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선가귀감(禪家龜鑑)

장백산-1 2013. 1. 25. 00:07

 

 

 

 

 

<선가귀감(禪家龜鑑>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해제: '선가귀감'은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스님께서 禪의 眞髓와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는 이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고자 지은 책으로서 대장경과 조사스님의 어록 가운데 요긴한 부분을 가려 뽑아 주해(註解)를 달고 송(誦)과 평(評)을 붙인 것이다.
내용에는 저자 서산 스님의 서문과 그 제자인 사명스님의 발문이 함께 있다. 초판은 1579년 원문인 한문 본으로 판각되었다. 그 뒤 여러 곳에서 한문본과 한글(언해)본으로 간행되었고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진 명저로 꼽히고 있다.

<선가귀감(禪家龜鑑>

1. 예전에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께서 行하셨던

계행(戒行)이 아니면 行動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大臟經의 거룩한 부처님 말씀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서로 傳해가면서 외우는 것은 세속 사대부의 글이요, 청하여 지니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詩뿐이다. 그것을 울긋불긋한 종이에 쓰고, 고운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르고 가장 큰 보배로만 여기니, 아! 예와 지금의 불교 공부하는 이들이 보배로 삼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다를까.

 

미흡한 산승이 옛 글에 뜻을 두어 大藏經의 거룩한 글로써 보배를 삼기는 하지만 그 글이 너무 길고 많으며 大藏經의 바다가 너무 넓고 아득함으로 뒷날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벗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로움을 免하지 못한 것 같아서, 글 가운데서 가장 요긴하고 간절한 것 수백 마디를 추려서 한 장에 쓰고 보니, 글도 간단하고 뜻도 두루 갖추어졌다고 할 만하다.

 

만일 이 글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硏究하여 奧妙한 理致를 깨닫게 된다면 마디마디에 살아 있는 석가여래께서 나타나실 것이니, 부디 부지런히 努力하라. 그리고 文字를 떠난 한 마디 활구(活句)와 常識的인 形式의 틀을 벗어난 선지(禪旨)의 奇妙한 보배를 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장차 특별한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2. 마음(心)

여기에 한 物件(마음/心)이 있는데 本來부터 한 없이 밝고 神靈스러워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름을 지어 붙일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려 보일 수도 없다.

 

한 물건(一物)이란 대체 무엇일까?

먼저 깨달은 옛 사람을 이렇게 읊었다. "옛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前부터

동그라미 일원상(一圓相)이 뚜렷이 밝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몰랐는데 어찌 가섭이 전했겠느냐"

한 物件(마음)은 생겨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六祖 혜능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었다.

"나에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하였는데 신회스님께서 곧 대답하기를 "그것은 모든 부처님의 根本이며,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하였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서자(庶子)가 된 까닭이다.

 

회양스님께서 숭산에서 와서 인사를 드리니 六祖스님이 묻기를 "무슨 物件이 이렇게 왔는고?"하니

회양 스님은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다가 8年이 지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일러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一物)이 라고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하였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嫡子가 된 연유이다. 삼교(三敎)의 聖人이 모두 이 말에서 나왔네. 누가 말해 볼 사람이 있는가.

잘못 말했다가는 눈썹이 빠지리라.

3. 本來 完全한 마음

부처님과 조사가 世上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이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석가 세존이고, 조사는 가섭존자이다. 이 분들께서 세상에 나오신 것은 大慈悲心으로 衆生을 救濟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마음을 살펴보면 사람마다 本來 마음의 性稟이 저절로 圓滿히 이루어졌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연지를 찍어 주고 분을 발라 주기를 바라겠는가.

 

<虛空藏經>에서 "眞理의 世界를 보는데 있어서는 文字도 惡魔와 같은 防害物이고,

온갖 事物의 이름과 形象도 惡魔와 같은 防害物이고,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防害물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누구나 根本 마음의 바탕은 本來부터 그대로 부처라는 見知에서 본다면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도 아무 所用이 없다.

