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는 누구인가 ???

장백산-1 2014. 2. 15. 16:44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요약 |

 

깨달음 창조자 |2013.01.23. 15:17 http://cafe.daum.net/youthface/eJn2/252 

 

 

 

 

 

1.마음의 本質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란 眞我 안에서 나타나는 微妙한 힘이다.

그것 마음의 힘은 모든 生覺을 일으킨다.

生覺과는 別個의 獨立된 마음이란 存在하지 않는다.

따라서 生覺이 바로 마음(心)의 本質이다.

또 生覺과는 別個로 獨立된 現象界도 存在하지 않는다.

마음이 眞我 밖으로 나올 때 現象界가 나타난다.

따라서 現象界가 나타날 때 眞我는 나타나지 않으며

眞我가 나타날 때 現象界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本質을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마음은 眞我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眞我가 바로 아트만Atman 이다.

마음은 恒常 무엇엔가 依存하고 있으며 홀로 獨立的으로 存在할 수는 없다.

흔히 靈魂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心)이다.

 

 

2.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疑問을 가지고 계속 探究해 들어감으로써 可能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生覺을 계속하면 다른 生覺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生覺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3.<나는 누구인가>라는 生覺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生覺이 일어나면 그 生覺을 따라가지 말고

<이 生覺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生覺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生覺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生覺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對答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質問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마음의 根源으로 向하게 되고

生覺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4. 事實 마음과 呼吸의 根源은 같다.

마음의 本質은 生覺이고 最初의 生覺은 <나>라는 生覺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Ego인데,

바로 이 에고가 始作되는 地点에서 呼吸도 始作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呼吸이 調節되고,呼吸이 調節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呼吸은 거칠은 形態의 마음이다.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만트라(주문)를 외운다든가,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다.

 

5.眞我의 本質은 무엇입니까?


오직 眞我만이 實在하며  現象界, 개아(個我), 神 等은

眞我 안에 나타난 現象에 불과하다.

이 셋은 同時에 나타났다가 同時에 사라진다.

眞我는 <나>라는 生覺이 전혀 없는 바로 그 자리이며 <沈默>이라고도 한다.

眞我가 곧 現象界이고 眞我가 곧 個我이며 眞我가 곧 神이다.

眞我는 모든 것이다.

 

6.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입니까?


自己 自身을 眞我,卽 根源에게 完全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自己 自身을 근원인 참나에게 완전히 던진다는 말은 眞我에 對한 生覺 外에는 어떤 다른 生覺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眞我 안에 沒入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근원에게 맡겨라.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至高한 근원의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 근원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가?

氣車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준다.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不便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라마나 마하르쉬는 神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였다.

하나는 具體的인 이름과 特性을 가지고 있는,人間과는 分離된 存在로서의 神이고,

다른 하나는 人間들이 眞我를 人格的인 觀點에서 認識하는 槪念으로서의 神이다.

라마나는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神을 眞我와 同意語로서 자주 사용하였다.

바로 위 문장에서는 後者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7.幸福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眞我의 本質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現象界의 어디에도 幸福은 없다.

우리는 無知로 인하여 어떤 對相으로부터 幸福을 얻는다고 生覺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向할 때, 그 마음이 經驗하는 것은 不幸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完全히 達成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그것 역시 眞我의 幸福이다. 즉, 깊은 잠을 잘 때, 삼매에 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그리고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마음은 內面으로 向하면서 純粹한 眞我의 幸福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限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幸福과 不幸을 번갈아 經驗한다.뜨거운 太陽 아래에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眞理를 아는 사람은 眞我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現象界를 헤매며 不幸을 느끼다가, 어쩌다가 한 번씩 眞我로 돌아와서 幸福을 經驗한다.

事實  現象界란 生覺의 集合體에 불과하다. 現象界가 사라질 때, 卽 아무런 生覺이 없을 때 우리는 幸福을 經驗하며 現象界가 나타날 때 不幸을 經驗한다.

 

 

8.解脫이란 무엇입니까?


구속되어 있는 自己 自身의 本質을 探究해 들어가서

自身의 眞情한 本質/밑바탕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1.<진아(眞我)>


라마나 마하리쉬는 感覺的으로 또는 生覺을 通해서 體驗하는 自己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自己라고 同一視하는 것들을 다 否定한 다음에 남는 純粹한 覺性<진정한 나>,즉 <眞我>라고 하였다.

