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 法 頂
묵은 편지 받고 회신이 늦었다. 마음의 길은 열려 있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기고 있다. 혼자서 겨울 준비를 하고 있을 처지를 생각하고 사연을 띄운다. 깊은 밤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문득 양관(良寬)선사의 시가 떠오른다.
고요한 밤 초암(草庵)안에서 홀로 줄 없는 거문고를 탄다 가락은 바람과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그 소리 시냇물과 어울려 깊어간다 물소리 넘칠 듯 골짝에 가득 차고 바람은 세차게 숲을 지나간다 귀머거리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 희귀한 소리를 알아들으랴.
옛 사람들도 한결같이 말했듯이, 道(眞理)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해야 한다. 지닌 것이 많으면 道에 대한 뜻을 잃어버린다. 가난해야만 道에 가까이 할 수 있다. 소유를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정신활동을 자유롭게한다. 소유에 눈을 팔면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로써 족할 뿐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일이 곧 행복의 비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고자 하는 소유욕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생활을 최소한으로 단순화하라. 그리고 마음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하라. 투명한 마음의 작용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 과잉소비사회와 포식사회가 인간을 멍들게 하고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만든다.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지적했듯이,
인간은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그 자체가 또다른 소유욕임을 알아야한다. 그는 말한다.
'신으로부터조차도 자유로워져야 할 만큼 자유롭게 해방된 상태를 참으로 가난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속과 속박이 없고 집착이 없는 '완전한 자유'라고 그는 말한다. 모든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얽히거나 매이지 않고 안팎으로 홀가분하게 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전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개체에서 전체에 이르는 길이 여기에 있다.
요 근래 여러 곳의 선원에서 해제비(解制費)로써 막대한 돈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물량으로 넘치는 선원의 분위기와 이 땅의 선풍(禪風)이 우울하게 묻어온다. 명심하라. 수행자가 진리를 실현하려는 구도자로서 자신의 순수성을 자키려면,
세속적인 사찰제도에서 벗어나 그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려보라.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宗敎의 本質이 무엇이고,
어떤것이 宗敎가 아닌지를 냉정히 가려보라. 이것을 가려 볼 수 있다면, 승려나 사제 혹은 목사나 책들이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믿고 따를 幻想이나 虛象을 만들어내지 않게 될 것이다.
절이나 교회에 宗敎가 있다고 잘못 알지 말아라. 어떤 宗敎든지 일단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宗敎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때 그 宗敎는 더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버린다. 宗敎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宗敎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宗敎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는 없다.
지켜보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지켜 보라.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또다른 생각이고 망상이다. 그저 지켜 보기만 하라. 지켜 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짝을 내려다 보듯이 거기서 초월해 있다. 지켜 보는 동안은 이러니 저러니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여라. 어느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면서도 그 받아들인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本來의 自己自身과 마주하라,
삶은 영원한 현재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그리고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이고 이 다음으로 미루게 되면 현재의 삶이 소멸되고만다.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임을 잊지말라. 행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누가 깨닫는다고 했는가? 깨닫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문제다. 깨달으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달음은, 굳이 말을 하자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이고 꽃향기처럼 풍겨오는 것.
그러니 깨닫기 위해서 정진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은 한결같이 말한 바 있다. 본래 성불(成佛)이라고, 본래부터 다 이루어져 있고 갖추어져 있다는 말씀이다. 본래 성불이라면 어째서 다시 수행을 하는가?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닦지 않으면 때묻으니까 . 마치 거울처럼. 닦아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럼 깨달음이 드러날 때는 언제인가? 우리들의 생각과 욕망이 비어 있을 때, 깨달음을 기다리는 그 마음이 사라졌을 때,
안팎으로 텅텅 비어 있을 때, 이때 문득 눈부신 햇살이 내 안에서 비쳐나온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바른 수행이 아닌 줄 알아라.
대오선(待悟禪)은 선이 아니란 말을 기억하라. 宗敎的인 여행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저 늘 새롭게 출발할 뿐이다. 그 새로운 출발 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다. 홀로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거듭거듭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있어서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놓은 것을 내가 아는 체할 뿐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몸소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참으로 내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공부가 됐건 일이 됐건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 하라. 그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규칙적인 명상의 시간을 가지라.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깊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곧 부처다.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깊은 명상 속에 있을수록 의문이 가라앉는다. 안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에게 물을 일이 하나도 없다. 의문이란 마음이 명상하지 않고 들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밖에 있는 스승은 다만 우리 내면의 스승을 만나도록 그 길을 가리켜 줄 뿐이다.
받아들이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어 있으면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어지럽힌다.
낙엽으로 뒹구는 후박나뭇잎 치다꺼리에 수고가 많겠다. 늘어나는 빈가지에서 새봄의 싹을 찾아보아라. 나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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