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死는 永遠히 持續된다 / 무비스님
몇 번이나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는가.
태어나고 죽는 일이 멀고 멀어서 멈추지 않는다.
幾回生 幾回死 생사유유무정지
- 증도가 -
사람들이 어떤 事物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알고 판단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혹 말로 表現할 때는 같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理解하는 角度와 넓이와 깊이를 細密히 分析해보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普通의 事物을 理解하는 것도 그와 같은데
만약 삶과 죽음의 問題라면 이 일은 사람마다 느끼고 아는 差異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
世上에 태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 對하여
스스로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고 누구에게 들은 바도 없다면
이 問題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지만 큰 差異가 있을 것이다.
예부터 세존께서는 生死의 問題를 풀기 위해서
世上事를 버리고 出家 修行하셨다.
그러므로 세존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生死問題를 깨달았다는 것이며,
結局 生死로부터 解脫하였다는 것이다.
불교의 歷史는 세존의 修行을 通한 깨달음과 그 가르침으로부터 出發하였다.
가르침의 모든 內容은
結局 삶과 죽음의 內容으로 歸着될 수밖에 없다.
오랜 歲月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제자들이 역시 그의 思想과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이 詩를 지은 영가 스님도 마찬가지다.
生死의 問題를 깨달으신 眼目으로
生死의 一面을 멋지게 表現하였다.
물론 불교의 工夫가 깊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理解가 안 되며 믿어지지도 않는 말씀이다.
生과 死는 單純히 한 번뿐의 일이 아니다.
數많은 生死를 거듭하면서 또 지금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그 끝은 없다. 永遠히 持續한다.
하루에도 數많은 生覺과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삶은 繼續되듯이,
永遠한 生死도 한 生이 그 하루의 일과 生覺처럼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하면서 永遠히 지속된다.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은
生死가 永遠히 持續된다는 事實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에,
온 생애를 다 바쳐서 이 問題를 깨우쳐 주려고 努力하신 것이다.
眼目이 짧고 單純한 사람들은 理解할 수 없겠지만
生死問題의 專門家들은 간단히 理解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分野든지 專門家의 眼目은
非專門家의 眼目과는 엄청난 差異가 있다.
世上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이 生死問題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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