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무아인 이유

장백산-1 2012. 9. 18. 12:41

 

 

무아(無我)의 이유

 

청화 스님

 

  

금강경에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無我法에 通達한 사람이 진실로 보살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없다 하는 무아법(無我法)에 通達하여야만 참다운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저번에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우리 범부와 성자와의 차이도 역시 내가 있다는

것을 여의는가 미처 못 여의는가에 있습니다.

'나' 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여읜다면 범부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滅盡)되어 버려서, 그 번뇌(煩惱)가 다 끊어져버려서

그야말로 참,무아(無我)가 되고 대아(大我)가 되어야 비로소 聖者인셈이지요.

 

또, 정도(正道)와 외도(外道)의 差異도 역시, 정도는 마땅히 그 구경지(究竟地)가

반드시 '내가 없다' 하는 무아를 증득(證得)해야만 정도(正道)의 표준이고, 그에

反해서 외도(外道)는 어디까지나 나를 못 여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떠한 신통자재(神通自在)로 재주를 많이 부린다 하더라도

나를 못 여의는 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할 때에 "내가 없다 無我다" 이런 말은 하기는 쉽습니다마는 '

分明히 내가 存在하는데 어째서 없는가' 이렇게 生覺할 때는 참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화두(話頭)도 들고 염불(念佛)도 해서 功夫를 많이 하면은,

그때는 '나' 라는 것이 그냥 문득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좀처럼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우선 방편적(方便的)으로 '내가 어째서 없는가' 하는 原因을

 좀 캐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부처님 교리(敎理)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듣고서, 그냥 얼른 느껴가지고서 깨달아 버리면은 문제가 안되겠습니

마는, 業障이 가리어버리면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을 못합니다.

보리심(菩提心)자리, 자성(自性)자리를 미처 못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방편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한계(限界)를 제시(提示)해

가면서 해설(解說)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意味에서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아(眞我)입니다. '참나' 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아(大我)라, '큰 나' 입니다.

그리고 自己라 하는 범부성(凡夫性)이 소아(小我) 즉 망아(妄我)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나를 말할 때는 보통 3次元으로 말합니다.

그 한 가지가 망아(妄我)입니다.

妄我란 우리 중생들이 미처 煩惱를 못끊은 卽 말하자면

탐심(貪心), 진심(瞋心)치심(痴心)에 얽매인 '결박된 나' 요 '망령된 나'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妄我는 本來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했듯이, 妄我는 마치 어두컴컴할 때에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見解, 事實은 있지 않은데 妄想으로 있다고 生覺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또는 그대가 이쁘다 밉다 이런 것은 妄我입니다.

事實은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에 잘못 봐서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와 같은 見解, 이것이 妄我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없지가 않습니다.

因緣 따라서 이렇게 存在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存在를 가리켜서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假我란 잠시간 거짓으로 存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아(假我)의 참다운 本質이 무엇인가?

곧 假我의 本바탕이 이제 무아(無我) 이고,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입니다.

우리가 目的으로 하는 것은 망아(妄我)를, 망령된 나, 잘못 본 나를 떠나는

同時에 分明히 지금은 있는 가아(假我)의 本質을 찾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성불(成佛)의 공부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다고 하는가?

이런 問題는 중요한 문제니까, 좀 군더더기 같지마는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공부해보면 아시겠지마는, '나'라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貪心이나 嗔心이나 痴心이나 모두가 '나'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 라는 問題만 解決되면 그런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煩惱의 모든 것 卽, 根本煩惱, 首煩惱가 다 를 基準해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내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明白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못되는 限에는 제아무리 말로는 다 해도, 역시 나를 잘 못떠납니다.

따라서, 무아(無我)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정도는 척척 외워서, '나' 라는 망상(妄想)이 나올 때는

그냥, 이런 법문으로 대치를 해 버려야 합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고?

'사람 몸(人身)에 있어서 이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執着함을 법아(法我)라 합니다'

諸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山이나 내(川)나 또는 무슨 주의(主義)나, 좋다 궂다 하는 것이나,

유정(有情), 무정(無情) 一切 만유(萬有)를 가리켜서 제법(諸法)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몸(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없습니다'

五蘊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 몸은 색(色)에 해당하고 사람 마음은 수, 상, 행, 식(受想行識)에 해당합니다.

곧 감수(感受)하는 作用, 또는 想像하는 作用, 또는 意欲 작용, 또는 分別하는 作用입니다.