 

個體的 自我/에고란 本質的으로는 存在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들어낸 것으로 <진정한 나>를 제대로 體驗하지 못하도록 防害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그는 眞我는 恒常 實在하며 우리가 늘 體驗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때는 오직 스스로를  限界짓는 傾向을 가진 마음이 사라졌을 때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음이 永遠히 사라져서 眞我가 그 모습을 完全히 드러낸 狀態가 바로 깨달음이다.

 

2.<신(神)>


라마나 마하리쉬는 宇宙는 眞我의 힘에 의해서 維持된다고 하였다.唯神論者들은 普通 이 힘이 神에게서 起因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神이라는 단어를 眞我와 同意語로서 가끔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힌두교에서의 지고의 존재인 브라흐만이나 시바를 眞我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宇宙를 維持하는 無形의 힘의 存在다.

神은 宇宙의 創造者가 아니며 宇宙는 神의 本來的인 힘이 나타난 現象일 뿐이다. 따라서 宇宙로부터 神을 分離할 수는 없지만, 宇宙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神은 그것에 依해 營響을 받지 않는다.

 

3.<무엇이 實體입니까?>


恒常 實在하는 것만이 實體다.그 實體는 形態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들의 根幹을 이루고 있다.그것은 制限되어 있는 것들의 根幹을 이루지만 스스로는 制限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言語를 넘어서 있으며 <존재,비존재> 등의 표현조차 넘어서 있다.

이 實體가 外面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沈默 인데,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이 眞情한 智慧의 最終的 狀態이며 어떠한 것에도 防害받지 않는 狀態라고 선언하고 있다.

 

4.<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 됩니까?>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存在할 뿐이다.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하여 왔던 그 상태 그대로 그냥 存在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眞實 아닌것을 眞實로 固執하지만 않으면 된다.그때 그대는 眞我를 眞我로서 깨닫게 될 것이다.어느 段階에 이르면 그대는 그토록 분명한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超越해 있다.

지금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그 <보는 자>가 사라지고 眞我만이 남게 된다.

 

5.<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아(自我)들이 肉體를 가지고 存在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眞我만이 唯一한 實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肉體가 나>라는 生覺을 認定하면 無數한 自我들이 있게 되지만,

이 生覺이 사라졌을 때 眞我가 나타난다.그리고 그 狀態에서는 진아와 分離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眞我만이 唯一한 實體라고 하는 것이다.

 

眞我의 本質的인 側面에서 보면 肉體는 결코 實在하지 않으며, 錯覺의 힘에 依해

歪曲된 마음의 外向的인 側面에서 볼 때만 肉體가 實在하는 것처럼 보인다.따라서 眞我가 肉體의 主人이라고 보는 것은 그릇된 見解다.

이 世上은 肉體를 通해 存在하고,肉體는 마음을 通해 存在하며,

마음은 意識으로 因해 存在한다.그리고 이 意識은 實體 없이는 存在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眞我를 간파해 버린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眞我 外에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왜? 肉體를 <나>와 同一視하던 에고/自我意識이 사라져 버리고,

그는 形態 없는 存在,즉 純粹意識이 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自身이 곧 眞我라는 事實을 알며 眞我 外에는 肉體나 그밖의 아무것도 實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안다.이와 같은 사람에게 육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6.<우리의 本質이 幸福 또는 至福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眞我의 本質이 바로 幸福이다. 진아는 완전한 행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행복만이 존재한다.이 사실을 깨달아 진아안에 머물면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라.사람은 깊이 잠들었을 때 아무런 財産도, 그의 肉體조차도 所有하고 있지 않다.그런데 불행해지기는 커녕 매우 행복감을 느끼며 누구나 다 깊이 잠들고 싶어한다.결국 행복이란 인간 속에 내재해 있으며 결코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그 무한한 행복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결국 진아를 깨달아야만 한다.

 

7.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肉體가 곧 나>라는 그릇된 生覺이 모든 不幸의 原因이며 이 그릇된 生覺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드러난다.깨달음이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質이 變化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릇된 것들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自然히 드러날 뿐이다.

