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법에도 여러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질이 있으므로
여러 방편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선가귀감 3> -
주해(註解):
법이란 한 물건이고 사람이란 중생을 가리킨다.
법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을 따르는’ 두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단박 깨치는 이’와 ‘점차 닦아야 하는 이’의 두 氣質이 있으므로,
문자나 말로 가르치는 여러 方便이 필요하다.
이른 바 “공적인 일에는 바늘 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으나,
개인적인 정으로는 수레도 오고간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이 비록 본래부터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천생으로 지혜의 눈이 없어서 윤회를 달게 받는다.
만일 세상에서 초월한 금칼이 아니라면 누가 이 무명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줄 것인가?
고생바다를 건너 즐거운 저편 기슭에 오르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게 가엾이 여기는 은혜 덕분이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限 輪廻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새로 닦아나가는 이치를 널리 들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깊은 은혜에 감사할 것을 말한 것이다.
송(頌): 임금님이 보배전각에 오르니/ 시골노인 노래 가락 절로 나오네.
사족(蛇足):
어떤 이가 와서 물었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무아(無我)法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윤회설(輪回說)도 말한다. 무아와 윤회는 얼핏 모순되어 보인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까? 내가 없다면, 과연 윤회하는 主體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無我法에 通達하면 더 이상 輪廻하지 않는다.
無我에 通達하지 못했기에 輪廻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生覺이 남아 있는 限 輪廻를 免할 수 없다.
바로 이 '나'라고 하는 한 生覺이 根本이 돼 輪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에게 있어서 無我는 目標요, 輪廻는 現實이다.
이것을 잘 區分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다른 次元의 가르침을 同一線上에서 설명하려고 하니 무리가 따른다.
本來 무아(無我)였지만, ‘나’라는 한 生覺이 일어남으로써 유아(有我)로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한 生覺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할(喝)!!’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났도다.”
이미 일어난 물결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잠재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결이 쉬면 왜 일어났는지도 自然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법신불(法身佛)이 몸을 나투어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로 다가오신 것이다.
法身佛인 본마음 참 나는 모양 그릴 수 없고 이름 지을 길 없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툴 수 있고 어떠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차리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가 많다.
그래서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報身佛이다.
報身佛 또한 마음의 눈이 열린 이는 보고 들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많다.
그래서 結局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化身佛이다.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直接 마음과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의 은혜는 참으로 백골난망이다.
부처님이 안 오셨다면 나는 지금 어느 지옥에서 헤매고 있을까?
월호스님 /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