4. 根機에 따른 여러가지 方便

그러나 모든 事物과 理致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氣質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方便을 通해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法이란 한 物件, 卽 마음이고, 사람이란 衆生을 가리킨다.

마음에는 永遠히 變하지 않는 진여(眞如)의 마음과(眞如心)

因緣을 따라 變化·作用하는 마음, 두 가지가 있다.(隨緣心)

사람에게는 단박에 깨치는 상근기와 오래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하근기의 두 가지 氣質이 있다. 그러므로 文字나 말로 가르치는 여러 가지 方便이 없을 수 없다.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했으나, 그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의 分別을 내지 마라. 모두가 그대로 옳은 것이다.

한 生覺이라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

5.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平生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 곳이란 세존께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 앉아 계시던 자리의 절반을 나누어 가섭에게 함께 앉게 하심이 첫째요,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실 때 가섭존자께서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 응답했음이 둘째요, 세존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돌아가실 때 임종의 시기를 놓쳐서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관속의 두 발을 밖으로 내 보이심이 셋째이니, 이것이 가섭존자가 세존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따로 마음으로 전해 받은 선의 등불이다.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말씀하신 것이란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五敎)인데, 첫째는 인천교(人天敎), 둘째는 소승교(小乘敎), 셋째는 대승교(大乘敎), 넷째는 돈교(頓敎),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다존자께서 교학의 바다를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문(禪門)과 교문(敎門)의 근원은 석가 세존이시고,

禪門과 敎門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다존자이다.

말이 없는 무언(無言)으로써 말없는 眞理의 世界에 이르는 수행법이 선문(禪門)이고,

大藏經의 말로써 말없는 眞理의 世界에 이르는 공부 방법이 교문(敎門)이다.

또한 마음으로 眞理의 世界에 이르는 것이 선법(禪法)이요,

말로써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교법(敎法)이다.

眞理의 法은 한 맛이나, 見解나 修行 方法을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6. 참마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法門

眞理는 이름이 없으므로 말로써 說明할 수도 없고, 眞理는 貌樣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말해 보려고 한다면 벌써 根本 마음(心王)의 바탕을 잃은 것이 된다. 本 바탕 마음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존자가 미소를 짓는 일이 모두 쓸데없는 죽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만다. 마음을 얻은 사람은 장사꾼의 雜談이라도 모두 법사(法師)가 眞理를 說하는 法門과 같을 뿐 아니라,

새의 소리와 짐승의 울음까지도 眞理를 說하는 法門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적선사는 慟哭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어 춤추고 기뻐하였으며

보수스님은 거리에서 주먹질하며 싸우는 사람을 보고 本來가 天眞한 마음의 本바탕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선(禪)과 교(敎)의 깊고 옅은 세계를 밝힌 것이다. 生覺을 끊고 얽힌 因緣을 잊었다는 말은 참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른바 마음을 다 닦아서 일이 없는 閑暇한 도인(閑道人)이다. "즐겁다. 어디에나 걸림이 없고, 本來부터 일이 없어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맑은 물과 푸른 산을 마음대로 노닐 뿐만 아니라, 고기 잡는 어촌과 술을 파는 주막에도 마음에 걸림 없이 自由 自在하다. 歲月이 가나오나 내가 알 바 아니건만, 봄이 오니 예전과 같이 풀잎이 푸르구나." 이것이 眞理를 밖에서 求하지 않고

自身의 마음에서 찾으면서 한 生覺이 일어날 때,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봐야 할 사람을 위한 것이다.

7. 스님의 가르침은 단번에 깨치는 법

부처님은 永遠한 스승이시므로 모든 衆生을 위해 自細하게 설명하여 가르치셨고,

祖士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즉시에 解脫하도록 단번에 깨치는 가르침을 위주로 하였다.

부처님은 활(弓)처럼 말씀하셨고, 조사들은 활줄(絃)처럼 곧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이 없는 法이란 모든 事物이 實際 모습이 서로 다르지 않고 絶對 平等한 한 맛(一味)에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내보인 참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의 화두 는 용궁의 대장경 속에서도 없는 것이다"고 했다.