窮極的인 眞理란 至極히 單純하다.그것은 原來의 狀態로 存在하는 것일 뿐이며

이 以上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8.그대는 그대의 無限한 本性에 스스로 制限을 加한 다음,

自身이 制限되어 있는 存在라고 生覺하면서 슬퍼하고, 그 存在하지도 않는 制限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저런 修行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는 無限하고 永遠하며 純粹한 眞我라는 事實을 알아라.

그대는 恒常 眞我이며 그 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다.

 

<본래 자유로우면서도 왜 저희들은 항상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항상 구멍 안에 있으면서 왜 그대들은 세계일주를 떠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생고생하면서 헤매인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모두 마음의 作用이며 마야(maya 幻影)다.

 

9.<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계속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사나(vasana 個個人의 潛在的인 마음의 傾向性)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그것이 있는 限, 疑心과 混同은 남는다.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며 그 뿌리를 잘라버려야 한다.

우선 眞理를 들어야 하며,그 다음 眞理를 되새겨 보고  眞理에 대해서 冥想해야 한다.이 두 段階의 과정을 통해 마음의 傾向性은 점차 뿌리가 뽑히고 무력하게 된다.

 

 

1.<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나'라고 하는 生覺> 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知性, 記憶 등의 精神的 屬性도 역시 마음이다.

또한 個體的 靈魂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2.밖으로 向하려는 마음의 習性이 남아 있는 限 <나는 누구인가>라는 質問이 필요하다.어떤 生覺이 일어나면,바로 그 瞬間 이 質問을 함으로써 그 生覺을 없애야 한다. 非本質的인 것에 注意를 기울이지 않음이 바로 無執着 또는 無慾이며,

眞我를 떠나지 않음이 智慧다.

 

3.<저는 <나>가 일어나는 根源에 대해서 探究하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아무런 生覺도 일어나지 않고 텅~ 빈 상태만이 있읍니다.은은한 빛이 充滿하고 저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상태의 저 자신이라고 느낍니다.저는 육체나 다른 형상들을 인식하지도,보지도 않습니다.그 체험은 거의 30분 정도 지속되며 제게 기쁨을 줍니다.영원한 행복(自由 또는 救援,뭐라고 불러도 좋지만)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經驗이 몇 시간,몇 일,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되도록 계속 수행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은 救援이 아니다.그와 같은 상태를 <마노라야 Manolaya>,

卽, <일시적으로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라고 한다.

마노라야는 일시적으로 생각의 움직임을 靜止시킨 집중을 의미한다.

이 집중 상태가 끝나면 바로 여러 가지 生覺들이 그 前처럼 밀려든다.

이와같이 일시적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가 설사 千年 동안 계속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탄생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불리워지는 상태,

즉 生覺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로 이끌지는 못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精神을 바짝 차리고 이런 體驗을 하는 者가 누구인지,그 즐거움을 아는 자가 누구인지 內面에서 探究해야 한다.이런 探究를 하지 않으면 그는 오랜 동안의 황홀경이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질 것이다.수행을 해 나가는 도중 이 단계에서 적절한 引導가 없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自由에 속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오직 소수만이 가까스로 무사히 목표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生覺이 가라앉는 이러한 狀態에 빠져서는 안된다.이 상태를 체험하면

卽時 意識을 回復해서 이 고요함을 經驗하는 者가 누구인지를 內面에서 探究해야 한다.다른 生覺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同時에 이와 같은 깊은 수면 상태,혹은 자기 최면 상태에  빠져서도 안된다.

 

쉽고,직접적이며, 가장 빠른 지름길은 自我 探究의 方法이다.自我 探究를 通하여

生覺들은 점점 깊어지고,根源에 이르게 되며 그 根源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그때

그대는 內面으로부터의 反應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모든 生覺들이 一時에,그리고

永遠히 사라짐으로써 그대가 그곳에서 休息하고 있음을 發見 할 것이다.

 

4.人間이 스스로를 行爲者라고 生覺하는 点이 問題다.그러나 그것은 錯覺이다.

모든 行爲는 <根源의 더 큰 힘>이 하고 있으며 人間은 道具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이와 같은 태도를 받아들이면 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만,그렇지 않으면 그는 고통을 자초한다.

