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없다(10)-생각과 느낌은 병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8/1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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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覺과 느낌/감정은 병적인 거짓말쟁이들 입니다 |
온 宇宙는 빈틈없는 眞理의 場입니다. 깨닫고 보면 生覺과 感情 느낌도 참된 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을 깨닫기 前의 生覺과 느낌은 우리를 拘束하는 煩惱일 뿐입니다. 生覺과 느낌이 實在한다고 믿고 거기에 意味를 賦與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現象을 判斷하고, 사람을 判斷하고, 삶을 判斷하고, 온 宇宙를 判斷하기 때문입니다. 그 判斷도 그때 그때 變하는 生覺과 느낌에 依持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네 삶이 얼마나 不安定할까요?
事實 이런 不安定한 삶을 돌아볼 여력도 없이 生覺과 느낌에 굴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우연찮게 삶을 돌아볼 機會를 맞이하게 되는 사람은 幸運兒지요. 스스로의 삶이 不安定하고 뭔가 不足하고 허깨비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느낌 중에도 제법 쓸만한 느낌이 든 것입니다. 이 느낌도 역시 느낌이라, 實相을 깨닫고 보면 마음工夫를 촉발할만한 妄想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만요.
보통 우리의 生覺과 期待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을 때, 現實에 問題 提起를 하게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일이 착착 進行되어 살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實體를 돌아볼 機會도 주어지지 않지요. 하지만, 願하는 바와 正 反對의 일이 일어나는 사람, 즉 苦難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공부의 機會가 열린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제가 버릇처럼 말합니다만, '내가 지금 힘들고 괴롭다, 어찌해볼 수 없는 상태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당신 참 福도 많소. 工夫하기 딱 좋네요."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現在의 삶이 不滿足스런 사람이 삶에 問題 提起를 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문제제기를 하겠습니까?
해변가 사상누각에 올라 뜨거운 太陽을 피하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멀지않은 곳에 巨大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삶에 滿足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狀況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폭염에 뜨거운 해변가에서 太陽을 피할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당장 그 해변가를 떠나 다른 곳을 찾아볼 것입니다.
眞實로 거짓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깨달음을 證得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주한 世界의 實相을 보아 本來 아무 일이 없었음을 體得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肉身의 덩어리의 主人에서 온 世界에 遍滿한 스스로를 確認해야 人間으로 태어난 값어치를 하는 것입니다. 世上 온갖 存在 中에 人間만이 깨달음으로 다시 태어날 티켓을 가지고 있답니다. 말을 뒤집어 보면 人間만이 分別妄想에 顚倒된 삶을 살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네요.
우리 마음이 依持하는 生覺과 느낌은 쉽게 스스로 물러나는 法이 없습니다. 마음工夫를 할 때도 生覺과 느낌으로 공부정도를 判斷하려고 합니다. 靈性 書籍을 읽든, 語錄을 읽든 처음에는 生覺으로 헤아려서 깨달으려고 하지요. 또 공부 중 神秘한 能力을 經驗하거나, 마음이 아주 고요해지는 체험을 하고는 공부가 되어가는 줄 알지요.
生覺을 아무리 굴려도 결코 證得될 수 없다는 스스로의 結論이 나와야 生覺이 힘을 잃습니다. 물론 生覺이 잠복해 있으면서 스르륵 發動하곤 합니다만, 처음보다는 많이 힘이 떨어지지요. 生覺을 믿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感情의 問題는 아주 微妙합니다. 공부가 된 사람들은 便安하고 고요한 상태에 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눌러앉으려는 패턴이 발동합니다. 무조건 산란한 것은 좋지 않고 고요해야 공부가 되는 줄 압니다. 人間 內面에 平和에 대한 갈증이 이렇듯 고요한 경계에 대한 執着으로 나타나지요. 그러나 眞正 靈魂이 고요해지기를 바란다면 지금의 便安한 境界에 對한 執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被想的인 便安함이지요. 條件的인 便安함이지요. 眞正한 平和는 便安한 것마저도 내려놓았을 때 根源에서 찾아온답니다. 산란한 경계 가운데서도 미동도 않는 참된 平和가 드러난답니다.
깨달음은 生覺과 느낌 어느 것과도 相關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本性을 確認하는 일이지 本性으로 因해 드러나는 現象이 고요하든 산란하든 어떤 生覺을 하든 그 內容과는 아무 相關이 없지요. 이 모든 것이 本性의 일일뿐입니다. 本性 밖의 生覺과 느낌은 없지만, 어떤 生覺과 特定 느낌이 더 本性에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깨달음은 生覺을 再調整하고 感情을 安定시키는 工夫가 아님을 銘心하십시오. 다만, 지금 이런 저런 生覺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確認하는 일입니다. 지금 不安하고 고요한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確認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確認하고 보면 生覺과 感情 느낌은 힘을 못씁니다. 生覺과 感情이 스스로를 拘束하지 않습니다. 必要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림자(幻影)일 뿐임이 明確해집니다. 生覺과 느낌의 實體性이 사라집니다. 生覺과 느낌에서 自由롭고 싶다면 스스로가 이미 빈틈없이 쓰고 있는 佛性을 確認하면 끝납니다. 『왕자와 거지 』라는 동화에서 진짜 왕자가 나타나자 그동안 온갖 權位를 行使하던 者가 곧바로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거지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本性은 이미 온 宇宙와 萬物에 遍滿하고 두루하기에 바로 이 瞬間 確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確認하려고 고개를 돌릴 必要 조차 없습니다. 눈만 뜨면 온 世上이 本性을 證明하고 있으니까요.
모든 그림이 어디에서 펼쳐지고 있나요? 스스로 살아있음을 어디에서 증명하고 있나요? 선풍기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고 있나요? 글자들이 어디에서 뜻을 얻고 있나요?
곧바로 일어나는 지금 여기. 眞正으로 이뿐입니다. 아주 단순한. |
[출처] 나는없다(10)-생각과 느낌은 병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작성자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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