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제사 전경. 사원 초입에 서있는 ‘청탑’ 안에는 임제 스님의 사리와 가사, 발우가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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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云, 此日法筵은 爲一大事故니 更有問話者麽아 速致問來하라 儞纔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何以如此오 不見가 釋尊云, 法離文字며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爲儞信不及일새 所以今日葛藤이라 恐滯常侍 與諸官員하야 昧他佛性이니 不如且退니라 喝一喝云,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 久立珍重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질문할 사람이 있는가? 속히 질문을 해라. 그러나 그대들이 입을 열기만 하면 本質과는 아주 멀어지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보지 못했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法)은 문자를 떠난 것이며,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대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상시와 여러 관료들의 불성을 어둡게 할까 두려우니 그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 임제 스님이 크게 할(喝)을 하고 말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마침내 일대사를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안하게 쉬도록 하라.”
강의) 佛法은 말로 설명할 수도, 글로 전할 수도 없습니다. 眞理는 사량(思量)으로, 분별(分別)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를 떠나 있으며 인과(因果)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기만 해도 本質과는 영영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향엄 스님이 위산 스님에게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위산 스님이 향엄 스님에게 묻습니다. “부모가 그대를 낳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父母未生前本來面目)?” 이미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향엄 스님이었지만 이 질문에 꽉 막혀서 도무지 대답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처소로 돌아와 부지런히 경전을 뒤졌지만 ‘그림 속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다’라는 탄식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답답함에 견디지 못한 향엄 스님은 위산 스님을 찾아 답을 일러주기를 간청합니다. 그러나 위산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말로써 그 뜻을 설명하게 되면 그대는 훗날 분명히 나를 욕하거나 탓할 것이네. 나의 설명은 곧 나의 것일 뿐 그대의 수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네.”
결국 스스로의 재주 없음을 한탄한 향엄 스님은 더 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경전을 불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위산 스님의 곁을 떠나 길을 나섭니다. 길거리에서 자고 먹으며 떠돌던 향엄 스님은 어느 날 혜충 국사의 탑을 친견하게 됩니다. 이에 탑에 참배하고 잠시 휴식을 갖기로 한 스님은 주변의 잡초와 나무를 베며 잠자리와 땔감을 마련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눈에 띄는 기왓장이 있어 무심코 숲 속에 던지게 됩니다. 그때 기왓장이 대나무에 맞아 ‘딱’ 하고 소리를 냅니다.
그 순간 향엄 스님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떨어지지 않던 의문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감격에 겨운 스님은 곧바로 몸을 바르게 하고 위산 스님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합니다. 그리고 기쁨에 겨워 말합니다. “스님의 은혜가 부모님보다도 더 지중합니다. 그때 만일 스님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던들 어찌 오늘의 이런 큰 깨달음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선어록에 담긴 향엄 스님의 유명한 오도(悟道)의 장면입니다. 임제 스님께서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까닭에 갈등(葛藤)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에서 갈등은 말 그대로 갈등이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족(蛇足)의 의미로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대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수고롭게 사족을 붙이고 있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내가 부처라는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곧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는 確信일 것입니다. 師, 因一日에 到河府한대 府主王常侍가 請師陞座하니라 時에 麻谷出問,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師云,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速道速道하라 麻谷이 拽師下座하고 麻谷이 却坐하니 師近前云, 不審이로다 麻谷이 擬議한대 師亦拽麻谷下座하고 師却坐라 麻谷이 便出去어늘 師便下座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어느 날 하부에 갔다. 부주 왕상시가 법문을 해줄 것을 청하여 법좌에 오르게 됐다. 그때 마곡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大慈大悲한 觀世音菩薩의 千手千眼 중에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중에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그대는 빨리 말하라.” 그러자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법좌에 올랐다. 임제 스님이 마곡 스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니 마곡 스님이 이해를 못해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마곡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법좌에 올랐다. 마곡 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리자 임제 스님도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강의) 이번 법문에서 임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시려고 하는 것은 정안(正眼)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견해냐, 또는 바른 안목이냐 하는 것입니다. 임제록 속 다른 용어로는 진정견해(眞正見解)라고 합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천개의 눈 중에 어떤 것이 바른 눈이냐”는 질문에 임제 스님은 대답 대신 마곡 스님에게 질문을 되돌려줍니다. 여느 스님 같으면 여기에서 꽉 막힐 만도 한데, 마곡 스님은 임제 스님을 법상에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마곡 스님에게 인사를 합니다. 이에 대해 마곡 스님이 잠시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은 다시 마곡 스님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자 마곡 스님은 그대로 나가버립니다.
이 모습을 선어록에서는 빈주호환(賓主互換)이라고 표현합니다. 빈(賓)은 손님이고 주(主)는 주인입니다. 말 그대로 손님과 주인이 자리를 바꾼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손님과 주인이라는 분별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손님이면서 또한 주인입니다. 두 사람 모두 관세음보살이고 또한 바른 안목입니다. 하나의 달이 천강에 비춰도, 달의 本質은 하나의 달 그 自體이듯이 관세음보살이 가진 천개의 눈은 모두가 정안(正眼)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上堂云, 赤肉團上에 有一無位眞人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未證據者는 看看하라 時에 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고 師下禪牀하야 把住云, 道道하라 其僧이 擬議한대 師托開云, 無位眞人이 是什麽乾屎橛고하시고 便歸方丈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말했다. “붉은 고기덩어리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通해 出入을 한다. 이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질문했다. “어떤 것이 無位眞人입니까?” 임제 스님이 法床에서 내려와서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말해봐라, 말해봐. 무위진인이 어떤 것인지 말해봐.”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확 밀쳐버린 뒤 “無位眞人이라고, 이 무슨 똥덩어리 같은 소리야” 하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임제 스님은 말씀에는 꾸밈이나 수식이 별로 없습니다. 단순명료합니다. 본질을 그대로 직시하기 때문입니다. 적육단(赤肉團)은 붉은 고기덩어리라는 뜻인데, 벌거벗은 우리의 몸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붉은 고기덩어리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습니다. 무위진인은 어떤 개념이나 틀로 규정할 수 없는 참사람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얽매임도 없는 대자유인, 대해탈인입니다. ‘金剛經’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法은 定해진 바가 없다’라는 것인데 위없는 지혜, 혹은 깨달음은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無位眞人의 무위(無位)는 이런 뜻입니다. 이 無位眞人은 恒常 면문(面門)으로 出入을 합니다. 面門은 얼굴을 의미하는데 얼굴에는 모든 感覺 器管이 들어있습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 등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를 맡습니다. 이런 感覺器管의 作用 속에 無位眞人이 出入하고 있으니 잘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平常時의 삶이, 그리고 우리 日常의 意識作用이 그대로 眞理라는 意味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위진인이 무엇인지 다시 묻습니다. 답답할 일입니다. 네 스스로가 바로 무위진인이라는데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똥덩어리 같은 놈아”하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똥덩어리 같은 無位眞人을 向해 할(喝)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無位眞人이라고 하니, 이에 대한 執着이 생기는 까닭에 똥덩어리라는 말로 無位眞人에 對한 絶對化를 警戒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시궐(乾屎橛)은 똥덩어리라는 뜻인데, 똥을 닦는 막대라고도 해석합니다. 방장(方丈)은 ‘유마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유마거사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사방이 일장(一丈)에 불과하지만 온 법계가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