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철학] 14. 운문화타(雲門話墮)
깨닫고 한 말은 횡설수설도 모두 진리에 부합된다
지적인 명제를 안다고 해도
실제 행동하는 것과 달라
절절하게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해, 그말은 자신의 말
깨닫지 못한 선사 흉내는
영원한 횡설수설에 불과
어느 스님이 물었다. “광명이 조용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치니…” 한 구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운문(雲門) 스님은 갑자기 말했다. “이것은 장졸수재(張拙秀才)의 말 아닌가!” 그 스님은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군”이라고 말했다.
뒤에 사심(死心) 스님은 말했다. “자 말해보라!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 무문관(無門關) 39칙 / 운문화타(雲門話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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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승연 화백 | | | |
1. 깨달음 모범답안 장졸의 오도송
깨달음을 얻으려면 사찰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스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처가 되어서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으니까요. 승적에 이름을 올려야 부처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보다 더 큰 집착과 편견도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는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기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도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노예의 삶일 뿐이기에, 불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스님이 되어서 삶을 단순화할 수만 있다면,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이 더 많이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하다면, 진득하게 앉아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스님이 된다는 것은 요리 자격증을 취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지 않나요.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도 요리를 잘 못할 수도 있고, 자격증이 없어도 요리를 훌륭하게 잘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일까요. 선불교의 역사를 보면 굳이 머리를 깍지 않아도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가끔 등장합니다. 중국 당나라 시절에 활동했던 이통현(李通玄, 635~730)이란 사람을 아시나요. 스님은 아니지만 스님들로부터 깨달은 사람으로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책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은 우리나라의 의천(義天, 1055~1101)이나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칠 정도였습니다. ‘무문관’의 서른아홉 번째 관문에서 우리는 이통현 이외에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장졸(張拙)이란 사람입니다.
생몰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장졸은 중국의 석상(石霜, 807~888) 스님을 만나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략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급제해서인지 그에게 수재(秀才)라는 호칭이 붙어 있습니다. 당나라 시절에 수재라는 호칭은 아직 벼슬을 부여받지 못해서 시험합격자의 신분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했다고 합니다. 기다리던 벼슬이 내려지지 않아서였을까요. 장졸은 석상 스님을 만나게 되고, 이 만남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당연히 깨달음의 노래, 즉 오도송(悟道頌)이 빠질 수가 없지요. 과거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글재주에 능했던 장졸의 오도송은 그 후 스님들에게 하나의 모범 답안처럼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2. 깨달음 대신 남의 말에 떨어지다
서른아홉 번째 관문을 들여다보면 어느 스님이 장졸의 오도송을 암송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스님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장졸의 오도송을 읽어주며 스승이었던 운문(雲門, 864~949) 스님에게 자신의 경지를 은근히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장졸의 오도송 정도는 가볍게 간파하고 있는 지적 수준을 자랑하려는 의도에서일 겁니다. 첫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운문 스님은 제자에게 지금 읊고 있는 오도송은 장졸이 지은 것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제자는 오도송을 암송하기는 멈추고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다”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이 사제지간의 대화에서 황룡 사심(黃龍死心, 1043~1114) 스님은 화두 하나를 끌어냅니다.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우선 ‘오등회원(五燈會元)’에 기록되어 있는 장졸의 오도송을 한 번 음미해보도록 할까요.
광명이 고요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추니(光明寂照河沙)
범부든 성인이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나의 가족이네(凡聖含靈共我家)
어떤 잡념도 일어나지 않아야 온전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만(一念不生全體現)
감각의 작용들이 일어나자마자 온전한 모습은 구름에 가려버리네(六根動被雲遮)
번뇌를 끊으려는 것은 번뇌의 병만을 증가시키고(斷除煩惱重增病)
진여에 나아가려는 것도 또한 바르지 못한 일이네(趣向眞如亦是邪)
세상의 인연에 따라 어떤 장애도 없다면(隨順世緣無碍)
열반과 생사도 모두 헛된 꽃과 같을 뿐이네(涅槃生死是空華)
밝은 달빛을 깨달음의 마음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에게는 과거 시험에 급제할 만한 글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멋진 오도송입니다. 그렇습니다. 번뇌를 끊으려고 하는 것도, 그리고 진여에 나아가려는 것도 집착일 뿐입니다. 당연히 열반과 생사도, 그리고 열반을 꿈꾸는 마음과 생사에 휘둘리는 마음도 모두 잡념일 수밖에 없지요. 물론 집착과 잡념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에 마음이 활발발(活潑潑)하게 열려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티끌처럼 작은 잡념이 아니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너른 마음이 될 테니까요. 달빛에 매료된 마음에 어떻게 생사와 열반이란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습니까. 놀라운 일 아닌가요. 스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장졸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고 임제 스님이 말했던 해탈의 경지를 멋지게 체인한 것입니다.
3. 앵무새처럼 오도송 읊조리다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려는 스님들이 장졸의 명쾌한 오도송을 지나칠 수 있었겠습니까. 대부분 깨달은 스님들의 난해한 오도송보다 장졸의 그것은 더 이해하기 쉬우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운문 스님의 제자도 장졸의 오도송을 읽고 또 읽어 이제는 줄줄 암송할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짧은 문답으로 운문 스님은 제자가 “말에 떨어졌다”고 진단합니다. ‘화타(話墮)!’ 어려운 말은 아니지요. 제자가 암송하는 장졸의 오도송은 단지 말뿐이라는 지적이니까요. 한 마디로 말해 제자는 장졸과 같은 깨달음도 없으면서 앵무새처럼 오도송을 읊조리고 있다는 겁니다. 현대 영국의 철학자 라일(Gilbert Ryle, 1900~1976)도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Knowing how and knowing that)’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당 상황에 대한 지적인 명제들을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하거나 운전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실천적 앎과 단지 이론적으로만 아는 이론적 앎을 명확히 구분한 이야기입니다.
라일의 지적은 매우 예리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의 작동 메커니즘과 운전하는 방법을 아무리 잘 명쾌하고 쉽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진짜로 자동차를 잘 수리하고 잘 운전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니까요. 당연한 일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이제 사심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음미해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운문 스님은 어느 대목에서 제자가 단지 이론적 앎만 가지고 있는지 간파했던 것일까요? 바로 운문이 “이것은 장졸수재(張拙秀才)의 말 아닌가!”라고 말하자 제자가 “그렇다”고 대답한 대목입니다. 어디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기 위해 비유 하나를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방이 “그건 너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썼던 말 아니니?”라고 반문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그래. 어떻게 알았니?” 이것은 어쨌든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사랑 고백이 단지 말뿐이라는 것을 토로한 셈이니까 말입니다.
“사랑해”라는 표현은 과거 모든 연인들이 써왔다고 해서 피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정말로 절절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해”라는 표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고 또 이야기할 “사랑해”라는 말은 사람들의 수만큼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바로 이것입니다. 어쨌든 운문 스님의 제자는 “그렇다”고 대답해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만약에 그가 진실로 깨달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기에 운문은 제자가 “말에 떨어졌다”고, 다시 말해 깨달음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던 겁니다. 만일 제자가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깨달았다면, 그는 자신의 오도송을 읊어도 되고 장졸의 오도송을 읊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무문관’의 편집자 무문 스님을 포함한 수많은 스님들이 과거 선사들의 오도송을 은근히 갖다 쓰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말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진짜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니까 말입니다. 진짜로 깨달았다면 횡설수설(橫說竪說)이 모두 오도송입니다. 반대로 깨닫지도 않았으면서도 경전이나 선사의 말에 부합되는 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모두 횡설수설에 불과한 법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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