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는 없다 (22)

장백산-1 2014. 7. 31. 23:25

 

나는없다(22)-"진실에 한번 맛들인 후에는 그것이 무엇을 집어삼킬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9/0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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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에고라고 부르는 貪欲과 抵抗이 取하는 모습 중 하나는 全部 아니면 全無라는 思考方式입니다.

탐욕과 저항인 에고가 삶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試圖하는 方法 중 하나는 絶對的인 結論을 내리는 것입니다....

全部 아니면 全無라는 思考方式은  全 地球人의 共通分母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는 그 경험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 당신은 삶이라는 것이 좋은 일과 궂은 일이 갈마드는 現場임을 보기 시작합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도 다소 좋은 점이 있고, 일자리를 얻어도 다소 나쁜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消息 중에도 좋은 消息이 따르고, 反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全切 眞實을 보는 것은 이런 兩極端 式 思考가 주는 弊害를 除去해줍니다....

 

어떤 결론을 둘러싸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더 큰 眞實을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苦痛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으로 意識의 範圍가 좁아질 때마다 당신은 苦痛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내리는 결론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에 相關없이, 당신이 意識하지 못하는 程度가 곧 당신 苦痛의 程度를 決定할 것입니다.

 

당신 自身이 驚異로운 存在라는 결론조차도 고통과 수고와 갈등의 장소가 됩니다. 자신은 세상에 보내진 신의 선물이라 결론 내렸다 해도 당신은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세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일단 당신이 自身의 삶의 "모든" 經驗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그러니까 眞實 쪽으로 향하면, 당신은 거짓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眞實만이 滿足을 줄 수 있는 唯一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번 맛을 들인 후에는 그것이 무엇을 집어삼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삶의 智慧가 생깁니다. 自性에 對한 體驗이 없을 때라도 수많은 삶의 經驗이 쌓이면 

어떤 일도 그 일마다 좋은 점과 나쁜 점 兩面을 다 갖추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 )란 말을 쓰지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새옹지마니 눈앞에

벌어지는 결과만을 가지고 너무 연연해하지 말아라.' 하는 뜻이죠. 이런 生活의 智慧가 생기면 일어나는 일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모양에 매인 일이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일을 統制하려는 습관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可能하면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心理말입니다.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요? 제 1 번은 바로 자기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에게 확대되지요.

 

경계에 아주 밀착되어 있을 때의 주인도  이 '나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경계에서 조금더 떨어져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때도 역시 주인은 이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式으로는 煩惱에서 根本的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問題의 根源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限, 生死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허둥대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해볼 수 없습니다.

 

 

煩惱에서 解脫하는 것이 깨달음의 큰 效驗이긴 하지만, 이것이 全部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는 完全하게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번뇌를 다스려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實相을 明確히 보고 나면 煩惱는 自然스럽게 떨어져 나가는게 順序입니다.

 

에고는 分別的 思考의 所産입니다. 드러나는 모양따라 나눔에서 생겨난 '나라는 存在'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라고 여기는 것은 生覺의 産物이지 生覺 以前의 根源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生覺의 産物을 '나'라고 믿고 實在한다고 여기며 없는 나에 拘束되어 있습니다. '나'가 생기면서

煩惱도 따라 일어나지요. 나에게 유익한 것, 나에게 해로운 것, 나에게 즐거운 것, 나에게 슬픈 것, 나에게 옳은 것,

 나에게 옳지 않은 것...... 등등 分別하여 取하고 버리느라 바쁘지요.

 

이 '나라는 것'이 實在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여러가지 煩惱에서 단박에 벗어나는 길이지, 하나하나 번뇌를 제거해나가는 심리치료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것'이 實在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나'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生覺을 가지고 生覺의 産物을 다룬다면 生覺 속에서 헤맬 뿐입니다.  이 '나'가 '나'가 아님을 깨닫는 것은,

實在가 드러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일어나는 現象을 相對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는 에고를 相對하는 것도 아닌,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스스로를 보면 될 일입니다. 진짜 왕자가 나타나면 거지 왕자는 왕자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참나가 드러나면 가짜 나인 '에고'는 주인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참나가 드러나면, 모든 드러나는 形像들은 참나의 投影일 뿐임을 明確히 알아 거기에 속지 않게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일의 行路나 結果에 注目한다면 벌써 生覺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보십시오. 그곳은 場所도, 時間도 없습니다.

 

삶의 어떤 經驗을 할 때 그 經驗을 따라가지 말고  그냥 지켜보십시오.

그 經驗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經驗들이 어디에서 發現되고 있습니까?

 

모든 일이 지금 여기를 떠나있지 않고 떠날 수도 없으며 지금 여기의 표현일 뿐입니다.

모양은 가지각색이며, 감정도 갖가지이지만, 恒常 똑같은 일입니다.

 

經驗을 할 때 經驗을 보지 말고 經驗하는 스스로를 볼 것이며,

결론을 내릴 때 결론을 보지 말고 결론을 내리는 스스로를 보십시오.

 

24시간 물샐 틈 없이 이 일일 뿐입니다.

이 일로서 웃고

이 일로서 울지요.

 

다른 일이어서 웃고

다른 일어어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이 일로서 답답하고

이 일로서 시원하지요.

 

다른 일이어서 답답하고

다른 일이어서  시원한 게 아닙니다.

 

이 일이어서 神이라 말할 수 있지

다른 神이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도 이 일일 뿐이며

하산을 하여 집안에서 편안히 쉬고 있어도 이 일일 뿐입니다.

 

방거사가 말했습니다.

"나의 神通力과 妙用은 어떤 것이냐 하면

물이나 길고 땔나무나 나르면서 그저 이럴 뿐."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이 일을 모른다면,

우리는 분열과 방황 속에 한 세상을 마감할 것입니다.

 

무엇이 이 일입니까? 묻는다면,

"분열과 방황이요."하겠습니다.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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