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육체의 限界를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往來한다. 공간적 제약도 마음을 가둘 수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고향집 앞뜰과 뒷동산은 물론 우주 저 멀리 여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금방 사멸하고 말 육체에 비하여 마음은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다. 나아가 욕망에 짓눌린 육체보다 마음은 왠지 순수하고 고결한 느낌이다.
禪에서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한다. 그 단적인 표현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이와 유사한 말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 마음이 없으면 부처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일컬어 황벽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의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이 마음이다. 마음과 부처는 다를 게 없다.”(《전심법요》)
그러나 마음이 부처라고 할 때, 그 마음은 普通의 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事實 간사한 것으로 치면 마음만큼 간사하고 사악한 당체는 없다. 마음은 평화로워졌다가도 폭풍처럼 사납게 출렁거리기도 한다. 마음이 어느 한 군데 꽂혀 있으면 송곳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정말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고집불통이다. 普通 우리 마음을 보면, 오락가락 생멸하며 이러 저리 따지고 比較하며 計算하고 헤아린다.
그것은 限界가 있는 마음이며 때가 낀 마음이다. 중생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부처로서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부처로서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虛空과 같은 마음이요 淸淨한 마음이며 生命力 가득한 마음이다. 경계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다. 특정한 상을 떠나 있으면서 내외의 벽이 없다. 障碍 또한 없다. 남의 시선에 오락가락하지 않는 主體的인 마음이며 당당한 마음이다. 虛空과 같은 品性을 지니고 있으면서 現狀을 把握하는 神靈스러운 영지성(靈知性) 또한 담지하고 있다. 게다가 마음은 여러 가지 事物을 그려내는 原初的인 生命力을 지니고 있다.
創造的 主體者로서의 自在한 마음, 平和로운 마음, 그것이 부처의 마음인 것이다. 아울러 부처로서의 마음은 虛弱한 觀念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이 事實의 世界에서 歷歷하게 活動하며 움직이는 마음이요 그래서 事物과 混然一切가 된 마음이다. 마음이 전부입네 하고 마음에만 집착한다면 그것 또한 병폐다. 이와 관련하여 《전심법요》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부는 경계에 집착하고, 도인은 마음에 집착한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버려야 참된 법이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그렇다면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마음의 本모습은 중생이나 부처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마음이 갇혀 있고 속박되어 있으면 중생의 마음이요 속박으로부터 떠나 이리저리 헤아리지 않는다면 부처의 마음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중생과 부처, 이 셋은 차별이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처의 마음은 平常時의 우리 마음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밥 먹고 일하며 얘기를 나누는 일거수일투족이 부처의 마음이나 다를 게 없다. 다만 그 平常時의 마음이 是非와 分別을 떠나 있어야 부처의 마음이다. 是非와 分別을 떠난 마음은 무일물(無一物)로서의 마음이다.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마음이요 공(空)으로서의 마음이다. 그 無一物로서의 마음이 바로 걸림 없는 마음이요 創造的인 마음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바로 보아 깨닫는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걸림 없는 마음이 된 것을 말한다. 보고 곧바로 깨닫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體驗의 깊이가 말해준다. 닦음의 깊이가 말해준다. 實踐의 깊이가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體驗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도리에 썩 어울리게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다. 즉심즉불의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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