활(弓)처럼 말씀하셨다는 말을 둥글궁들 자세히 설명해서 '굽다(曲)'는 뜻이요,

활줄(絃)처럼 말씀하셨다는 말을 직접 단도 직입적으로 바로 설명했다는 데서 '돋다(直)'는 뜻이다.

용궁의 장경이란 뜻은 용궁에 모셔 둔 대장경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달마 대사께서 서쪽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이 눈 앞에 보이는 잣나무를 가리키며 "뜰앞의 잣나무니라"하였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소견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직 마음으로만 體得될 수 있는 格意 밖(格外)의 선지(禪旨)이다.

8. 경전에 대한 執着을 버리고 마음을 닦으라

그러므로 工夫하는 수행자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變하지 않는 性稟(體空不變)과

因緣을 따라서 作用하는 마음(隨緣成事), 두 가지 뜻(二義)이 곧 내 마음의 本 바탕과 形象임을 알아야 한다. 단번에 깨치고(頓悟) 차츰차츰 오래 닦는(漸修) 두 가지 수행 방법이 있는데 그 앞과 뒤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학의 뜻을 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가야 할 바른 길이다. 높은 근기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은 함부로 건너뛰어서는 안된다.

 

敎學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에 따르는 것, 단번에 깨치는 수행법(頓門)과 차츰차츰 오래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에 그 앞과 뒤가 있다는 뜻이다. 선법(禪法)이란 한 生覺 가운데 變하지 않는 마음의 本體(體)와 環境과 因緣에 따르는 마음의 작용(用)이 原來 한 마음 속에 同時에 있다.

 

그러므로 眞理의 世界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差別이 없이 다 똑같고, 現狀 世界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깨달은 종사는 진리를 설하되 말을 여의고, 바로 한 생각을 가르쳐 성품을 보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교학을 버리고 선을 택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9. 활구(活句)를 참구하라.

참선 수행자는 살아 있는 화두인 活句를 생각하고 연구해야지 죽은 말인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라.

살아 있는 활구(活句)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님이나 조사스님과 함께 스승이 될 것이고,

죽은 사구(死句)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自身도 救濟하지 못할 것이다.

活句를 들면 저절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10. 참선하는 마음 자세

공안(公案)을 참구할 때는 懇絶한 마음으로 工夫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全神을 한 곳에 集中해야 하고, 굶은 사람이 밥을 生覺하듯이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을 生覺하듯이 하고, 어린애가 엄마를 生覺하듯이 하면 반드시 칠흑 같은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관문을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조사스님들의 공안(公案)은 1,700가지나 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의 性稟을 갖추고 있다 했는데 조주스님께서 "개에게는 부처의 性稟이 없다.(狗子無佛性)"고 한 것이든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는 말에도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栢樹子)"하고 대답한 것이라든지, "어떤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동산스님이 "마 세 근이다.(麻三斤)라고 대답한 것이라든지, 또 "어떤 것이 불교의 요지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운문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니라"하고 말한 것들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따뜻한 氣運이 恒常 持續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굶을 때에 밥을 생각하는 것과 목이 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애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懇絶한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에는 이렇듯이 懇絶한 마음이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11. 참선의 세 가지 요소

참선할 때는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셋째는 큰 의심(大疑情)이다. 만약 셋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세 발 달린 솥의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아서 못쓰게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하셨고, 영가스님은 "도를 닦는 수행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하셨고, 몽산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하셨으며, 또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닫는다"고 하셨다.

12. 개에게 佛性이 없다한 理由?

