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창시자의 선(禪)
/ 상권: 대혜의 깨달음과 가르침
김태완 지음|종교(불교)|양장|신국판(152x225)|468쪽|값 24,000원|
ISBN 978-89-89590-25-5 03220|2011. 12. 1일 발행|침묵의 향기(T. 031-905-9425)
하권: 대혜의 간화선
김태완 지음|종교(불교)|양장|신국판(152x225)|323쪽|값 18,000원|
ISBN 978-89-89590-26-2 03220|2011. 12. 1일 발행|침묵의 향기(T. 031-905-9425)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편인 간화선,
창시자의 간화선은 본래 이러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간화선을 소개한 이래,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은 8백여 년 동안 한국 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편으로 자리해 왔으며, 그 동안 한국 불교는 간화선의 종주국이라 할 만큼 간화선의 전통을 독보적으로 이어왔다. 그런데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종고의 어록 전체는 올해인 2011년에야 비로소 완역되었으며, 대혜보각선사어록 전 30권을 만 5년에 걸쳐 완역한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간화선 창시자의 禪》(상, 하권)은 김태완 원장이 대혜어록 전체를 최초로 완역한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간화선의 원형을 온전히 되살려낸 책이다. 대혜 스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여 선(禪)의 교과서, 간화선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만큼 선과 간화선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선과 간화선에 대한 바른 이해, 올바른 선 공부법, 간화선 공부법, 공부인들이 빠지기 쉬운 갖가지 잘못된 공부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선 공부인들의 구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오매일여와 좌선수행 등 간화선 관련 일부 통념들이 창시자의 가르침과 어긋남을 지적했으며, 우리나라의 간화선에서 지침 중 하나로 삼는 몽산덕이의 간화선은 대혜의 간화선뿐 아니라 남종선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간화 용어들의 잘못된 번역들도 바로잡았다.
책 속에서
수행이란 곧 유위(有爲)의 조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역시 조작된 결과가 나온다. 조작된 결과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니고, 불이중도인 자성(自性)도 아니다. 불이중도란 마음이 어디로 향하지도 않고 어디에 머물지도 않고 어떤 조작하는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의 깨달음이다. 마음은 본래 원만구족하여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따로 없다. 수행하여 나아갈 곳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는 어떤 수행도 없다. 범부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이지만, 범부는 다만 스스로 일으킨 분별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일깨우는 한 마디 말을 듣고서 범부 스스로 곧장 망상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뿐인 것이다.(상권 92-93쪽)
이 세 번째 깨달음에서 대혜가 성취한 것도 “마음이 없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없고 앞에 나타나는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곧 마음이다. 마음이란 물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색깔을 보면 색깔이 마음이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마음이고, 생각하면 생각이 마음이고, 느끼면 느낌이 마음이다. 우리 주위를 가로막고 있는 온갖 경계가 바로 마음 자체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감옥이고 감옥이 사람이니, 사람은 감옥 속으로 들어올 수도 없고 감옥을 벗어날 수도 없다. 얻을 법(法)도 없고 버릴 비법(非法)도 없는 것이다. 완전한 불이법(不二法)이다.(상권 193쪽)
간화선의 관건은 화두를 살펴봄으로써 사량분별을 가로막아 부수어 버리는 것인데도 이것을 모르고, 도리어 화두를 얼마나 잘 붙잡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간화선의 요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요할 때에도 화두를 잡고서 놓지 않고, 움직일 때에도 화두를 잡고서 놓지 않고, 꿈속에서도 화두를 잡고서 놓지 않고,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를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한 사람들이다.(하권 142쪽)
몽산은 선정(禪定) 속에서 화두를 끊임없이 제시하여 화두가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꿈속에서까지 저절로 나타나 지속할 때에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대혜를 비롯한 선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하권 210쪽)
지은이 김태완
부산 무심선원 원장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중국 조사선의 연구>로 부산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선학(禪學)을 전공하는 동안 스승인 박홍영 거사를 만나 선을 공부했으며, 수년 전부터는 무심선원을 열어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와 역서로는 《선으로 읽는 금강경》《선으로 읽는 대승찬》《선으로 읽는 신심명》《선으로 읽는 반야심경》《마조어록》《바로 이것!》《조사선의 실천과 사상》《서장공부》 등이 있다.
심선원 전화번호 051-515-7226
출판사 리뷰
간화선, 원형으로 돌아가자
- 간화선의 원형을 최초로 복원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간화선을 소개한 이래,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은 8백여 년 동안 한국 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편으로 자리해 왔다. 그 동안 한국 불교는 간화선의 종주국이라 할 만큼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독보적으로 이어왔으며, 이제는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적극적인 모색을 하고 있다. 때마침 티베트 불교의 금강승 수행과 남방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일본 불교가 널리 보급된 서구에서도 근래 한국 불교의 간화선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간화선을 어렵게 느끼거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한 불자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와 위빠사나 수행이 점차 보급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간화선의 위기론이 제기되고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간 다양한 논의와 성찰이 진행되어 왔다.