 

예컨대 어떤 사원의 탑은 밑부분이 사람의 입상(立像)으로 되어있는데,그 입상의

자세와 표정은 마치 그 사람이 塔 전체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그러나 생각해보라. 塔은 땅 위에 세워져 있으며 땅 밑에는 탑을 받치는 基礎가 되어 있다. 따라서 그 立像은 塔의 일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탑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듯한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다. 우습지 않은가?

自己 自身이 헹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5.깨어 있을 때,꿈꿀 때,잠잘 때의 어느 경우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수행이 최고의 수행이다.또한 수행은 <나는 지금 수행하고 있다>라는 生覺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해야 한다.

 

6.<世俗의 일 가운데에서 분주하면서도 삼매를 즐길 수 있습니까?>


<내가 일한다>는 느낌이 障碍다. 스스로에게 <누가 일하는가>라고 물어보라. 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그러면 일은 그대를 束縛하지 않고 自動的으로 進行될 것이다. 일을 하겠다는 노력도, 출가를 하겠다는 노력도 하지 말라. 그대의 그 努力이 障碍가 된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대의 운명이 일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 그대가 아무리 일하려 해도 안 될 것이요, 일하게 되어 있으면 어쩔 수없이 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더 큰 힘>에게 맡겨 버려라. 그대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출가할 수도 없고,남아 있을 수도 없다.

 

7.<저는 다른 사람보다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을가요?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이 職責을 포기하고 홀로 있고 싶습니다.>


아니다.그대는 지금 다니는 職場에 계속 다니면서 그 일을 계속해도 괜찮다.

마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만드는 內面의 흐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眞我다.

따라서 眞我가 그대 行爲의 眞正한 根源이다. 일하는 동안에 진아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일하는 동안에도 그대 마음의 根源에 注意를 기울여라.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하면서 일하는 시간을 그대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일하는 동안에도 그대의 眞正한 本質에 대한 注意를 놓치지 말고 또 서두르지 말라.

서두르면 그대는 놓치게 된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그대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을 하고 있는 것은 內面의 흐름이라고 生覺하고 그대 自身을 그 흐름과 同一視하라.  그대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해 나가면,그대의 일은 障碍가 되지 않는다.

 

8.<초기 단계에서는 홀로 있으면서 外部的인 義務를 포기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포기라는 것은 항상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숲속 같은 조용한 場所에 간다거나,義務를 포기하는 데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밖으로 向하지 않고 안으로 向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로 오든 저기로 가든,또는 의무를 포기하든 포기하지 않든,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

그런 모든 것들은 根源에 依해서 進行된다. 肉體를 通한 모든 行爲는 肉體가 처음 誕生했을 때에 이미 決定지워져 있다. 그대가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이 없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唯一한 自由는 그대의 마음을 안으로 向하게 하여 거기에서

行爲者임를 抛棄하는 것이다.




1.삼매(Samadhi 三昧) :根源/ 實體에 對해 覺性하고 있는 狀態가 三昧다.


(1)本然的 무상(無相) 三昧 : 이는 完全하게 自身의 에고를 除去한,깨달은 사람의

상태다. 人爲的인 努力은 전혀 없는,源泉的이고,純粹하며,自然스러운 상태이다.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사람들과 어울려 世上에서 自然스럽게 살아나갈 수 있다. 自身이 眞我라는 事實을 알기 때문에,이 삼매를 얻은 사람은 자신과 타인,그리고

자신과 세상 사이에 어떠한 差別도 두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眞我 아닌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

(2)一時的 無相 三昧 - 이는 깨달음 이전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진아를 각성하는 상태가 있다.그러나 아직 에고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이 단계의 特徵은 肉體에 對한 意識이 없다는 점이다. 비록

眞我를 일시적으로 覺性하기는 하지만,감각을 느낄 수도 없고 제대로 생활해 나갈 수도 없다. 육체에 대한 意識이 되돌아 오면 에고가 다시 나타난다. 實體에 몰입되어서, 現象界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3)유상(有相) 삼매 - 이 단계에서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진아에 대한 각성 상태가 유지된다.이 삼매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얼마나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진아에 대한 주시가 흔들리면 진아에 대한 각성 상태가 흐려진다.

