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만물이 부처로 보일 때 참행복

장백산-1 2012. 10. 31. 16:11

 

 

 

萬物이 부처로 보일 때 참幸福

 

우리 民族의 歷史를 돌이켜보면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비롯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큰 일이 많았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스님들까지 무기를 잡고 민족을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국난은 단순한 나라의 위기가 아닌 민중들의 고통과 역경이었습니다.
이런 역경과 시련이 가득한 상황을 당해 우리 조상들은 과연
어떻게 했던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우리 민족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했습니다.
3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불사를 했습니다.
혹자는 외세가 밀려와서 어려울 때 칼을 만들고 화살을 만들어야지
 왜 대장경을 만들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주변에 생기는 어려움, 역경, 시련은 누구에 依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내 밖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神과 같은 存在가 있어서
“너희들은 戰爭을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公業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의 허물이 있고,
같은 민족이면서 6·25라는 동족상잔을 부른 당사자의 허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以前에 우리 民族, 當時의 사람들이 가진 共通的인 業力이
그런 狀況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姿勢가
그런 어려움을 불러온 것이고, 이것은 事實 내 마음의 問題입니다.
내 마음이 當時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共通된 業을 불러왔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내가 불러들인 것이라면 이것을 除去하기 위해서는
내 衆生心을 除去해야 합니다.

 
衆生心을 없앤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威信力에 依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어려움이 없고 모두가 成就돼 있는 狀態이니
부처님과 같은 그 狀態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몽골 침입 당시 화살도 만들고 칼들 만들어 싸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依持한다는 것은 어떤 意味일까요.
2500년 田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부처라고 가르친 그 어른에게 依持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生覺할 수도 있지만 그 속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威信力에 依持한다고 했을 때 그 부처님은 人格體가 아닙니다.
慈悲와 智慧는 부처님을 떠받치는 두 기둥입니다.
慈悲가 곧 智慧이고 智慧가 곧 慈悲이며 智慧慈비가 부처님입니다. 威信力 그 自體입니다.
人格的인 對相이 아닌 智慧와 慈悲, 그리고 威信力이 그대로 곧 부처님입니다.
感覺과 認識, 知識과 生覺으로 알아지는 人格的인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思惟로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智慧와 慈悲로서의 非人格的인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感覺, 認識을 벗어나 있는 부처님은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마치 虛空처럼 생긴 智慧와 慈悲를 부처님이라 느끼고 믿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을 믿기 위해서는 상당한 勇氣와 決斷이 必要합니다.
世上을 다 준다 해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勇氣와 決斷.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조성할 때 우리 조상들은 바로 그런 心情이었습니다.
부처님의 威信力, 本來 智慧인 부처님, 本來 逆境과 試鍊이 없는 그 부처님을 믿고
 온 국민들이 一心으로 團合해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것입니다.
그 말씀을 새기며서 國亂을 극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勇氣와 決斷을 내어 부처님을 믿기로 했다면 몇 가지 條件이 必要합니다.
그 첫째는 對立하지 않는 마음의 姿勢입니다.
單純히 物理的인 對立만을 意味하는 것이 아닙니다.
自然의 森羅萬像에는 對立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시기하고 질투하며 對立합니다.
꽃이 다른 꽃을, 나무가 다른 나무를, 짐승이 다른 짐승을,
낙동강이 한강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問題는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이웃과 對立하고, 부모와 형제와 對立하고 부모와 자식 간이 對立하고 다툽니다.
 이 모든 對立心이 사라진 마음속에서 믿음은 싹트기 始作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베푸는 마음이 우선돼야 합니다.
부처님 자체가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世上의 모든 存在는 다른 存在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줍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한강이 편안히 흘러감으로써 나에게 넉넉함을 주고 바람이 불어서 시원함을 줍니다.
自然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주고 있습니다.
꽃은 피어서 꿀을 벌이나 나비에게 주고, 성장하고, 죽으면 거름이 됩니다.
모든 生命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事實은 서로를 살리고 있습니다.
내 몸을, 또는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다른 生命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限없이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입니다.
기쁨의 마음, 慈悲心입니다. 自然이 주는 이 慈悲心를 느끼고
온 天地에 慈悲가 가득함 充滿感을 느끼게 될  때,
스스로가 또한 그렇게 돼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불교를 아무리 믿어도 부처님의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을 믿어야겠다고 했으면 이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님에게 가까워지는 最初의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熱情과 誠意입니다.
어려움 극복을 위해 부처님을 찾는다면,
부처님의 生命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熱情과 誠意가 있어야 합니다.
법회 때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 아니라 生活 속에서
염송하는 熱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生活化됐을 때 逆境과 試鍊이 사라집니다.
時間이 없습니까.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됩니다. 그 시간이 念佛하는 時間입니다.
잠을 줄이겠다는 熱情과 誠意가 바로 祈禱하는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바라는 모든 所望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徹頭徹尾한 믿음입니다.
 但  내 所望은 착한 所望이어야 합니다.
다른 存在를 害코지 하는 所望이 아닌 모든 存在를 살리는 所望이어야 합니다.
 ‘이건 안 될꺼야’라는 否定的인 生覺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世上에는 常識과 知識을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無限可能性이 그런 存在입니다.
반드시 이뤄진다는 굳센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주변은 점점 變해갑니다.
逆境이 順境으로 서서히 바뀝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좋아집니다.
貪慾心을 除去하고 부처님의 生覺에 附合했을 때,
모든 것이 이뤄지는 平安이 찾아옵니다.
내가 사는 世上이 極樂이란 마음이 생깁니다

