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정병조
-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길, 사성제 팔정도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대도를 이루고,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최초의 가르침을 베풀었던 내용 중 사제 팔정도가 있다.
사제 팔정도 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여덟 가지
올바른 삶의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괴로움에 관한 진리 고(고제),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집제),
괴로움을 없앰의 진리(멸제),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관한 진리(도제)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고통스러운 인간 실존, 그리고 고통스러운 이 자연과
우주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과 직면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욕망과 정비례할는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그러한 고통을 여덟 가지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사제 팔정도 중의 첫 번째인 고제이다.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늙는 것은 괴로움이다.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어야 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다. 원한이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 또한 고통스럽다.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스러움이니,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다.
이러한 관점은 결코 염세적인 것이 아니고, 삶의 진실이며 실상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부처님은 이러한 고통을 말하는 동시에 그 원인과 소멸의 길을 동시에
설하였기에, 염세 운운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우리는 삶의 실상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된다.
사성제 중 그 두 번째는 집제이다. 이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이다.
위에서 말한 다양한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를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심이라고 한다.
탐욕이란 상대방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졌을 때, 빼앗고자 하거나
갖고자 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탐하는 심리이다.
성냄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탐욕과 성냄의 근본적 원인은 치라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른 말로 무명이라고도 한다.
이 세 가지의 그릇된 마음의 작용,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러한 불교의 사고방식은 일상적인 범부 중생의 안목을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들의 일상적인 사고방식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외부적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우리들의 내면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가진 현대적 의의이다.
인간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꽃을 끄지 않는 한 결코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내면의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을 부처님은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삼독심, 즉 괴로움의 원인이 내면적이라는 불교의 선언이
사성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된다.
세 번째는 멸제라고 하여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탐,진,치를 극복한 삶을 뜻한다.
그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것이 네 번째의 도제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여덟가지 올바른 삶의 길(팔정도)이 있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생각(正思), 올바른 말(正言),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수단(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기억(正念),
올바른 마음가짐 정정(正定)
이러한 구체적인 여덟가지의 삶의 길을 통해서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 라는 삼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정견,정사는
지혜로써, 정어,정업,정명은 계로, 정정진, 정념,정정은 정으로 요약된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은 삼독심이므로 결국 열반이란 탐,진,치
삼독심을 극복하고, 이 삼독심이 마음이 계,정,혜 삼학의 마음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비밀, 십이연기
불교교리의 핵심의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초기 불교에 한해서는,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생성,소멸한다는
십이연기의 이론이 바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연에 대한 부처님의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 중에 갈대 짚단의 비유가 있다.
언젠가 부처님은 두 묶음의 갈대 짚단을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두 묶음을 세워 보라고 하였다.
그들은 두 개를 세우기 위해, 얼기설기 기대어 세웠다.
그러나 그 둘 중에서 하나를 없애면 나머지 하나도 넘어져 버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노라."
그때의 이것과 저것의 결합은 생성을 위한 인과 연의 결합이라고 보고,
또 이것과 저것의 해제가 결국은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이 인연의 설법을 생명의 나고 죽음에 비유해서 가르친 것이 십이연기이다.
즉, 열두 갈래의 인과 연이 이어짐이라는 뜻이다.
인이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이란 간접적인 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원인에 의해 생성,소멸되는 것이 인연이다.
열두 가지의 가치기준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삶과 죽음의 비밀에 관한 첫 번째는 무명이다. 그 뜻은 밝지 못한 근원적인
어리석음이다. 이 무명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한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사 윤회가 비롯된다.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행(行)이 생긴다. 이 행은 업과 동일하다.
행에는 잠재적인 무의식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행위 일반, 업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이 무명은 행(行)을 낳고 행은 식을 낳는다.
식(識)은 분별을 뜻한다. 그것도 근본적인 무명을 주체로 해서 생긴다.
명색(名色)이란 이름과 물질이다. 이 세상에서 형태지워진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그 물질적인 것들은 각기 이름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개념이 된다.
명색을 근거로 해서 육입이 생긴다. 육입은 육근과 같은 것으로 여섯 감각기관의
총칭이다. 눈,귀,코,혀,몸,마음 등으로 외무 사물을 인식한다. 이 육입은 촉을
일으킨다. 촉(觸)은 주관과 객관의 만남이다. 촉이 있으면 수가 있게 된다.
수(受)란 감각작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느낌의 작용 다음에 애(愛),
사랑의 감정이 나타나게 된다. 애에 잇달아 취가 있게 된다.
취(取)란 집착과 동일한 뜻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거나
멀리 하려고 한다. 이러한 취로부터 유가 생겨나게 된다. 유(有)는 존재이다.
이 유로 인하여 생(生) 즉, 태어남이 있게 된다. 태어남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가 성립한다.
부처님은 먼저 이러한 십이연기를 역관하였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 왜 그러한가? 태어남이 있으므로 그러하다.
왜 태어나는가? 존재가 있으므로 그러하다. 왜 존재는 생겨나는가?
집착이 있으므로 존재가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므로 집착이 있다.
또한 느낌의 작용이 있으므로 애가 있다. 주관과 객관이 있으므로 느낌이 있다.
