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은 그저 보기만 하라 |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이치가 내 마음의 성품과 형상이며,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문은 자기수행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야한다. 그 뒤에는 교의 뜻을 버리고 오로지 현전일념으로써 선지를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른 바 출신(出身)활로(活路)니라.
- <선가귀감 11> - 교의 뜻이란 불변.수연과 돈오.점수가 선후가 있다는 말이다. 선법이란 일념 가운데 불변.수연과 성상.체용이 본래 일시이므로, 곧 즉(卽)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나, 즉(卽)도 되고 비(非)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사는 법에 의거하여 말을 여의고 바로 일념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 것이니, 교의 뜻을 버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한 자리를 어떻게 채울지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성품은 공(空)한 것이며, 정신적.물질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가능성, 즉 순수에너지 그 자체인 것이다. 어제의 내 몸과 오늘의 내 몸은 다르다. 오늘의 몸과 내일의 몸은 같은 몸이 아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변한다. 어제는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오늘은 얄미워진다. 오늘 그렇게 얄미운 사람이 내일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누누이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닦았다 해서 내일 안 닦아주면 다시 더러워진다. 하지만 성품은 닦아주는 것이 아니다. 아니 닦으려 해도 닦아줄 수가 없는 것이다. 성품을 닦는다는 것은 마치 투명하기 짝이 없는 유리창을 닦겠다고 걸레를 들고 설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럴수록 오히려 본성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단박에 보고, 그 공한 자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으로 채울 것인가, 악으로 채울 것인가, 내가 결정한다. 내 작품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 모습도 바로 내 작품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고쳐달라고 구걸하는 것 뿐! 하지만 내 작품이므로 내가 고칠 수 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고,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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