기회와 위협 요인이라 할 만한 이 두 가지 상반된 흐름 속에 놓인 한국 불교의 간화선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간화선 창시자의 가르침으로 충실히 돌아가서 간화선이란 본래 무엇인지를 원점에서 살펴보고, 간화선의 원형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 남송대의 선승 대혜종고가 창시한 본래의 간화선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방편이 아니고, 오랫동안 좌선을 하며 수행해야 하는 방편도 아니며,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고 제대로만 한다면 비교적 쉽게 효과를 볼 수 있는 탁월한 방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전통이든 긴 세월을 거치다 보면 창시자가 제창한 원형이 점차 왜곡되어 훼손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심지어 원형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나 심지어 창시자가 배척한 이질적인 것들조차 그 속에 섞여들어 후대인들에 의해 본래의 모습으로 오해될 수가 있다. 긴 역사를 가진 한국 불교의 간화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늘날 간화선의 위기론이 제기되고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퍼지고 있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간화선의 원형이 어느 정도 왜곡된 것도 그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간화선 창시자의 가르침이 본래 무엇이었으며, 그 가르침에 비춰 볼 때 우리의 간화선이 그 사이 왜곡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점들이 있는지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불교의 간화선 전통은 8백년이 넘지만, 간화선을 창시한 중국 남송대의 선승 대혜종고의 어록 전체는 올해인 2011년에야 비로소 완역되었다. 대혜보각선사어록 전 30권을 만 5년에 걸쳐 총 6권으로 완역한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 선불교를 전공한 뒤 조사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태완 원장은 대혜어록 전체를 최초로 완역한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간화선의 원형을 온전히 되살린 《간화선 창시자의 禪》(상, 하권)을 펴냈다. 대혜 스님의 전체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여 선(禪)의 교과서, 간화선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만큼 선과 간화선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대혜 스님의 어록을 중심으로 하여 올바른 선 공부법, 간화선 공부법, 공부인들이 빠지기 쉬운 갖가지 잘못된 공부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선 공부인들의 구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좀더 세부적으로 보면, 먼저 선사들의 어록을 바탕으로 선(禪)의 본질인 직지인심ㆍ견성성불이 무엇인지, 선에서는 본래 어떤 방편을 사용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다음에는 대혜 스님의 방대한 어록에 기초하여, 대혜 스님이 어떻게 공부하고 깨달았으며 어떻게 가르쳤는지, 대혜의 간화선은 본래 어떤 것이며, 깨달음이 발생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화두의 종류와 역할, 화두를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 화두 공부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등을 상세히 얘기하고 있다.
또한 대혜 간화선의 표준적인 모델을 구성해 제시하였고, 무문혜개, 고봉원묘의 간화선이 대혜의 간화선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살펴보았으며, 우리나라의 간화선에서 많이 지침으로 삼는 몽산덕이의 간화선은 대혜의 간화선뿐 아니라 남종선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간화 용어들의 잘못된 번역들도 바로잡았다.
간화선이란 본래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
책은 먼저 ‘선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그것은 간화선 창시자인 대혜 스님이 조사선을 통해 깨달았고, 스님이 제창한 간화선 역시 조사선이라는 바탕 위에 깨달음을 돕는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화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사선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한다.
육조혜능에서 비롯한 중국 조사선은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표현되듯이,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킴으로써 마음의 본성을 보아 깨닫게 한다. 즉심시불, 즉 당장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당장 이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장 이 마음이란 애초부터 부처의 마음으로서 분별망상에서 벗어난 불이의 마음이며, 수행을 거쳐서 얻어지는 마음이 아닌 평소의 마음, 곧 평상심이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이 마음의 참된 모습인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범부중생이 자기 마음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망상을 보는 까닭은 분별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망상과 실상에 대한 분별을 포함하여 일체의 분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분별이라는 꿈에서 문득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조사와 선사들의 가르침은 단지 분별심을 가로막아 부수려는 데 목적이 있으며, 대혜 스님의 간화선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살펴볼 때도 그 본질은 사량분별을 배제하고 곧장 불이법문으로 이끌어들이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화두의 뜻을 헤아리거나 간화선을 수행의 방식으로 여기는 것은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대혜 스님의 가르침 전체를 체계적으로 꼼꼼히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1. 오매일여를 오해하고 있다
화두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흔히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나 숙면 속에서도 화두를 기억하여 놓지 않는 상태를 오매일여라 일컬으며, 그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혹은 한결같은 무언가가 있어 이 세 가지 상태에서도 언제나 또렷이 의식되는 상태, 또는 꿈속에서도 자신이 늘 주인공 노릇을 하는 상태를 오매일여라 여기고, 그 상태에 도달하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이는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에 한결같다는 말의 뜻을 분별심으로 오해하는 것이며,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자신이 따로 있다고 여기고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대혜 스님 역시 깨어 있을 때와 달리 꿈속에서는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고 경계에 부림을 당하여 오매일여하지 않은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오극근의 한 마디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았는데, 이후 ‘향시랑 백공에 대한 답서’에서 “꿈과 꿈 아님이 하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라고 하듯이 사실은 자신이 분별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 문제이며, 망상분별에서 해탈하여 불이법문에 들어오는 것이 깨달음임을 말하고 있다. 깨닫고 나면 꿈속에서도 마음대로 주재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재하는 깨어 있을 때와 주재하지 못하는 잠잘 때가 둘이 아닌 불이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2. 좌선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대혜 스님은 온갖 세간의 일들에 끄달리는 사람들의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이 공부로 되돌리기 위한 목적의 좌선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방편으로만 허용했을 뿐이다. 스님은 좌선에 몰두하면서 좌선을 공부로 삼고 있던 묵조선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유통판 언충에 대한 답서’에서는 장좌불와에 몰두하는 수행자를 바른 길로 인도한 이야기를 인용하며 장좌불와를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좌선하고 있던 마조 스님에게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느냐? 좌불(坐佛)을 배우느냐?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라고 한 남악회양 선사의 깨우침도 언급하고 있다.
