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깨달음의 길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09-12-19)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모든 면에서 소승적 태도로 변하고 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마음수련을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특유의 간화선을 버리고 위빠사나로 되돌아가는 경향도 있다.
이는 일정부분 퇴보를 수반하는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다. 구조론은 원래 질에서 양으로 간다. 당연히 퇴보하게 되어 있다. 외부에서의 에너지 공급 없는 닫힌공간에서는 퇴보하는게 정상이다.
깨달음이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라는 본질, 신과의 소통이라는 우주적 스케일의 본질에서 벗어나, 질병의 치료나 스트레스 해소 따위 개인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 의한 필연적인 전개다. 불교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교종에서 선종으로, 과학에서 미학으로 발전해 왔다. 점점 어려워진 것이며 점차 고도화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머리를 만들어 왔다. 상부구조를 건설한 것이다. 원래 손발만 있었는데 대승이 일어나 몸통을 얻고, 선종이 일어나 두뇌를 얻고, 미학으로 전개하며 피가 돌아 완성되었다.
그러나 딜렘마다. 대승으로, 선종으로, 미학으로 갈수록 성철스님 정도 되는 한 두명의 큰 스님에게 의지하게 된다.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산중불교가 된다. 대중은 성철의 화두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필연적이다. 작은 보트를 탈 때는 누구나 선장 노릇 할 수 있다. 대승의 배는 크다. 거함으로 발전하면 뛰어난 리더만이 선장이 될 수 있다. 당연히 깨달음은 어려워지고 난해해진다.
석가의 제자 오백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소승의 작은 배라 누가 선장이 되어도 항해에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60억 인류 모두가 타는 큰 배가 되어 깨달을 확률은 1/60억로 줄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닫힌계가 있다. 울타리를 넘어 외부로 확대하면 난해해지고 고상해진다. 반대로 울타리 안에서 대중화 하면, 밑변을 넓히면 넓힐수록 점점 유치해진다. 조잡해진다.
진보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교조가 세를 불리면 점점 우경화 된다. 세상을 바꿀 계획은 사라지고 교사처우 개선 등에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갈수록 유치해진다.
한총련도 마찬가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하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교내 자판기사업에나 눈독 들인다. 학생회가 이제는 학생회가 아니라 실로 자판기사업회로 변질된지 오래다.
조직이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외부로 뻗어나가야 하며, 외부충격을 주어야 하며, 외부에서 에너지원을 끌어와야 한다. 그 방법으로 상부구조를 건설해야 한다. 그렇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깨달음과 정치.. 어느 면에서 상반된다. 깨달음은 고요한 내면의 세계, 정치는 시끄러운 시장바닥 세계다. 필자가 고요한 깨달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끄러운 정치이야기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끊고 은둔하면 결국 깨달음은 ‘사주, 관상 봐줍니다’로 퇴행하고 만다. 닫힌계 안에 출구는 없다. 절대로 없다. 깨달음은 대승의 노선, 미학의 노선, 돈오돈수 노선으로 가야한다.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라는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마음을 다스린다니 병을 고친다느니 하며 유치떨면 끝이다. 이는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 망조다.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미련 버려야 한다.
구조로 이해하자. 구조는 생명체와 같아서 끝없이 확산되는 동안만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외부에서 더 이상 신규자원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즉 닫혀있는 상태에서 저변을 넓히면 유치해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가요계가 외국음악과 교류하지 않는 상태에서 음반판매를 늘리려 하면 결국 총체적인 뽕짝화를 피할 수 없다. 수준은 계속 낮아질 뿐이다. 수준이 낮아야 팔리기 때문이다.
깨
달음을 태권도 단증따듯, 돈 내고 따는 걸로 여기는 독자라면 필자의 견해에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필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결국 더 어려워지고, 대중의 접근이 불가능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을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으로 간다. 그러나 대승의 배는 크다. 버스 운전사는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참된 깨달음은 리더 한 명만 도달해도 충분하다. 승객은 운전을 못해도 된다.
리더는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깨달음이고, 승객은 그 곳이 버스안이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깨달음이다. 작가는 그릴 수 있어야 깨달음이고 관객은 그림을 볼줄만 알아도 깨달음이다.
관객이 그림을 잘 그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모두 친구가 없고, 그러므로 무대에 오르라는 초대장이 없고 그 무대에서 한 곡조 뽑을 콘텐츠가 없어서 생겨난다.
