈계'하더군요.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당뇨병 환자가 술을 마시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더군요. 한 직원이 그러더군요. 그래도 월급만은 또박또박 맞춰주지 않았냐고, 우리는 상여금을 못 타는 것뿐이지만 사장님은 월급 한 번 변변히 가져가본 적이 없지 않냐고 위로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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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홍준표 원내대표가 어제 국회 원내교섭단체 연설에서 호소했습니다. 서로 한발씩 양보해 고통을 분담하자고,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자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가 출범했습니다. “개별 주체의 이익보다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겠다”고 했습니다.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에 불참한 민주노총은 상장기업 559곳의 사내유보금의 10%인 39조원을 고용기금으로 활용하자고 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압니다.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고 고통을 조금씩 분담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노사정 대타협을 주장하면서도 비정규직법 개정을 밀어붙이려는 한나라당의 이율배반적인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먼저 상기하고 그것보다 세밀히 살펴야 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과문한 탓일까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한국경제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대기업 ‘회장님’이 고개 숙여 사죄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대기업 총수 일족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내놓고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외환위기 와중에도, 직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와중에도 재산 숨기는 데 바빴던 '회장님'이 적지 않았음이 검찰의 공적자금비리 수사에서 밝혀졌습니다.

 

비교가 너무 극단적이었나요? 회사가 파산 직전에 갔던 10년 전과 파산을 피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지금은 다른 걸까요?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회사 사정을 이유로 수많은 노동자가 내밀리는 현상은 똑같습니다.

 

막무가내로 ‘기계적 균형’을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동자를 쫓아낸 만큼 ‘회장님’도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목만 아플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은 보여야 합니다. 경영실태를 공개하는 양식있는 태도, 부하 직원의 실직과 임금삭감에 가슴 아파하며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양심적인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양해는 양식있고 양심적인 행동이 선행돼야 우러나는 것입니다.

 

인쇄소 사장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