대혜 스님이 계승하고 있는 육조 문하의 남종선은 좌선이든 무엇이든 어떤 종류의 수행도 말하지 않으며,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불이법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며, 당장 이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3.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대혜 스님이 간화할 때에 가장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은 일부러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면서 화두를 살펴본다면 깨달음은 결코 없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나는 지금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지금 깨닫지 못했으니 나중에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인데, 이는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격이며, 분별망상에 빠져 있으므로 일체의 차별에서 벗어난 참된 깨달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간화선은 이렇게 깨달음으로 이끈다
화두는 생각을 차단하고 마음의 갈 곳을 차단하는 장벽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화두를 자신에게 말해 주고 일깨워 주어 화두를 살펴보면서 화두와 버티게 되면, 화두가 마음이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 되어 마음은 마치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가 꼼짝도 못하는 것처럼 되고, 이렇게 마음이 꼼짝 못하여 갑갑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곳에서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깨달음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간화선뿐만이 아니라 선에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일반적인 조건이며, 선사들의 말씀을 비롯한 선의 방편은 공부인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5. 간화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것이다
대혜어록에서 간화선을 공부하라고 권한 대상은 묘도선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 재가자들이었다. 대혜 문하의 출가자들은 대혜 스님과 직접 문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 권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재가자들에게 권한 이유는 재가자들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간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혜 스님은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부지런히 일할 때나 차 마시고 밥 먹을 때나, 손님을 접대할 때나 집안의 갖가지 일을 처리할 때 등 언제나 간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간화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좌선을 하면서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6. 화두는 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살펴본다’고 하지 않고, ‘화두를 든다’거나 ‘화두를 잡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거(擧), 제시(提撕)를 오역한 것으로서 이 글자는 ‘화두를 말하다’‘화두를 일깨우다’로 번역해야 옳다.
‘화두를 든다’고 말할 때도 보통 사람들은 화두를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거화두(擧話頭)’를 ‘화두를 기억하다’로 번역한 것은 몽산덕이의 간화선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화두를 기억한다는 것은 본래 대혜 스님이 가르쳤던 내용이 아니다.
대혜 스님이 주로 사용한 간화(看話)라는 용어에서 간(看)이란 ‘살펴본다’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며, 따라서 간화의 본래 의미는 ‘화두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든다거나 잡는다고 하는 대신, ‘화두를 살펴본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7. 몽산덕이의 간화선은 대혜의 간화선과 다른 점이 많다
우리나라 간화선에서 지침서로 삼고 있는 책은 대혜종고의 《서장》과 고봉원묘의 《선요》, 몽산덕이의 《몽산법어》다. 이 중 고봉원묘의 간화선은 대혜종고의 간화선과 기본 취지가 동일하지만, 몽산덕이가 가르치는 간화선은 대혜의 간화선과 다른 점들이 많다.
예컨대, 몽산덕이는 좌선을 하여 선정의 힘으로 화두를 일깨우라고 하는데, 이는 북종선이나 묵조선의 가르침과 동일하며, 남종선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도 어긋나고 대혜의 간화선과 어긋난다. 대혜는 좌선하면서 화두를 제시하라고 말한 적이 없고, 다만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제시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선정의 힘에 의지하여 공부한다는 것 역시 선종의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르침으로서 몽산의 독특한 가르침이다.
선정 속에서 화두를 끊임없이 제시하여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 꿈속에서도 화두가 한결같이 앞에 나타나 지속할 때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화두가 잠잘 때와 꿈속에서까지 한결같이 늘 지속된다는 것은 대혜는 물론 무문과 고봉에게도 없었던 주장이며, 육조 문하의 선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생소한 주장이다. 선에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일반적인 상황 역시 몽산의 말과는 달리 분별사유가 가로막혀서 마음이 솜씨를 부릴 수 없고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진퇴양난의 곳에 마주친 상황이다.
결국 《몽산법어》에서 몽산이 가르친 간화선은 몽산의 염불화두법과 같은 종류의 수행법에 속한다. 이 방법은 간화선에다 정토의 수행법을 도입한 것이며, 북종의 좌선선정 수행법도 함께 혼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몽산법어》의 간화선은 대혜가 가르친 간화선이 아니며, 또한 좌선수행을 배척하고 불이법의 견성만 말하는 육조 문하의 남종돈교법문과 임제종의 종지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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