사람 몸은 이런 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合해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恒常 하나의 나라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

이 무(無)라' 합니다. 一切 諸法은 모두가 因緣生으로서

어떤 法이나 單獨으로  이루어진 法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無數한 因緣, 因과 緣이 合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恒常 하나인 아(我)의 性品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通達無我法者 진시보살이라,

참다운 도인이나 보살은 내가 없다는 무아법(無我法)

卽, 내 몸도 참다운 것이 아니고 一切 萬法도 恒時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法에 通達하면,

그때는 道人이요 보살입니다. 그만치 이 問題는 重要합니다.

 

어째서 내 이 없는가?

우리는 이 問題를 더 깊이 生覺해 봅시다.

제가 누누히 말씀 했습니다마는 내 이라 하는 것은 

各 원소(元素)가 잠시간 和合해 있는 것입니다.

過去에 우리가 지은 업력(業力)을, 業力은 내나야 우리 마음에 붙은 여러 가지

우리 행위(行爲)나 훈습(熏習)된 것이 業力 아닙니까, 이런 業力을 핵(核)으로

해가지고 無數한 因緣이 모여서 各 元素가 되고 또 이렇게 組織된 細胞가

이라는 말입니다.

 

佛敎말로 하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卽, 땅氣運, 물氣運, 불氣運, 바람氣運이요,

物理學的인 술어로 말하면 酸素나 水素, 質素, 炭素같은 元素가 되겠지요.

이런 것이 우리 업(業)이라 하는 에너지를 核으로 해서 이렇게 모여 構成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構成되어진 몸은 잠시도 상일(常一)의, 이른바

恒時 그대로 있는 몸이 아닙니다. 瞬間瞬間 變化되어 갑니다.

細胞라 하는 것은 어느 瞬間도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一秒) 前의 자기 몸과, 일초 後의 자기 몸이 똑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結局은 어떤 것이나 存在하는 것은

瞬間瞬間 變質되어 갑니다.

따라서, '恒常 있는 어느 空間 속에 恒常 存在하는 나' 라는 것은 結局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보니까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그와 같이 地, 水, 火, 風 사대(四大) 各 元素가 잠시간 業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마는, 그것도 역시 恒時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瞬間도 그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恒常 하나로 있는 내 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이 하나의 原因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空氣나 水粉이나 또는 太陽光線이나 거름이나, 그러한 直接 原因과

또 間接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여러 가지 天地 宇宙의 모두가 다, 直接 間接으로

다 包含되어서 하나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생(因緣生)이라 할 때에, 말은 쉽습니다마는

因緣이란 말은 굉장히 意味 심중(深重)한 말인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을 찾다보면 天地宇宙를 다 알아야만 인연(因緣)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天地宇宙를 모르면 因緣을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 衆生들이나 지금 現代科學이나 物理學처럼 인연(因緣) 가운데

몇가지 重要한 因緣만 추려서 "무엇이 원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數없는 因緣들이 잠시간 和合해서 이제 이런 꽃이 피었고

그것도 역시 瞬間瞬間 또 變質되어 갑니다.

恒時 그대로 머물러 있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체(固體)인 바위도 역시, 우리 중생이

보면, 고체로서 이와 같이 딱 둥그런 바위가 있다고 生覺할려는지 모르지마는

것은 중생의 制限된 見解인 것이고, 바위를 構成한 各 원소(元素)를 보고

원자(原子)를 본다고 할 때에는 瞬間瞬間 變質되어가는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항상(恒常)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구조적(構造的)인 겉만 보니까 內容을 모릅니다.

內容을 보면 다 그때그때 變化하고 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없다 해도 말은 쉽지마는 구성적(構成的) 內容을 모르면

 執着을 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業障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나(我)라는 것을 이와 같이 아주 哲學的으로 科學的으로, 分析해서

본다고 할 때는 차근차근 나에 대한 執着이 좀 끊어지겠지요.

'사람 몸이 있어서 몸을 있다고 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는 一切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執着함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사람 몸은 우리 몸을 構成하는 地水火風과

우리 마음을 構成한 感受하는 作用, 生覺하는 작용, 意志作用, 分別하는 作用,

이런 오온(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和合되어 있으므로 恒時 하나인 나의 몸이 없으며,

一切法은 모두가 因緣 따라 이루어진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이것도

역시 恒常 하나인 아(我)의 性品이 없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의 초보인 셈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비었다' 하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아공(我空)이라 하고,

'一切法이 없다. 一切法이 비었다' 하는 것은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我空 法空을 깨달아버려야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人間 存在가 原來 비었다고 分明히 깨닫고, 一切法이 原來 비었다고 보아야만

비로소 깨달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금 더 부연(敷衍) 설명하고 더 강조하기 위해서

道人들은 '내가 없다' 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여기, '내가 없다' 하는 굉장히 重要한 法文이 있습니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쎈타 --자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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