日常 生活을 하는 도중에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한 生覺, '조주스님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더 이상 疑心할 수 없는 경지가 되어 理致의 길(理路)이 끊어지고, 뜻의 길(義路)이 사라져서 結局은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자신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다. 이것이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깨달을 수 잇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없다(無)"고 대답했다. 이 한 마디는 선종에서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며, 온갖 못된 생각과 지식을 꺾어 없애는 연장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본래 모습이고, 조사스님들의 골수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간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

 

먼저 깨달은 옛 사람은 이렇게 읊었다. "조주스님의 무서운 칼 서릿발처럼 번쩍이네. 무어라 잘못 물으면 몸뚱이를 두 토막 내리." 화두는 의심을 일으켜서 그 뜻을 논리적으로 알아 맞히려 해서도 안되고 생각으로 헤아려서도 안된다.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물소의 길다란 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이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따지고 맞추어 보는 것이 그릇된 生覺과 分別心을 일으키는 것이며, 나고 죽음을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려워서 갈팡질팡하는 것도 또한 그릇된 生覺을 일으키는 식정(識情)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病을 알지 못하고 이 속에서 빠졌다 나왔다 하고 있을 뿐이다.

13. 공부하는 방법은 중도(中道)

공부를 하는 방법은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이 해야 한다. 거문고의 줄이 팽팽함과 느슨함이 알맞게 골라서 조율이 되어야 한다. 너무 긴장하여 애쓰면 執着하기 쉽고, 너무 느슨하여 마음을 놓아버리면 어리석은 무명(無明)에 떨어지게 된다. 精神이 또록또록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말하기를 "거문고의 줄이 알맞게 조율이 되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하게 서둘면 혈기를 올리게 될 것이고, 방일해서 잊어버리면 흐리멍텅 바보가 되고 만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중도에 따라 공부를 하면 오묘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14. 道가 높아질수록 魔가 치성한다.

마군(魔軍)이란 나고 죽는 生死를 좋아하는 鬼神의 이름이고, 8만 4천 마군이란 중생의 8만 4천의 煩惱이다. 惡魔란 本來 종자(種子)가 없는 것인데 수행자가 바른 生覺을 잃는 데서 그 움이 트게 된다. 중생들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이 공존하나, 수행하는 道人은 그 환경에 거슬리므로 악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道가 높을수록 防害하는 魔가 드세다"고 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선정에 들었는데 상복을 입을 사람이 "네가 우리 어머니를 왜 죽였느냐?"고 대들어서 옥신각신 시비 끝에 도끼로 그 사람을 찍었는데 자기 다리가 찍혀서 피가 났으며, 또 어떤 스님이 선정에 들었는데 멧돼지가 쫓아와 대들기에 멧대지 코를 붙잡고 소리를 치다가 精身을 차려보니 自己의 코를 붙잡고 있었다는 逸話가 모두 自己 마음에서 妄想을 일으켜 外部의 惡魔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온갖 是非와 分別에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이면 악마가 아무리 많은 재주를 부려도 마치 칼로 물을 베거나, 광명(光明)을 입으로 부는 격이 될 것이다. 옛말에 "벽이 갈라져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악마가 들어온다"고 했다.

 

밖으로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天魔)이고,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陰魔)이고,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바른 정법 가운데에서는 本來 그런 일이 없다. 무심(無心)한 것이 불도이고, 分別하는 것이 惡魔의 짓이다. 악마의 일이란 虛妄한 꿈속의 일인데 더 길게 말할 것이 무엇이랴.

 

마음을 밝히는 工夫를 한 段階라도 이루었다면 비록 今生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죽어서 눈을 감을 때에

惡業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利己的인 行爲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이고, 선정(禪定)은 밝은 智慧이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서로 맞설 수 없는 것은 當然한 理致이다.

15. 참선하는 이가 점검해야 할 16가지 道理

참선하는 수행자는 恒常 이렇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四恩)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四大)로 구성된 肉身이 점점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한 번의 숨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眞理의 가르침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린 경우가 있었는가.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과 雜談이나 하고 지내지 않는가.

부질없이 是非를 일으키고 있지나 않은가.

화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分明하여 어둡지나 않는가.

이야기할 때도 話頭가 끊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린 때에도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을 붙잡을 만한가.

今生에 꼭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恩惠를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便할 때에 地獄의 苦痛을 生覺하는가.