.
그런데 이런 믿음을 防害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妄想,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내 生命이 부처님의 無量功德 生命이라는 眞理를 믿지 못하고 ‘나는 凡夫 衆生’
‘苦痛을 받을 수밖에 없는 存在’라는 生覺이 곧 妄相이며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 妄想인 어리석은 마음은 本來 있는 것이 아닙니다.

妄想은 손가락에 붙어있는 혹과 같아 떼어버리면 됩니다.
그것이 修行입니다.

 
修行은 내가 지금 妄想에 싸여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없애려고 努力하는 것입니다.

貪慾의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화내는 마음을 떼어 내버리는 것입니다.

修行에는 다섯 가지 方法이 있습니다.

 
첫 째는 내 몸이 本來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否定觀을 通해 貪慾心을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慈悲觀, 부처님 自體인 慈悲心을 갖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存在들이 因緣에 依持해 생겨났음을 아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分別止觀으로 이 世上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實로 있는 것이 아니다, 實로 있는 것은 부처님뿐이며 부처님이
잠시 지금 보이는 世上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數息觀, 숫자를 헤아리는 方法입니다.
修行을 할 때 妄想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숨을 쉴 때마다 숫자를 놓치지 않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것들에서  變形된 여러 形態 가운데 하나가 念佛입니다.
念頌을 함으로써 妄想이 들지 않도록 하고
妄想이 들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一種의 數息觀입니다

.

이렇게 했을 때 우리 앞에 부처님이 나타납니다.
慈悲, 威信力, 智慧  自體가 부처님이라는 것에 生覺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까지 想像하지 못한 부처님을 느끼게 됩니다.
宇宙森羅萬像이 온통 부처로 꽉 차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世上에 잘 태어났다는 마음,
날 낳아준 父母님에게 感謝하다는 마음이 生깁니다.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나에게 부처의 品性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삶의 意味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고, 신록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돈, 權力, 名譽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 빼앗겼을 때
기쁨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宇宙森羅萬像에서 自然에서 기쁨을 느꼈을 때 그것이 기쁨이고

世上은 살아갈 만한 世上이 됩니다. 그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이고
우리가 부처님 전에 앉아 있는 意味가 됩니다.
아무쪼록 이런 마음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서
모두가 행복하고 기쁜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법보신문
이 법문은 6월6일 서울 불광사에서 봉행된 호법법회에서
경기도 광주 각화사 주지 혜담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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