 

 

2.<언제부터 本然的 무상 삼매를 위해 수행해야 합니까?>


처음부터 해야한다. 일시적 무상 삼매는 설사 수십 년 동안 계속된다 하더라도

바사나(마음의 傾向性)가 뿌리뽑히지 않는 한,결코 자유를 주지 못한다.

 

3.자아 탐구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진아를 깨닫게 되면 모든 세계가

다 眞我 안에 있음을 볼 수 있다. 萬物의 根源은 眞我이며 眞我를 깨달으면 眞我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도 볼 수도 없다.

 

 

4.<때때로 저는 內面에서 나는 소리를 듣습니다.이런 일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이 소리를 듣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식으로

自我 探究를 계속해야 한다.그러면 결국 根源/實體에 이를 것이다.

 

5.<저는 수행 도중 無念의 상태에 이르면 상당한 즐거움을 만끽합니다.그러나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經驗을 하더라도 그것에 滿足해서는 안 된다. 즐거움을 느끼든,두려움을

느끼든 그것들을 느끼는 者가 누구인지를 물으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

즐거움과 두려움 등을 모두 超越한 境地, 卽, 모든 二元性이 사라지고

텅~빈實體만이 남은 境地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런 체험을 하는 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생각이 가라앉을 때에 경험하는

라야(laya)의 즐거움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모든 二元性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內面을 探究해 나가야 한다.

 

6.수행의 마지막 障碍가 황홀경이다.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끼고 그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고요함이 충만한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그 고요함은 황홀경보다 더 높은 次元이며 삼매 속으로 흡수된다. 삼매에 들어가면 깨어 있으면서 잠자는 듯한 상태가 나타나며,그 狀態에서

그대는 그대가 恒常 純粹意識이라는 事實을 알게 된다.

意識은 그대의 本性이기 때문이다.

實際로 인간은 항상 삼매 속에 있으나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7.<生覺이나 欲望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生覺을 調節하려면 어떻게 제 生活을 統制해 가야 합니까?>


그대가 眞我에 固定되면 될수록 다른 生覺은 저절로 사라져 간다.

마음이란 生覺/에너지정보체의 다발일 뿐이며, <나라는 生覺>이 모든 生覺의 뿌리다. 이 <나>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를 發見하면, 모든

生覺이 眞我/根源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린다.

생활을 통제하는 것,즉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목욕하고 呪文을 외우며 의식(儀式)을 執行하는 그런 것들은 自我 探究의 方法을 擇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지,自我 探究의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規則이나 訓鍊들은 다 필요가 없다.

 

8.<계속 노력을 하는 데에도 마음이 內面으로 向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꾸준히 그리고 냉정하게 계속해 나가야 하며,그 效果는 점차적으로 나타난다.

자기가 들어가 있는 외양간에 풀이 잔뜩 쌓여 있음을 모르는 암소는 자꾸 외양간

밖으로만 나가려고 하는데,마음이 꼭 그와 같다.암소 주인이 아무리 달래고 끌어도 암소는 말을 듣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고 한다.

 

어쩌다가 풀을 한입 먹게 되어도 지금까지 해오던 버릇이 있어서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 하지만 계속 주인이 달래면서 풀을 조금씩 자꾸 먹이다 보면 암소는 점차

풀맛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외양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일단 內面의 幸福을 發見하면 결코 밖으로 헤매지 않는다.

 

9.<그렇다면 이 現象界는 꿈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대가 꿈을 꾸는 동안 느끼는 實體感에 잘못된 것이 있는가?

그대는 완전히 불가능한 꿈,예컨대 죽은 사람과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는 꿈을 꿀 수도 있다. 꿈 속에서도 잠시 동안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던가?>라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그대의 마음은 다시 꿈 속에 빠져 버리고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과 똑같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꿈意識은 그대가 그 꿈의 實體를 疑心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또 그 世界의 實體를 疑心할 수가 없다.그 世界를 만들어낸 바로 그 마음/意識이 어떻게 그 世界를 實在하지 않는다고 否認할 수 있겠는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세계와 꿈꿀 때의 세계를 比較하는 중요한 理由가 바로 이 때문이다.