이 肉身으로 輪回의 苦痛을 벗어날 自信이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온갖 現狀이 나에게 닥쳐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수행인의 日常 生活 속에서 때때로 点檢해야 할 道理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옛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을 今生에 못 건지면 다시 어느 世上에 태어나 건질 것인가"

네 가지 恩惠란 부모와 나라와 스승과 시주(施主)의 은혜이고,

네 가지로 된 더러운 몸이란

아버지의 精液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은 물(水)의 젖은 氣運이요,

뼈와 살은 땅(地)의 단단한 氣運이요,

정기(精氣)와 피의 한 덩어리가 썩지도 않고 녹아버리지도 않는 것은 불(火)의 더운 氣運이요,

콧구멍이 먼저 뚫려 숨이 通하는 것은 바람(風)의 움직이는 氣運이다.

 

아난다존자가 말하기를 "정욕(情欲)이 거칠고 흐려서 더럽고 비린 것이 한데 어울리어 뭉쳐진다"고 한데서 더러운 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 生覺 할 때마다 肉身이 썩어간다는 것은 歲月이 잠시라도 쉬지 않아서 얼굴은 저절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은 어느 사이에 희어 간다는 뜻이다. 옛말에 "지금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네. 옛날이 어찌 지금과 같았겠는가"라고 한 바와 같이 과연 덧없이 무상(無常)한 이 몸이 아닌가.

 

歲月이란 無常한 鬼神은 모든 生命體를 죽이는 것으로서 즐거운 遊戱로 삼으므로 生覺할수록 두려울 뿐이다. 내쉬는 날숨은 불의 氣運을 몸밖으로 내뱉는 것이요, 들이마시는 들숨은 바람 氣運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오로지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에 달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현상(八風)은 마음에 맞는 것과 마음에 거슬리는 것, 두 가지 環境이 있다. 地獄의 苦痛이란 人間의 60劫이 地獄의 하루가 되는데, 쇳물이 끓고 숯불이 튀고 뾰족한 칼산에서 끌려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가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모르는 여러 사람을 불쌍히 여겨 警戒의 말로 일깨우는 것이다.

16. 깨달음을 얻은 뒤에 해야 할 일

수행을 하지 않고 말로만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가도 實際의 境界나 狀況에 直面하면 그만 迷惑하여 앞이 캄캄하여진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 만약 생사를 끊으려면 한 생각(念子)을 '탁' 깨뜨려서 마음속의 어두운 칠통을 깨뜨려야 비로소 나고 죽는 生死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眞理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一念子)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깨우침이 높은 스승을 찾아가 올바른 깨우침을 얻었는가를 点檢하여 바른 眼目을 결택해야 한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의 눈이 바른 것만 貴하게 여기 뿐이지, 自身의 行實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工夫하는 수행자는 自己 本來 마음을 確實히 믿고, 스스로 劣等하게 生覺하여 굽히지도(自屈) 말고, 교만하여 스스로 높이지도(自高) 말아야 한다.

이 마음은 平等하여 本來 普通 사람과 聖人이 따로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迷惑한 普通 사람이 있고, 깨달은 聖人이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문득 참 나(眞我)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단번에 깨달음(頓)'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지 말 것이니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本來 한 物件도 없다.

(本來無一物)"고 한 말이 그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지난날부터 익혀온 버릇을 점차로 끊어가면 마침내 보통 사람이 변하여 성인이 되는 것은 '오래 닦음(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지도 말 것이며 신수스님께서 말씀하신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時時勤拂拭)"고 한 말이 이것이다.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는 것은 敎學을 배우는 사람의 病이고,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는 것은 參禪하는 사람의 病이다.

 

교학을 배우는 이들은 참선의 비밀한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의 門으로 들어가는 것을 믿지 않고, 방편(方便)으로 가르친 데에 깊이 빠져서 眞理를 마음으로 觀察하고 行動하지(觀行) 않고 남의 보배만 셈하게 되므로 스스로 못났고 自信 없어하는 퇴굴심(退屈心)만 갖는다.