비참이 만병의 근원이다. 마음의 병은 수련회 가서 눈감고 앉았다 해서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진보라는 목적, 문명이라는 방향성을 얻고 이상주의라는 나침반을 얻어 공유할 때 절로 해소된다.
비참의 극복이 진짜다. 깨달음의 본령이라 할 ‘세상을 바꾸는 대승적 기획’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고, 먼 길을 함께 가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불교가 인도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대승으로 발전했고, 중국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선종으로 발전했다.
또 왕실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미학으로 발전했다. 즉 울타리를 넘어 외부로 확대되어야 고상해지는 것이다. 발달하는 것이다. 문 닫아걸고 닫힌계 안에서 지지고 볶아서는 발전이 없다.
두 가지 진보형태가 있다.
1) 상부구조의 건설 - 닫힌계를 넘어 외부로 확장하며 질적인 고도화 방향.
2) 내부콘텐츠 조달 - 닫힌계 안에서 대중화 되며 접근성이 향상되는 방향.
이 두 가지 진보의 전개는 동시에 일어난다. 외부로 진출하기와 내부에서 살찌우기의 교차 형태다. 그 과정에서 일정한 질적 상승과 반대로 질적 하락을 수반한 콘텐츠 공급 향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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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중국,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의 확대는 불교가 고도화 되는 방향으로의 발전이었다. 그 정점에 육조혜능의 미학이 있다. 완성이 있다. 반면 태국이나 티벳, 라오스 등의 남방불교는 다르다.
국민의 90프로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국가에서는 점점 유치해져서 민간신앙화 되었다. 불교가 타락한 것이다. 그곳에서 진정한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콘텐츠 공급의 증가는 긍정적 측면이다.
대중화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구조의 양면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단선적인 구조, 흑백논리의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를 버리고 수준높은 입체적 사고로 조망해야 전모가 보인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유대인 집단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넘어 로마로 확장되면서 고상해졌다. 유대민족의 민족신앙이라는 유치함을 넘어 보편종교로 발달한 것이다.
교세가 외부로 뻗어갈 때는 고상해지고, 충분히 정착한 단계에서 내부적으로 확산되면 점점 미신이 되어간다. 오늘날 교회의 부흥회라는 것이 무당의 푸닥거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카톨록에서 기독교로 대중화 하면서 질적 수준이 낮아진 만큼 콘텐츠 공급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신부님 혼자서 다해먹던 카톨릭과 달리 개신교에서 신도의 쌍방향적 참여가 증가한 것이다.
진보운동 안에서도 그러하다. 외적확산≫질적상승≫한계봉착≫질적하락≫콘텐츠 공급 증가의 사이클이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일시 퇴보의 부정적 측면과 잠재적 진보의 긍정적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소수의 지식인 집단이 진보를 독점하다가 노무현 세력이 가세하면서 큰 폭의 질적 상승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상승할 배후지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점점 유치해져서 꼴이 우습게 되었다.
대신 노무현세력의 가세로 콘텐츠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증가했다. 딱딱하던 진보가 상당히 부드러워졌고, 촛불축제 등으로 즐거워졌고,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넓어졌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가 FTA를 해야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큰 폭의 수준상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걸고 건희와 몽구가 독점하면 보시다시피 최악으로 유치해진다.
노무현 당선은 한국이 인터넷 붐을 타고 외국으로 뻗아나가는 흐름이었다면, 이명박 당선은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문을 닫아걸고 내부에서 김정일과 지지고 볶으며 자위하는 흐름이다.
이는 구조의 문제이므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어서 우리가 노력해도 타개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부시와 김정일의 태클, 인터넷 거품의 퇴조, 공룡 삼성과 현대의 발호 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밸런스 원리가 작동하므로 잘 찾아보면 그 안에 맥이 있고 급소가 있고 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만간 대승의 큰 배를 띄울 밀물은 다시 몰려온다. 그 기세를 탈 준비 갖춰야 한다.
한국의 문제는 구조의 문제다. 지식이라는 손발은 있는데, 세력이라는 몸통이 없고, 미학이라는 두뇌가 없다. 우리가 외부로 뻗어나가 충돌할 때, 맨땅에 박치기 하면서 그것은 만들어진다.
구조의 외부가 외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만 보지 말고 경제와 문화도 보라는 말이다. 지식인 집단만 보지 말고 대중도 보고 사회의 여러 측면으로 시선을 확장시키라는 말이다.
바깥은 안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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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