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없다(24)-"개인의지는 열린 가슴과 열린 마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9/11 07:46 http://blog.naver.com/mongza04/130175947850 많은 이들이 열린 마음, 擴大된 마음을 經驗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生覺 너머를 보기 때문에 生覺에 의해서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습니다. 또 열린 가슴, 擴大된 가슴을 經驗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가슴이 擴大된 상태에서는 感情에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정서 상태에 의해서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지요. 또한 意志의 擴大를 경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 自身의 意志는 더 이상 存在하지 않고 擴大된 意志, 神의 意志가 그 자리를 代身하게 되지요. 한편 意識의 擴大가 意志의 擴大를 包含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매우 賢明하고 慈悲로울 수 있지만 오로지 自身들이 願하는 것을 얻은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게 합니다. 대단한 지혜와 자비심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신이 이 쇼의 主人公이 되고자 하는 峽小한 個人 意志를 지닐 수가 있지요. 이런 個人意志는 심지어 열린 가슴과 열린 마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과 마음의 확대를 경험하면서도 의지는 아직 확대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존재의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면서도 왜 그런 경험이 곧잘 사라져버리는지 의아해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내맡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확대가 어느 깊이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말이죠. 마음이 확대되어 있다면 정서 상태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 意志가 사라지고 神의 意志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個人의 欲望은 더 이상 問題가 되지 않습니다. -94~95쪽- 처으로음 本性을 體驗하고 나서 사람마다 보이는 傾向도 多樣합니다. 사람들의 氣質이나 觀点, 因緣에 따라 크게 確大되는 경우도 있고 이제야 겨우 알아챈 水準의 確認이어서 많은 問題가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本性에 대한 체험은 스스로에게서 늘 變함없는 如如한 性稟이 確認되었느냐에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이것은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어서 내가 意識을 하든 하지 않든 똑같습니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을 다 비추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체험의 깊이가 다르고 수용하는 정도가 다르며 공부가 나아가는 시간도 다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의 공부를 자신의 공부의 기준으로 삼으면 곤란합니다. 길들여진 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공부길에서 밖에서 들어오는 공부의 가르침이나 말씀들은 모두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自身의 正體를 보는 工夫입니다. 自身의 正體를 뿌리깊이 보고나면 宇宙의 正體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공부입니다. 제가 체험을 했을 때는 위의 세가지 경우에서 마음이 擴大된 경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기서 비롯된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意志의 擴大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슴이 확 열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체험한 것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기도 하고,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하여튼 '내가'라는 주어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만이 유일해야 하는데 이것이 나의 소유물이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의 意志를 가지고 깨달음을 재단하려는 속성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는 둥 깨달음을 規定하려는, 손안에 넣으려는 습성이 발동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결코 깨달음은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 손안에 잡히는 듯하는 순간 바로 妄想에 떨어진 것입니다. 나쁜 분별의 버릇이 깨달음이라는 포장을 하고 드러난 것입니다. 깨달음은 規定할 수 없고 손에 넣을 수 없지만 사라지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늘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스스로의 性稟(自性)이 손에 잡힌단 말입니까? 손에 잡힌다고 하는 게 이것인데요. 事實 個人은 存在하지 않습니다. 個人 意志라는 것도 神의 意志로서 드러나는 것이죠. 그렇게 포장되어서 개인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貌樣에 속고, 包裝에 속는 人生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속고 살아왔기에 이것을 탓할 것도 못되지요. 바로 보면 됩니다. 체험 이후의 혼란과 불안, 여러가지 안정되지 못한 현상에 대해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 확인한 자리가 분명하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꾸준함과 솔직함, 용기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견뎌내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스스로가 어떤 分別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명확하게 들여다보는 것만이 해탈의 길입니다. 명확하게 보면 사라집니다. 흐릿하게 보거나 회피한다면 언제나 그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슴과 마음의 擴大를 경험하면서도 意志는 아직 擴大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존재의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면서도 왜 그런 경험이 곧잘 사라져버리는지 의아해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내맡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확대가 어느 깊이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말이죠. 아직도 스스로가 내맡기지 못함을 알고 억지로 내맡기려해서도 곤란합니다. 이 工夫는 努力의 工夫가 아닙니다. 개인 의지의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방해가 되면 될뿐이지요. 깨달음의 공부입니다. 나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명확히 보아야만 진정으로 내맡길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달음 뒤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놓아짐이 아니고는 모든 것이 有爲의 行일 뿐입니다. 造作일 뿐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바른 공부에 대한 꾸준한 안내를 받으면서 무언가를 이루고 붙잡고 얻는 쪽이 아니라 내려놓고 비워지는 쪽으로 方向을 둔다면 일은 自然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工夫가 저절로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공부가 활짝 열리기 전까지는 구름덮힌 하늘 아래를 걷는 듯 막막함과 두려움이 몰려올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보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순간 더이상 걸어갈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이미 完璧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가 온 世上에 두루함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푹 젖어서 더욱더 무르익을 일만 남았음이 분명해집니다. 아무 할 일이 없게 됩니다. 꺼릴 일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드러나는 모양이 그 모양을 버리지 않은 채로 모두 眞實임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보십시오. 스스로를 확인하셨다면 거기에 머물면서 비워지기만을 기다리십시오. 나머지 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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