 

참선하는 선학자는 교학의 수행방법인 점점 닦아 감(漸修)과 아울러 못된 버릇을 끊어서 마침내 깨달음의 좋은 길(正路)에 이르는 方法을 믿지 않고, 지난날 익힌 못된 버릇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공부해서 얻은 결과가 初步的인 境地밖에 안되는데도 眞理의 世界에 대해 自慢한 生覺이 많기 때문에 무턱대고 교만하게 지껄인다.

 

그러므로 옳게 배워 마음을 닦은 사람은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지도 않고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지도 안는다. 마음을 모르고 道를 닦는 것은 어리석은 무명(無明)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確實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과 닦음(修)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依持하여 빛을 내는 것과 같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다.

17. 煩惱를 여윈 경지가 깨달음의 境地

수행하는데 가장 重要한 核心은 普通 사람이 가지고 있는 煩惱 妄想을 없내는 것이다.

特別히 聖人의 알음알이가 있을 수 없다. 모름지기 生覺을 비우고 스스로 마음을 비추어 보아서

한 生覺  因緣 따라 일어나는 것(一念緣起)이  事實은 眞理의 世界에서 보면 마음이란 實體가 없어 空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 마음(一心)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自細히 살펴보면, 마음의 본바탕은 더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그 일어나는 곳이 비어 있어서 다시 무엇을 끊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實體가 없는 幻想(幻)인 것인 줄을 알면 煩惱로부터 곧 벗어난 것이므로 더 方便을 쓸 것이 없다. 幻想을 여의면 곧 깨달은 것이므로 더 以上 닦아 갈 것도 없다.

마음은 요술쟁이요,

몸은 幻想의 성(城)이고,

世界는 幻想의 옷이고,

이름과 형상(名相)은 幻想의 밥이다.

그뿐 아니라, 마음을 내고 生覺을 일으키는 것이나,

거짓을 말하고 참을 말하는 어느 것 하나 幻想이 아닌 것이 없다.

 

幻想은 實體가 없는 虛空의 꽃과 같으므로 幻想이 없어지면 그 자리가 곧 한 生覺도 일어남이 없는 부동지(不動地)이다. 꿈속에서 病이 나서 醫士를 찾던 사람이 잠을 깨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듯이

모든 것이 幻想인 줄을 아는 사람도 또한 그렇다.

 

菩薩이 衆生을 건져 解脫을 얻어 涅槃에 들게 했다 할지라도, 事實은 解脫을 얻은 衆生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에 대한 생각뿐이다. 생각의 바탕이 빈 것(虛空)임을 알아내는 것이 곧 중생을 건지는 것이다. 생각이 이미 비어 마음이 고요하면 事實 救濟할 衆生이 따로 없다. 이상은 믿음과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이치(理)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 하더라도, 버릇은 단번에 없앨 수 없다.

18. 마음의 계율(心戒)

淫亂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고,

殺生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밑 빠진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을 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智蕙가 있더라도 모두 惡魔의 길을 이룰 뿐이다.

 

德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을 依持하지 않고, 몸(身), 입(口), 생각(意) 등 삼업(三業)을 지키지 안는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남을 깔보고, 시비를 걸어 따지는 일을 일삼는다. 굳게 다짐한 마음의 계율(心戒)을 한번 깨뜨리면 온갖 허물이 함께 생겨난다. 만약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 生에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淸淨한 깨달음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戒律을 尊重하기를 부처님을 모시듯이 한다면 부처님이 항상 곁에 함께 하시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풀 한 포기의 생명을 아꼈던 초계(草繫)의 일화와 거위의 생명을 구하려고 대신 자신의 피를 흘렸던 아주의 일화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겠다.

 

生死의 苦痛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貪慾을 끊고, 愛慾을 없애야 한다. 愛情은 輪回의 根本이 되고, 情慾은 몸을 받는 因緣이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탕한 마음을 끊지 못하면 煩惱의 티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고, "愛情이 한 번 얽히게 되면 사람을 끌어다가 罪惡의 門에 처넣는다"고 하였다. 愛慾에 목마름은 愛情이 너무 懇絶한 狀態를 말한다.

