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있느냐???

장백산-1 2012. 9. 18. 10:18

 

 

 

Ludwig van Beethoven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2월이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스레 되돌아보이는 마루턱에 올라선 것이다. 마르틴 부비가 하시다즘(유태교 신비주의)에 따른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게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自身을 向해 소리내어 읽어보라. 自己 自身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通해서, 우리는 各者 지나온 歲月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自身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歲月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12월이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 받았는지 子息들에게 기울인 精誠이 참으로 子息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내 自身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흘하면, 機械的인 無表情한 人間으로 굳어지기 쉽고 動物的인 屬性만 덕지덕지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게 된다. 우리가 같은 生物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自身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眞情한 自身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지난 10월 중순에 겪었던 일이다. 흙벽돌 찍는 일로 오후 늦게 이천에 있는 이당 도예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은 맑게 개인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방금 해가 넘어간 뒤라 도로의 차들은 미등을 켜고 달리는 그런 시각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그 하늘빛이 너무 고왔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석양의 투명한 빛이 산자락과 능선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 산의 능선이 마치 우주의 유장한 율동처럼 느껴졌다. 언뜻 보니 산등성이 위에 초이틀 초승달이 실날같이 걸려 있었다. 능선 위에 펼쳐진 하는빛은 고요와 평화로 물들어 잇엇다. 시간이 흐르자 노을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어둠이 내려 이제는 산의 윤곽도 검게 굳어져 초승달의 자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어린애 눈망울 같은 초저녁 별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햇다. 언뜻언뜻 이런 풍경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서쪽으로 달려온 길이 그날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自然은 이토록 아름답다. 自然은 實로 神秘롭다. 주어진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日常의 우리는 그저 無感覺하게 흘려보내고 잇다. 이롸 같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그런 고요와 平和를 우리는 한 生涯를 通해서 몇 번인가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가. 우리들의 感性이 여리고 透明하던 時節에는 길섶에 피어있는 풀꽃 하나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주면서 그 아름다움과 生命의 神秘에 感動을 하곤 했었다. 하루해가 기우는 해질녘의 노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싶도록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이제 막 떠오른는 보름달을 보면 식구들을 불러 달을 보라고 소리치기도 했었다. 이 글에서 내가 시제를 굳이 과거형으로 '했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그와 같은 自然의 아름다움과 生命의 神秘 앞에 無感覺한 生物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生活形態가 産業化와 都市化로 혹은 情報社會로 치닫고 있을수록 事物의 아름다움과 生命의 神秘는 우리네 삶을 떠받쳐주는 柱樞가 되어야 한다. 나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世上이 온통 否正과 非利와 爆力과 殺肉으로 뒤범벅이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自然의 아름다움과 生命의 神秘를 등진 非人間的인 現代社會의 疾病이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일인지,
      人類 歷史가 始作된 이래 끊임없이 論議되어 왔다. 한마디로 가릴 수 없는 複合的인 事項이지만,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느낄 수 있다면 오늘처럼 황량하고 살벌한 '人間 末種'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 삶의 터전에 우리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 쉬어 가고자 하는 손님인 철새들에게 함부로 총질을 해서 무참하게 殺肉을 일삼는 사람을 어떻게 子息을 낳아 기르는 一家親戚을 거느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목숨을 지닌 生命體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무고한 들짐승들을 덫이나 올가미로 마구 잡아 滅種시키고 있는 이웃을 어떻게 같은 사람의 隊列에 세울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새와 들짐승 같은 自然의 親舊들이 사라지고 나면 生物이라고는 달랑 사람들만 남게 되리라. 그때 家電製品과 쓰레기와 自動車와 煤煙에 둘러싸여 있을 우리들 自身을 한번 想像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生物이 아닌 傀物일 것이다. 感傷과 感性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르다. 人間의 認識能力인 감성(感性)이 마비된다면 그때 우리는 온전한 人間일 수가 없다. 對相에서 받은 느낌으로 마음 아파하는 일을 감상(感傷)이라고 하는데 感性이 무디어지면 感傷의 機能도 할 수 없다. 어떤 事物이나 現狀 앞에 無感覺하고 無感動한 것은 生物이 아니다. 經濟만을 最高 價値로 여기는 現代社會에서는 人間의 가장 은밀한 속뜰인 그 感性이 메말라간다.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너는 네 새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 IMAGE 19 =-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1
      첼로 소나타 1번 사단조 Op.5-1

      Cello : Mstislav Rostropovich
      Piano : Sviatoslav Richter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1 1st Adagio sostenuto Allegro (17:53) Cello : Mstislav Rostropovich Piano : Sviatoslav Richter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1 2nd Rondo, Allegro vivace (06:52) Cello : Mstislav Rostropovich Piano : Sviatoslav Rich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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