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걀린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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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幸福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生覺하는 것일까?
狡猾함, 自己 一身을 도모함, 꾀 많은 利己心, <自我의 利己的인 防禦>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때때로 우리를 至極히 사납게 몰아갈 수 있다.
<自身에 對한 執着과 愛着>을 우리가 제대로 살펴보기만 하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을 害치는 根源이자 自己 自身마저 害치는 根源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生覺했거나 行했던 否定的인 일(事) 모두는
窮極的으로 <거짓된 自我에 對한 執着과 愛着>으로부터 惹起된다.
이렇게 일어난 否定的인 生覺이나 行動은
거짓된 自我를 우리 삶에서 가장 貴重하고 重要한 것으로 만들어나간다.
우리의 否定的인 카르마의 原因이 되는 온갖 否定的인 生覺, 感情, 欲望, 行爲는
<自我에 對한 執着과 愛着>으로부터 일어난다.
그것들은 우리를 삶 以後의 삶, 온갖 障碍, 모든 不幸과 噴怒, 모든 災殃으로 이끄는
어둡고 强力한 磁石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輪回의 苦痛을 일으키는 根本 原因이기도 하다.
眞情으로 수없이 많은 삶을 거듭하며 카르마의 모든 峻嚴한 힘과 複雜한 反饗 속에서
카르마의 法則을 깨달을 때, 삶 以後의 삶에서 自我에 對한 執着과 愛着이 얼마나 우리를
점점 더 함정 속에 옭아맬 뿐인 無智의 그물 속으로 엮어넣는지를 볼 때,
우리가 自我에 執着하는 마음의 危險한 發想을 참으로 깨달을 때,
우리가 아주 微妙하게 감추어진 채 作動하는 마음을 追跡할 때,
우리의 모든 平凡한 生覺과 行爲들이 그것에 依해 얼마나 偏狹하고 어두워지는지,
無條件的인 사랑을 發見하기가 얼마나 不可能해지는지,
우리 안에서 참된 사랑과 慈悲가 자라나기가 얼마나 어려워지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때 샨티데바의 다음과 같은 말을 마음으로부터 强烈하게 理解하는 瞬間이 올 것이다.
만일 온갖 害惡 世上의 두려움과 苦痛이 <自己에 對한 執着>으로부터 일어난다면,
그렇게 邪惡한 靈魂이 내게 무슨 所用이 있으랴!
그리고 저렇게 邪惡한 靈魂, 우리의 <가장 커다란 敵을 破壞하겠다는 決意>가 우리 內面에서 솟구칠 것이다. 邪惡한 靈魂의 死滅과 함께 온갖 苦痛의 原因이 사라질 것이고, 廣大함과 活氣찬 寬大함 속에서 우리의 참된 本性이 빛나게 되리라.
우리의 커다란 敵인 <自身에 對한 執着과 愛着>과의 싸움에서
<慈悲의 實踐>보다 뛰어난 同盟軍은 없다.
輪回라는 고해(苦海)에서 끝없는 流浪의 原因이 되는 거짓된 自我에 對한 오래된 執着을,
무아(無我)의 智慧와 더불어 效果的으로 完璧하게 破壞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 自身을 獻身하고, 自身을 所重히 여기는 代身 그들의 苦痛을 떠맡는 慈悲이다.
이런 까닭에 티베트 傳統에서는
<慈悲를 깨달음의 根源이자 精髓, 깨달은 人物의 核心的인 活動>으로 看做하는 것이다.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더 말해봐야 무슨 所用 있으랴!
自己 自身의 利益을 위한 幼稚한 짓거리,
다른 사람의 利益을 위한 붓다의 獻身.
둘 사이의 差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만일 나의 幸福을 다른 사람의 苦痛과 바꾸지 않을진대,
결코 佛性에 到達하지 못하리니
심지어 輪回에서도 참된 기쁨 못 얻으리라.
慈悲의 智慧를 實現하기 위해서는,
그와 相反되는 行爲가 우리에게 끼치는 損害와
慈悲가 가져오는 利益을 分明하게 보아야 한다.
自己 自身에만 焦點을 맞추는 自我와 우리의 窮極的인 關心을
아주 分明하게 區別할 必要가 있다.
우리가 온갖 苦痛을 받는 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混同하게 때문이다.
自己 自身을 愛之重之하는 것이 自己 삶을 最大한 保護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만, 實際로는 正反對이다.
<自我에 對한 執着>은 <自娥에 對한 愛着>을 낳고 이것이 反復되어,
<害侵이나 苦痛받는 것에 對한 뿌리 깊은 反感>이 생겨난다.
그러나 害侵이나 苦痛은 전혀 客觀的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에게 實體와 힘을 付與하는 것은 그것들에 對한 당신의 <反感> 때문이다.
이것을 理解하게 될 때, 당신은 害侵이나 苦痛이 客觀的인 存在形態를 띄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反感> 때문임을 理解할 것이다.
事實 이러한 <反感>으로 因해 우리에게 모든 否定的 性向과 障碍가 모여들고,
우리의 삶이 神經質的인 근심, 기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自我에 執着하는 마음>과 <存在하지도 않는 自我에 대한 愛着>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反感>을 克復하게 되면,
어떤 障碍라든가 否定的 性向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또는 存在하지도 않는 그 무엇을
어떻게 攻擊할 수 있겠는가?
그때 最上의 保護 裝置가 바로 慈悲心이다.
또한 지난날의 偉大한 스승들이 항상 알고 있었던 것처럼,
慈悲는 모든 治癒의 根源이기도 하다.
우리가 癌이라든가 에이즈 같은 疾病에 걸렸다고 想定해 보자.
우리가 저런 疾病을 떠맡음으로써 우리 自身의 苦痛을 堪當하고 덧붙여
慈悲로 充滿한 마음을 갖춘다면, 지금과 未來에 우리 苦痛을 持續하게 하는 原因인,
지난날의 否定的인 카르마는 疑心할 나위 없이 淨化될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自身이 時限附 人生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안 사람들이 自己의 所有物 全部를 남들에게 나눠주고서 스스로 共同 墓地를 向해 걸어갔던 非凡한 이야기들를
나는 많이 들었다.
共同 墓地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苦痛을 떠맡는 修行을 닦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이 죽기는커녕 完全히 治癒돼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事實이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보살핌이 切實한 狀況에 處한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獻身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慈悲를 行動으로 實踐할 直接的인 機會를 提供받게 됨을 繼續해서 經驗했다.
慈悲의 힘은 아무런 限界가 없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놀라움 속에서 깨달을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自身을 돌보고 自己의 必要에 留念하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라는 말인가?”
慈悲에 依해 破壞되는 것은 <거짓된 自己에 對한 執着과 돌보기>이다.
自我 執着이 모든 害惡의 根源이라고 해서 自身에게 친절한 것이
利己的이라든가 잘못이라든가, 다른 사람을 配慮함에 依해
우리의 問題가 저절로 解消될 것이라고 誤解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 自身에게 寬大하게 對하여 自己 自身과 친구가 되고 그래서
우리의 친절함과 確信을 發見하는 것이 가르침의 核心이며
그 안에 暗示되어 있는 것이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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