 

自由롭고 걸림이 없는 맑은 智慧는 모두 禪定에서 나온다.

어떤 境界나 狀況을 당하여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생겨나지 않음(不生)이라 하고,

생겨나지 않는 것(不生)을 生覺이 없음(無念)이라 하고, 生覺이 없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한다.

계율, 선정, 지혜는 하나를 들면 셋이 함께 갖추어져 있는 것이어서 홀로 성립될 수 없다.

19. 육바라밀(六波羅蜜)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자신의 능력껏 나누어 주라.

동체자비(同體慈悲)한 마음으로 내 몸처럼 사랑하면 이것이 참된 보시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뚱이다.

태어날 때도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고 단속하여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한 생각 속의 성내는 마음(瞋心)이 온갖 障碍의 門을 연다.

참는 일(忍行)이 없으면 보살의 모든 선한 행위(六度萬行)가 이루어질 수 없다.

본바탕의 천진(天眞)한 마음(本眞心)을 잘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 바라밀이다.

20. 眞言, 例拜, 念佛, 看經

진언

신비한 진언(眞言)을 외우는 것은, 현세에 지은 행위의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가 쉬워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보는 지워버리기 어려우므로 신비한 힘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예배

예배란 공경이며 굴복이다. 참된 성품(眞性)을 공경하고, 어리석음(無明)을 굴복시키는 일이다.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 즉 삼업이 함께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나타나심이다.

염불

염불(念佛)에는 입으로 하는 송불(誦佛)과 마음으로 하는 염불(念佛)이 있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데 아무 이익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법문은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여 잊지 않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헛갈리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합치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간경

경전을 보는데 자기 마음속을 향하여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록 만 권의 대장경을 모두 보았다 할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다.

21. 출가 수행자의 마음

공부하여 아직 道를 이루기도 前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말재주만 부려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면 변소를 예쁘게 단청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은 진리를 싫어하고 사도(邪道)가 판을 치는 말세에 어리석게 공부하는 이를 특별히 일깨우는 말이다.

 

工夫란 本來 自己 性稟을 닦는 것인데,

수행자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공부한다면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出家하여 수행승이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便하고 閑暇함을 求해서도 아니며, 따뜻한 밥을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는 生死를 免하려는 것이며, 煩惱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智慧를 이으려는 것이며, 중생 세계인 삼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救濟하기 위해서이다. 가히 하늘을 찌를 大丈夫라 할 만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歲月의 無常한 불꽃이 온 世上을 태운다."고 하셨고,

"중생들이 받는 苦痛의 불길이 사방에서 함께 타오른다."고 하셨고,

 "온갖 煩惱의 도둑이 恒常 사람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스스로를 깨우치기를 自身의 머리털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태어나서(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死) 變化의 過程이 있고,

모든 것들이 存在하는 世界는 생겨나서(成)·지속되면서 머물며(住)·變해가면서 허물어져(壞) 결국 사라져서  本來부터 實體가 없던 공(空)의 狀態로 되돌아가 버린다.

인간의 마음도  生覺이 일어났다(生), 잠시 머물고(住), 變해가고(異), 사라져버리는(滅) 것이다.

 

바로 이것이 無常한 苦痛의 불이 우리의 四方에서 함께 불타고 있음이다. 眞理를 찾는 求道者들이여,

부디 歲月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덧없는 世上의 名譽를 貪하는 것은 부질없이 몸만 괴롭히게 하는 것이고,

世上의 利益만을 求하는 것, 또한 활활 타오르는 業의 불길 속에 섶을 더 보태는 것과 같다.

이름과 財物만을 貪하는 出家 修行者는 시골에 사는 村사람만 못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내 옷을 꾸며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가"하고 통탄하셨다.