둘 다 마음/意識이 만들어낸 것이며, 마음/意識이 어느 하나에 몰두해 있는 限,

그것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마음이 꿈꾸는 동안은 꿈 속 세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마음이 깨어있는 동안은 그 상태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反對로 만약 그대가 외부세게로 향해 있는그대의 마음을 完全히 內面으로

돌려서 內面에 머무르게 한다면,다시 말해서 모든 것의 根源인 眞我에 對해서 恒常 注意를 놓치지 않는다면,그대는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世界가 마치 그대가 꿈 속에서 보았던 세계처럼 實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發見할 것이다.

 

1.<신지학(神智學)에서는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기 까지에는 50년내지 10,000년이 걸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


어떤 意識 狀態를 測定하는 基準과 다른 意識 狀態를 測定하는 基準 사이에는

아무런 聯關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측정의 척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다시 태어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 될 것은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個體的 靈魂이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各者의 生覺하는 마음이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는 事實이다.

마음은 어떠한 상태,어떠한 意識次元에 있든 그 意識次元에 맞는 체(體,body)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卽,物質 世界에서는 物質的 肉體를,꿈의 세계에서는 꿈의 體를 만들어내는데,

꿈 속에서의 體는 꿈 속에서 비가 오면 젖고 꿈 속에서 병이 들면 아파한다.

物質의 肉體가 죽으면 마음/意識은 一定 期間 동안 마치 꿈 없는 수면 상태에서처럼 停止하는데, 그 때에는 物質世界도 없고 肉體도 없다.그러나 곧 다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體(예를 들면 아스트랄 意識世界에서의 아스트랄 意識體)를 받아 活動하게 되며,그러다가 다시 物質的 肉體를 받아 再生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사라져 버린 깨달은 사람은 죽음에 依해서 아무런 影響도 받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完全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다시 생겨나서 탄생과 죽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幻想의 고리가 永遠히 풀어져 버린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탄생과 죽음이 實在한다는 幻想을 만들어내고 계속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음/意識이며, 이는

깨달음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진다.

 

2.나무의 가지를 잘라도 다시 가지가 자라나는 것을 보아라.뿌리가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나무는 계속 자란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아 일시적으로 가슴 속에 가라앉은 業障/行爲의 情報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가 오면 다시 再生을 일으킨다. 그와같이 하여 인간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3.<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靈魂들과 이 드넓은 宇宙가

어떻게 가슴 속에 가라앉은 그 微細한 業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습니까?>


巨大한 보리수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생겨나듯이, 이 수많은 靈魂들과, 온갖 이름과 모습으로 가득찬 이 드넓은 宇宙도 微細한 業/行爲의 씨앗으로부터 生겨난다.

 

4.그대가 이번에 誕生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계속 파고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眞理를 깨닫게 될 것이며,그 眞理가 그대의 모든 業을 태워 버려 그대를 誕生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화약도 성냥불 하나로 瞬息間에 다 타버리듯이 無數한 生에 걸쳐 쌓아온 過去의 業도 아주 작은 깨달음의 불꽃에 의해 타버린다는 사실이 경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巨大한 現象界와 이 巨大한 現象界를 硏究하는 그 放大한 學聞의 知識은 모두

에고/自我意識에 起因한다. 自我 探究에 依해서 에고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들은

瞬息間에 무너지고 眞我/根源만이 남는다.

 

5.<그렇다면 人間의 自由란 무엇이며 自身의 行爲에 對해서 責任을 진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육체와

진정한 자기 자신을 同一視하지 않을 수 있는 自由뿐이다. 肉體는 프라라브다

카르마(현생에서 받아야 하는 과거생에 의해 축적된 카르마들의 일부. 운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에 依해 이미 행하기로 決定된 行爲들을 必然的으로 하게 된다.

 

이때 육체와 자신을 同一視하여 그 肉體의 行爲에서 派生되는 열매에 執着할 것인지,아니면 同一視로부터 벗어나서 單純히 그 肉體의 行爲들을 지켜보는 者로 남을 것인지,그 選擇에 있어서 人間은 自由롭다.

 

6.<이 世上의 苦痛의 原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개인 또는 집단으로서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眞我를 깨달아라.그것이 필요한 전부이다.

