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所有는 모든 것이 變하기 때문에 執着하지 말라는 뜻
무소유(無所有)’ 등을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했던 법정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 가시는 그날에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마지막까지 ‘無所有’를 몸소 實踐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靈魂을 울린 ‘無所有’란 무엇입니까?
無所有를 한문으로 解析하면 ‘있는 바가 없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스님들로서 가져야 할 것이 있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듯이 사람들마다
각자 가져야 할 것과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原來 없기 때문에 無所有를 통해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不必要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고 하는 ‘상(相)’입니다.
부부간에도 나를 없애고 서로 마음을 和合하면 아름답듯이
모든 것의 基本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법정 스님은 한국에서 제일 좋은 절을 짓고 살았습니다.
스님의 대표 산문집 ‘無所有’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의 김영한 보살이 스님에게
시주, 절을 세워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습니다.
길상사는 현재 시가로 7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님은 그곳에서 한번도 주무시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대나무 평상에 가사
한 벌 덮은 다비장이었습니다.
저는 스님의 영전에 삼배를 올리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조사 열반이라고 生覺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無所有는 한문으로 해석했을 때 ‘있는 바가 없다’일 뿐
眞情한 가르침은 ‘그것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無常은 무엇입니까?
흔히 無常을 ‘생각이 없다.
덧없다.
욕심이 없다’라고
通用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신도들에게 말하길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람이 몸을 바꿔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사바세계에서 만나서 사는 것을 저는 아주 좋다고 生覺합니다.
왜냐하면 天上에 가면 다 좋은 일을 해서 福을 지을 수가 없고,
지옥에 가면 너무 힘들어 남을 도울 시간이 없습니다.
三毒과 煩惱를 참아내는 世界를 인토(忍土)라고 하는데 이 사바세계에서는
많은 福을 짓고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서양종교에도 내생이 있는데 오직 ‘천당과 지옥’ 두 가지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어떻습니까?
自身이 지은 業에 따라 6가지 世界에 태어나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하는데 6가지 수레바퀴가 돌듯이
계속 돈다는 意味입니다.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世界를
끊임없이 返複해서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런데 6가지 世界를 順序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自身이 지은
業의 性質에 따라 天相에 태어나기도 하고 地獄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因緣 속에 夫婦가 탄생합니다.
흔히 부부는 天生緣分이라고 하는데 天生동안 맺을 因緣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 격려해주는 것이 夫婦의 因緣인데 惡緣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싸울 정도로 世上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또한 부부간에 理解를 잘 하지 않으려 하는데 끝까지 容恕하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數많은 因緣 속에 夫婦가 되는데
사람이 몸을 바꿔서 天堂과 地獄에 가면 因緣을 지을 수 없습니다.
無常은 無所有입니다.
恒常 變한다는 것입니다.
이 世上에 變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世上은 가지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世上은 모든 것이 變한다고 했는데 우리 自身에게 第一 所重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몸이 製一 所重합니다.
하지만 몸은 언젠가는 한 줌의 재로 變한다는 것을 깨닫고
瞬間瞬間 熱心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無常의 뜻은 ‘이 世上은 모두 變한다’입니다.
權力도, 財産도 모두 變합니다.
하지만 永遠不滅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永遠합니다.
불성(佛性)만큼은 永遠한 것입니다.
재물은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해야 합니다.
中道的인 立場에서 어떻게 쓰느냐가 重要합니다.
굴삭기가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듯 여러분들은 굴신(屈伸)을 잘해야 합니다.
채우다 보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풀면 언젠가는 自身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대원각을 보시한 보살을 보십시오.
그 보시로 因해 많은 이들이 법정 스님의 香氣로운 법문을 통해 마음까지
밝아지듯이 眞情 그 마음이 無常입니다.
법정 스님 또한 보시를 받았지만 길상사에서 하룻밤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無所有 精神은 보시의 精神과도 같습니다.
世上은 變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있는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은 變한다는 無常은 ‘輪回’와 같은 말입니다.
輪回는 ‘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世上은 固定돼 있지 않고 變하기 때문에 輪回하는 것입니다.
輪回는 우리가 지은 業에 의해 變합니다.
법정 스님도 今生에 말빚을 來生에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無所有 精神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 하더라도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단지 業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業을 잘 닦으려면 육바라밀을 實踐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 바로 보시입니다.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여성불자를 보살이라 칭하는데
'보살의 진정한 뜻'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남’은 다른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시작으로 자식, 친척, 이웃, 사회로
擴大되는 것입니다.
自身을 위해 사는 사람은 個人主義로 福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법정 스님을 ‘나의 거울’ 삼아 社會를 위해 비추십시오.
나를 넓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 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韓國은 實質的으로 中國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특히 불교계는 더욱 심한데 큰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는 늘 중국의 선조사들의
법문을 인용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法頂 스님은 다르셨습니다.
우리 대중 곁에서 우리 式으로 法文을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가장 좋아하신 책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으로 신라 원효대사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고려 지눌대사가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고려 후기 야운대사가 지은 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한 책입니다.
강원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 중국 선조사들의 가르침입니다.
중국식 불교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조주 선사의 유명한 ‘뜰 앞에 잣나무’라는 오도송이 있는데 이 잣나무는
우리나라의 측백나무입니다.
격조 있는 불교만 생각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불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불자들은 모든 것이 變하기 때문에 執着하지 말아야 한다는 無所有의 뜻을
바로 알고 慈悲를 베풀어 無量大福을 짓길 바랍니다.
원행 스님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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