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특별한 것 없음을 알기에 그것을 특별하다고 이름 붙인다

장백산-1 2012. 11. 20. 09:43

 

 

 

 

특별한 것 없음 알기에 특별하다고 이름 붙인다

 
우리가 알고자하는 불교의 참뜻이 번거로운 것은 아닙니다.
目標는 한 곳인데,
한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各者 지금까지 배워온
學文, 知識, 經典을 바탕으로 수많은 表現을 하는 것입니다.
眞理다, 菩提다, 道다, 涅槃이다,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다 等等을
머릿속에 複雜하게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 알고있는 그것들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지 實際는 아닙니다.
實際라고 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이름이 되겠지만
부득이 모습을 表現하자니
涅槃, 主人公, 眞理, 道  本來面目 等等이라고 할 뿐이지
이름을 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祖師 스님들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사람마다 또 生覺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生覺을 아무리 듣고, 經典을 읽고, 머릿속으로 理解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理解일 뿐  實際 目標로 하고 있는 자리에 當到한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자리는 따지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때까지 배운 모든 學問을 버리고 몸소 體驗하는 것입니다.
물이라는 說明을 아무리 듣고 책을 보고 理解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물의 참맛은 아닙니다.
물의 참맛은 몸이 물에 들어가 봐야 비로소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머릿속 複雜한 知識들을 버리고 山門에 들어서는 것을
捨敎入禪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禪門에 들어서보면 또 文字가 많습니다.
1700公案만 해도 그렇습니다. 公案이 그렇게 많습니다.
비록 1700가지나 되는 公案이 있더라도 그 뜻은 自己의 本來面目입니다.
自身의 本來面目을 話頭를 通해 한번 깨달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禪門에 들어설 때는 禪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처음 經典을 接하고 工夫를 하다 보니 經典의 妙한 맛이 참 많았습니다.
初步者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 進度가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佛法을 제대로 알게 되는가 싶어 즐겁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습니다. 당시 내 나름대로의 生活 方式이 있었습니다.
나름의 工夫도 있었습니다. 밤 9시가 돼서 대중이 모두 잠자리에 들면
나도 자는 척 하다가 사방이 다 잠들었다 싶으면 살며시 일어나
한 쪽 구석에 앉아 내 나름대로의 工夫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나다 보니 처음에는 금방 지나가던 1時間이
어느 瞬間부턴가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工夫한 글들이 머릿속에 뱅뱅 도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내가 佛門에 들어온 것은 마음 하나 깨닫기 위한 것이었고,
衆生이 道를 깨닫지 못한 것은 煩惱妄想, 散亂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니
모든 妄想을 除去해야 道가 成就된다 싶어 經典에 依持한 것이었는데
經典을 工夫하다보니 知識은 많아져도 거꾸로 마음은 더 散亂해지고 있어
當初 내 目標와는 反對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冊을 보기 前에는 염주만 돌려도 금방 1시간이 지났는데 책을 보고 난 후로는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해진 것이었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지식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더 산란해지고 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禪房으로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參禪이라는 것을 말만 들었지 그것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禪房에 가서 구참 스님에게 용맹정진을 하겠다고 했더니 스님이
‘무슨 話頭를 들고 있는가’물으셨습니다.
사실 그때 話頭라는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話頭가 뭐냐 물었더니 ‘話頭도 모르는 놈이 무슨 參禪이냐’하는 거예요.
그래서 話頭를 가르쳐달라 했더니 祖室 스님을 뵙고 話頭를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실 스님이셨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는
‘내일부터 禪房서 工夫를 하려고 話頭를 타러왔습니다’했습니다. 참 순진했지요.

효봉 스님의 세납이 당시 예순 정도 되셨는데, 한 참 生覺하시더니
‘석가미륵 유시타노 타시아수(釋迦彌勒 猶是他奴 他是阿誰)’하시며
‘疑心이 나지?’하고 물으시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그러시며 ‘따지고 分析하지 말고 이것이 뭣고 하고 疑心하며 至極히 하다보면
깨닫게 된다’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타(他)가 누구인고’하고 지극히 의심해 나가기만 하면 깨닫게 된다 하시니
깨닫기가 이렇게 쉬운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방에 들어가
‘他가 누구인고’하니 제법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나니 별로 진척도 없는 것 같고 막연한 生覺이 들었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니 전부 졸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나는 졸기는커녕 공부가 안 돼서 애를 먹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졸고 있으니 그분들에게는 이 공부가 참 쉬운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도 한 번씩 죽비로 맞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저를 보고는
‘他가 누군고 할 때 누군고 하고 있는 놈이 뭣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습니다. 疑心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해보니 뭔가 좀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나고 난 後 그 스님이 다시
‘누구인고 라고 하는 놈이 뭣고 라고 하고 있는 그 놈이 뭣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뭣고, 뭣고 하면서 뱅뱅 도는 것이지 종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잇, 속았다’ 싶어 다시 조실 스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한 철에 깨닫는다 했습
니다. 한 철도 너무 길다 했습니다.
3년이  지나버리면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도저히 理解가 안됐습니다.
그건 上根機나 하는 일이지 싶어 그저
‘他는 누군고, 누군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念佛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의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저 일념이 돼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
의심없이 일념으로만 한 것입니다.

계속 하다 보니, 길을 걸으면서도 염주가 돌아가듯이 ‘他가 누구인고’가 돌고,
밥을 먹어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他가 누구인고’하고 있는 '그 놈'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他가 누인고’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 잠시 공부가 중단 되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정말 모르고, 정말 알고 싶은 것에 生覺을 두고 해야지
의심도 없는 놈을 일념으로만 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는 그 놈이 누구인가’를 生覺했습니다.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굳이 生覺을 하지 않아도 疑心이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眞理라는 것, 道라고 하는 것은 思量分別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佛性을 갖고 있지만
제 나름의 學問과 知識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思量分別이 떨어지기 前에는 머리로 아는 理解지 깨달음이 아닙니다.

眞理는 말이 아니오, 生覺으로 들어가도  없는 言語道斷이니,
思量分別이 끊어진 자리에서 自己를 發見하는 것입니다.

 
 옛 스님이 어느 禪師에게 ‘선사께서 깨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지금 이 자리의 나’라고 했습니다.
지나간 過去도 아니요, 未來의 성불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내가 숨쉬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金剛經’에서도 ‘如來란 어떤 特別한 것이 없다는 그것이 特別한 ’이라 했습니다.
‘特別한 것이 있고 없는 그 兩面에서 如來를 보라’ 했습니다.
‘道를 얻고도 얻은 道가 없으니 道를 얻었다고 한다’ 했습니다.
그러니 一般 常識的으로는 거짓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自性을 了達하면 이것이 附合됩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하면 없던 것이 새로 生긴 것처럼 生覺되지만 
'새로 生긴 것이 없다는 事實 그것을' 알아차린 '그것'
이름 붙여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般若心經’에서도 ‘깨달았다는 智慧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고 했고
그래서 선사가 ‘지금 이 자리의 나’라고 한 것입니다.

                                  깨닫기 以前에도 '나'였지만  깨닫고 나서도 '나'입니다.

                     '나'를 두고 새로운 自己를 求하려는 幻想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幻想을 날려 버리니 眞理, 道라는 이름은 도망가고 흔적도 없어
                            지금 참된 자리의 를 눈 떴다는 것입니다.
                特別한 것 없는 그것이 一般 사람과 다르기에  特別한 것이라 이름 짓는다 했습니다.
                              자꾸 歲月이 흘러가니 時間을 아껴 修行하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은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이
임진년 하안거 결제일에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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