주관과 객관의 만남은 여섯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명칭과 형태에 의해 여섯 감각기관이 생겨나고, 분별 때문에 명칭과 형태가......,
행 때문에 분별이......, 무명 때문에 행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서 '무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의문은 비연기론적이고 비인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십이연기 중 각지(各支)의 관계가 둥근원과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인이 되고 연기 되기에 무명이 어디에서 비롯하였는가라는 의문은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십이연기란 결국 삶과 죽음의 비밀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무명의 극복이 가장 중대한 출가수행의 요체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무명이라는 근원적인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삶의 자세가 수도라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었다.
이러한 십이연기론에서 불교의 역사의식이 도출된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유전연기(遺傳緣起) 이다. 유전이란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뜻하는바,
이는 무명이 하자는 대로 육신으 내맡겨 버리는 삶의 태도이다. 무명이 시키는
대로 그 업풍에 휘말리면서 끊임없이 남을 괴롭히고 적당히 스스로의 이익을
취하면서 감각적인 쾌락만이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 환멸연기(還滅緣起) 이다. 이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인데,
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는 삶의 태도이다. 유전연기는 수동적인 역사의식
이다. 그러나 환멸연기는 역사의 질곡을 극복하려는 역동적인 역사의식이다.
이 잘못된 역사를 자신의 힘으로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이다.
불교 2천 5백년 역사를 수놓았던 위대한 고승 대덕들의 삶은 환멸연기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범부 중생들이 무명이 이끄는 대로 육신을
맡겨서 덧없는 시간과 공간을 윤회-유전하는데 반해서 그 위대한 선각자들은
윤회를 극복하고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업과 윤회의 초극
업(業)이라는 말은 원래 까르마(karma), 즉 우리들의 행위 일반과
그 행위들에 따른 과보를 자칭하는 폭넓은 의미의 어휘이다.
업은 불교의 중심개념이다. 모든 생명들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즉, 신,구,의 삼업이다.몸.입.마음 등으로 행하는 것이다.
인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몸으로 하는 나쁜 일은 구체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며 또한 자기의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행위로서 살생,도둑질,음행 등이 있다.
입으로 하는 악업에는 거짓말, 나쁜 말, 이간질하는 말, 속이는 말 등이 있다.
<<법구경>>에는 '사람이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도끼로
남을 해치고 스스로를 해친다'는 구절도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말에 대한
경계를 특히 중시하였다. 마음으로 저지르는 업은 탐,진,치의 삼독심이다.
인간은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자는 물론 신,구,의가 작용하지 못하므로
업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은 곧 어떤 형태로든 업을 짓기 마련이다.
이 업은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다. 인과응보가 그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업의 덩어리가 생겨서 그것이 미래의 생존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업,악업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란 '삼사라(samsara)'를 번역한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또 다른
생명으로 재생을 거듭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윤회에는 육도(六道)가 있다.
① 지옥: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최저의 존재이다.
악업을 짓는 사람들이 떨어지는 곳이며,
살벌하고 음울하고 무서운 곳이라고 묘사된다.
② 아귀: 일종의 귀신이며 상징적인 세계이다.
인도말로 쁘레따(preta)라고 하는데,
굶주림의 고통을 매우 심하게 받는 세계이다.
③ 축생: 본능적인 세계로서 짐승의 세계이다.
④ 아수라: 난폭,광폭한 약신으로서 다툼뿐인 세계이다.
흔히 쓰는 아수라장이란 말은 바로 이것에서 연유한다.
⑤ 인간: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작은 행복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무로 되돌아가야 하는 고통을 안고 있는 세계이다.
⑥ 천: 하늘의 세계, 여기는 인간 세계보다 훨씬 행복하고 좋은 복락을 누리지만,
여기에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이별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여섯가지 세계는 행복과 불행에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끊임없는 재생의 고통이 있다는 점에서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불리고 있다.
그 육도윤회에 태어나서 끊임없는 나고 죽음의 길을 되풀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이 되는 것은 업이다. 그래서 선업을 닦았을 때 천(天)이나 인간으로 태어나고,
악업으로써 업의 덩어리를 맺었을 때 축생이나 아귀, 지옥 등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업과 윤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우리 자신의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육도윤회를 유추할 수 있는데,
천계같은 평온한 기쁨을 맛보는 반면, 아수라 같은 혼란과 아귀 같은 굶주림도 겪는다.
하루뿐 아니라 일순간 속에서도 육도를 윤회하며 일생으로 확대해도 그러하다.
윤회의 주체가 업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업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업이란 마치 눈과 같다. 원래는 물이지만 기온에 따라 눈이라는 형태로서 엄청난
위력을 지닌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없이도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육도윤회를 이루는 것이다. 업의 바람, 그 긍정성과 부정성을 생각해 보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를 상상해 보자.
그대의 전생을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라.
그대의 미래를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라.
결국 현재는 과거를 잉태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이 현재의 삶 속에서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할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윤회를 극복하는 길,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의 길이며 해탈이다.
윤회에서 벗어났기에 해탈이며 궁극적인 경지를 얻었기에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윤회, 이것은 바로 중생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료:동국대학교정병조교수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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