 

7.<수많은 制約으로 가득찬 이 삶 속에서 제가 眞我의 至福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眞我의 至福은 언제나 항상 그대와 함께 있다.그리고 그대가 그 眞我를 진정으로

찾고자 노력한다면,그대의 힘으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그래서 그대의 不幸의 原因은 그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內面,卽 에고Ego에 있다.그대는 스스로 自身에게 限界를 지어 놓고그대 자신을 拘束시켜놓고 다시  그 限界와 拘束들을 넘어서려고 애쓰고 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이며,에고와 함께 모든 문제가 생긴다.

不幸의 原因이 그대의 內面에 있기 때문에 世上탓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대 바깥에 있는 對相들로부터 무슨 幸福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그대가 에고를 부정하고 무시함으로써 에고를 없애면 그대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나, 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를 制約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 制約을 뛰어넘게 하려는 헛된 努力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眞正한 그대 自身인 眞我를 깨닫는 것만이, 恒常 그대와 함께 있는 眞我인 至福을 깨닫는 唯一한 方法이다.

 

8.<진정한 의미에서 拘束도 自由도 없다면

    實際로 여러 가지 기쁨과 슬픔을 經驗하는 理由는 무엇입니까?>


人間이 自身의 眞正한 本性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에만

그것들이 實在하는 것처럼 보일 뿐,근원/진아에서는 그것들은 實在하지 않는다.

 

9.<저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봅니다.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있을 때,

그 굶주림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實在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꿈이라고 하면서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깨달음,또는 근원/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대가 말하는 그 고통은 분명히 하나의

꿈이다. 꿈 속에서도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며, 다른 사람이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본다. 또 그대는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도 하고, 다른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꿈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그 꿈 속의 배고픔이 마치 그대가 지금 이 세상에서 배고픔을 느끼듯이 實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꿈 속의 배고픔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대가 깨어난 다음이다.

 

배부르게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하루 종일 일을 열심히 해서 매우 피곤하고 또 배가 고파 잔뜩 먹고 싶어하는 꿈을 꿀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을 깨어 보면 그대의 배는 불러 있고 그대는 침대에서 나오지조차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는 동안에 그 꿈 속에서 느끼는 고통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꿈 속에서 느끼는 배고픔은 꿈 속에서의 먹을 것으로 해소해야 하며, 꿈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면 꿈 속에서의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꿈 꾸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를 섞어 놓을 수는 없다.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여 이 幻想에서 깨어나기 前까지는 苦痛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社會的 奉使를 해야 한다.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도 <내가 行爲者>라는 느낌을 갖지 말고,<나는 眞我의 道具>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코 자신에게 속아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즉,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

주고 있다.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며 나는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는 우월하고 그는 열등하다.> 그대는 그 사람의 內面에 있는 眞我를 敬拜하는 手段으로 그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

이런 모든 奉使도 결국 그대를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自身을 돕고 있을 뿐이다.

 

10.<結局  恒常 內面/根源/眞我만을 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現象界는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까?>

現象界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먼저 眞正한 그대 自身의 內面을 보고  그리고나서 現象界 全切가 眞我임을 보라>는 의미다.卽, 現象界 現實世界가 實相임을 보라는 것이다.

그대가 自身을 肉體와 同一視하고 있는 限은 現象界가 外面的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그대가 眞我가 되면 現象界는 根源인 眞理로 나타난다.

 

11.<자신이 그릇된 行爲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더 큰 악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그 행위를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무엇이 옳고,무엇이 그름인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基準이란 없다.

個個人의 氣質에 따라,그리고 狀況에 따라 意見들은 서로 달라진다. 또한 그것들은 結局 生覺일 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 神經쓰지 말고 대신 生覺을 쉬어라.

그대가 진정한 옳음에 머물 때, 그 옳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12.<올바른 行爲만으로는 救援을 얻을 수 없습니까?>


 救援을 바라는 者는 누구이며 救援을 얻는 者는 누구인가? 또,올바른 行爲란 무엇인가? 아니,行爲란 무엇이며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올바름과,그름을 판단하는 者는 또 누구인가?

 

 인간들은 各者 自身의 카르마/업/행위의 정보에 依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만,

 根源/實體를 알아야만 옳고 그름에 對한 眞理도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구원을 바라는 者가 누구인지를 찾는 방법이다.

 누구에게나 共通的인 올바른 行爲란  바로  이 <누구>, 또는 '에고의 根源'을

 探究하는 行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