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는 없다 (8)

장백산-1 2014. 7. 27. 01:59

 

 

 

나는 없다(8)- 이 타고난 지혜가 숨을 쉬게 하고, 피가 온몸을 돌게 합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8/0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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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智慧가 숨을 쉬게 하고, 피가 온몸을 돌게 합니다

 

 

 

 

 

 

 

당신이 實際로 알 수 있는 唯一한 것은

'지금 이 瞬間'의 眞實뿐 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앎보다) 이 더 뿌리깊은 (이 순간의) 앎을 外面하는 한 가지 理由는, 그것이 앎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先入見이나 預斷없이 "지금 여기에" 存在할 때, 왠지 알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每 瞬間 우리는

"지금"이라는 '알지못함'의 場所로 되돌아가며, 바로 그때 지금을 "만나기"위해 앎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금 이 타고난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하고, 피가 온몸을 돌게 하고, 온몸의 細胞가 제 할 일을 하게 합니다. .....

 

여태까지 당신이 가장 지혜로웠던 瞬間은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깨어있을 때였습니다. 지금眞實에 깨어 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明白합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믿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瞬間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前까지는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이 둘은 늘 함께 到着합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나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 당신이 하게 될 말과 행동을 미리 헤아리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 45~47쪽-

 

 

 

 

生覺과 觀念이 가장 影響力을 行使하기 어려운 瞬間이 언제일까요? 바로 지금 이 瞬間입니다.

왜 그럴까요? 生覺과 觀念은 時間이 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이 瞬幹 생생한 삶의 현장에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이 瞬間이기만 하다면

生覺과 觀念의 支配를 거의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質問을 하겠지요.

그럼 意識이 깨어있는 사람은 生覺과 觀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러한 作動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인가요?

 

그렇지는 않지요. 生覺과 觀念은 生覺과 觀念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生覺과 觀念일 뿐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必要에 따라 생각과 관념을 쓰지요. 生覺生覺에 拘束되는

것이 아니라 生覺生覺에서 自由로워져서 生覺生覺을 自在하게 굴리지요.

 

저는 지금 계속 生覺하고 있습니다. 生覺하고 있지만 生覺에서 참뜻을 찾지는 않습니다.

마음工夫란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은 하지만 결코 저는 거기에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本性, 本마음, 法이란 언어는 말을 하건 말을 하지 않건 아무런 相關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을 해야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지 않아야만 保存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瞬間을 예로 들어보죠. 제가 과거 십여년전을 追憶한다고 이 瞬間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瞬間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어나는 것을 바로 본다고 이 瞬間이 더 빛을 발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本來性稟(本性)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지요. 당신이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고 당신 本性도 따라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本性은 本來 태어난 적도 없고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에 어디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實相을 보고 보지 못하고는 지금의 삶의 質을 左右하지요. 煩惱와 苦痛 속에서

있지도 않은 幻影에 놀아나며 사느냐, 幻影을 幻影인줄 알고 眞實속에서 아무 問題없이 스스로

온존하느냐의 차이라고 할까요?

 

여하튼 마음공부에 뜻이 있다면 지금 이 瞬間에 關心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瞬間이 마음공부로들어가는 門이기 때문입니다. 生覺과 觀念의 支配를 좀체 받지 않는 지금 이 瞬間의 門 앞에서 스스로의 性稟을 몰록 確認해야 합니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보고 싶습니다. 그는 늘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기에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의 집 門앞에서 버티고 있어야 언젠가 門이 열리는 사이에 들어갈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이것도 몹쓸 비유네요. 사실 우리는 늘 그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를 떠날 수 없습니다.

짝사랑의 相對는 우리 自身이니까요. 다만 그의 본모습을 正面으로 보지 못하고 그가 입은 옷이나 장식물에 눈길을 두고 있네요. 그것도 알고보면 實際하지 않는 裝飾物에 불과한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으려는 사람이나 重要한 때는 바로 지금 이 瞬間입니다. 체험을 하고도

불만족스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 때는 恒常 生覺, 觀念, 感情 속에 사로잡혔을 때입니다.

生覺과 觀念은 참으로 집요합니다. 그것을 明確히 보지 못하면 그동안의 習慣대로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마음공부에 入門하려는 사람중에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信號입니다. 生覺이 쉬어지고 있다는 證據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本性稟이 드러나지요. 내가 確認하는 게 아니라 本來의 性稟이 드러난다는 게 더 세밀한

표현같습니다. 

 

本性 體驗은 恒常 지금 이 瞬間에 이루어집니다. 生覺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過去를 想像하고 未來를 꿈 꾸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瞬間 生覺에서 벗어나면서 스스로 온 宇宙를 비추는 本來性稟을 보게 됩니다.

 

한번 確認하게 되면 이 자리에 익숙해지는 時間을 가져야 힘이 생깁니다. 本性을 確認했다고

일이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로 妄想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일은 어떠한 判斷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무엇도 같이 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확인하고 보면 깨달은 나, 체험한 나, 일을 마친 나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일에는 어떠한 것도 닿을 수 없어서 나라는 物件은 물론 깨달음이라는 것, 온 宇宙 森羅萬象을 다 녹여버립니다.

있는 그대로이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오로지 唯一한 사랑이며 이 하나의 빛만이 스스로 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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