22. 수행자가 옷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

아, 불자여, 그대의 한 그룻의 밥과 한 벌의 옷이 곧 農夫의 피요, 織女들의 땀이다. 道의 눈(道眼)이 밝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오늘날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도 하지 않고 거저먹는 그런 무리들의 미래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무슨 마음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눈앞의 쾌락이 훗날 괴로움이 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독약을 먹는 것같이 두려워하고, 신도에게 보시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을 수행자는 두려워해야 한다.

23. 참회 (懺悔)

罪를 지었으면 당장에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세가 대장부의 기상이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本來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罪業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수행자는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똑바른 줄(絃)과 같아야 한다"고 하셨으면, 또 "바른 마음이 곧 도량이다" 라고 하셨다. 이 몸에 貪着함이 없으면 어디를 가나 거리낌이 없다.

 

普通 사람들은 눈 앞 現實의 境界에만 執着하고, 修行者는 마음만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과 現實의 境界, 두 가지를 모두 내버리는 것이 참된 法이다.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참회할 수 있지만, 깨달음을 통해 얻은 반야지혜를 비방한 사람은 참회할 길이 없다.

24. 臨終할 때 觀察해야 할 問題

목숨이 다해 臨終할 때에는 이렇게 生覺하고 觀察해야 한다.

卽, 나를 構成하고 있는 物質的 要素와 精神作用인 五蘊의 本來 모습이 實體가 없는 空한 것임을 觀察해서 우리의 肉身은 흙·물·불·바람 등의 因緣和合으로 잠시 이루어져 있으므로 '나'라는 實體가 없다(無我).

참 마음(眞心)도 貌樣이 없어, 어느 곳에서 온 것도 아니요, 가지도 않는다.

 

태어날 때에도 性稟은 생긴 것이 아니요, 죽을 때에도 性稟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밝고 고요하여 마음과 밖의 境界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이 觀察하여

단번에 깨달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와 인과의 법칙에 얽매이거나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뛰어난 自由人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생각이 없어야 한다.

다만 무심(無心)하게 되며 온갖 世界의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같게 될 것이니 이 점이 重要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平常時에는 씨를 뿌리는 原因이 되고, 臨終할 때에는 그 열매를 거두는 結果가 되니

修行者는 이 점을 注意해야 한다. 머리 백호에 발에 신은 신발처럼 몸에 입은 옷처럼 하여

항상 오온을 관자재로 지켜볼지니라. 

25. 임제종과 선종 오종

工夫하는 사람은 먼저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파의 가풍(家風)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 옛날에 마조스님께서 한번 고함을 친 할(喝)에 백장스님은 귀가 멀고, 황벽스님은 혓바닥이 빠졌다. 이 멋진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당신의 소식을 전한 것이요,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중국에 오신 뜻이다.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조사들의 종파에 다섯 갈래가 있는데, 그것은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 仰宗), 법안종(法眼宗) 등이다.

26. 살불살조(殺佛殺祖)의 大丈夫

깨달음을 얻을 만한 大丈夫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怨讐같이 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 매달려 求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고 무언가를 求하고 있다면 모두 苦痛이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부처와 조사까지도 怨讐같이 보라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다'는 말을 맺음이고, 求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苦痛이라고 한 것은 '딴 것이 없다. 모두가 그대로 옳다'는 말을 맺은 것이고,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은 '한 生覺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는 말을 맺은 것이다.

 

神秘로운 빛(神光)은 어둡지 않아 萬古에 桓하게 비춘다.

 

이 門 안에 들어오면 얄팍한 知識과 分別로 알음알이(知解)를 내지 마라.

神秘로운 빛(神光)이 어둡지 않다는 뜻은 이 책의 첫머리의 '한 物件이 밝고 神靈하다'고 한 말의 맺음이고, 萬古에 桓하다 함은 '本來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말의 맺음이고,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라는 뜻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知解)를 내지 말라'는 것을 맺는 말이다.

이와 같이 들어 보여 宗旨를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달마대사가 한바탕 웃었겠네.

그러나 마침내 어떻게 할 것인가

아, 애닯기만 하다. 달은 밝고 강산은 고요한데 터지는 웃음소리에 天地가 놀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