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常을 아는 智慧

장백산-1 2014. 8. 4. 13:27

 

 

無常을 아는 智慧

無常


닙바나(涅槃)를 除外한 現象인 마음과 물질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물질은 원인이 발생할 때마다 存在 속으로 들어옵니다.

存在 속으로 들어온 다음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들 마음과 물질이라는 現象은 無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봄'을 예로 들어 봅시다. 처음에는 '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건강하고, 對相이 나타나고, 빛이 있고, 그 對相에 注目한다면,

만약 이 네 가지 原因이 同時에 발생한다면, '봄'이 있게 됩니다.

 

일단 '봄'이 나타난 다음에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봄'이 없습니다. 그래서 '봄'은

無常하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봄'이 無常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주 쉽지는 않습니다.

 

'들음'은 '봄'보다 理解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들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가 건강하고, 소리가 나타나고, 장애물이 없으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만약 이 네 가지 要因들이 同時에 발생한다면, '들음'이 있게 됩니다.

 

'들음'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들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들음'은 無常하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내가 말하는 소리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의 소리를 들은 다음에 다음 소리를 듣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들은 다음에 소리는 사라집니다. 자, '소리, 소리,

소리'를 들으셨지요?

내가 '소'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소'를 듣고, 그 다음에 더 이상 '소'는 없습니다.

내가 '리'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리'를 듣고, 그 다음에 '리'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이 어떻게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心理-物理學的  現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왔다가는 사라집니다.

 

봄, 들음, 냄새 맡음, 맛봄, 감촉함, 생각함, 구부림, 뻗음, 움직임 - 모두

나타났다는 사라집니다. 그것들이 계속 사라지기 때문에 無常하다고 합니다.


이들 중 生覺함/意識의 사라짐은 아주 明白합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생각/마음의식이 妄想한다면, 妄想을 注視하십시오. 注視하면 妄想하는 생각/마음/의식은 더 이상 存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라집니다.

妄想하는 生覺/마음/意識은 前에는 存在하지 않았습니다. 妄想은 바로 그 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注視되자마자 바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無常하다고 합니다.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도 명백합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 꺼짐을 계속 注視하고 있을 때, 몸 어디에선가 피로나 뜨거움이나

통증이 나타납니다. 수행자가 그것에 의식을 집중하여 '피로함, 피로함' 등을 注視하면,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고, 때로는 적어도 注視하고 있는 동안만 사라집니다. 그래서 無常합니다.

 

수행자는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注視하기 때문에 그것의 無常한 屬性을 體驗합니다.


이 事物과 마음의 無常한 本性/本來性稟을 體驗하는 것이 無常을 洞察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經驗으로부터 옵니다. 개인적인 체험 없이 단순한 熟考에 의해 아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닙니다.

 

冥想하지 않고는 무엇이 생겨났다가 무엇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책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德行(meritorious deed)은 될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위빠싸나 지혜는 아닙니다.


眞正한 위빠싸나 智慧는 事物과 마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명상함에 의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중 많은 수행자들이 이 지혜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 제자 40명 혹은 50명만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수백 명이 경험했습니다.

 

초보자는 아직 그런 명백한 지혜를 획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가르쳐 준 대로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여러분들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습니다.

 

학위나 명예나 명성도 모두 열심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위빠싸나 지혜도 열심히 노력해야 얻어집니다.


集中力이 날카로워짐에 따라, 수행자는 팔다리를 굽히거나 뻗는 단 한 번의 動作에서도

여러 개의 生覺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구부리거나 뻗으려는 意圖를 가지고 있을 때,

여러 개의 生覺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한 번 깜빡일 때에도 수많은 生覺이 떠오릅니다.

수행자는 이 모든 無常한 生覺들이 일어날 때마다 注視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단지 '알고 있음(aware), 알고 있음'을 注視하십시오. 수행자가 '알고 있음'을 注視할 때마다 넷, 다섯 혹은 열 개의 生覺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앎(awareness)이 충분히 민첩하게 되면 '알고 있음'이라는 말조차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단지 그 生覺들을 지성(intellect)으로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지금 하나의 生覺이 일어나고, 지금 마음/의식이 그것을 압니다.

지금 다른 生覺이 일어나고 지켜보는 마음/意識이 그것을 압니다.

그것은 '밥 한 숟갈에 반찬 한 젓가락'이라는 속담과 같습니다.

 

每 生覺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아는 지켜보는 관찰자의 마음/意識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 때, 이러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生覺들은 수행자에게 분명히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보고 있을 때

일어나는 妄想하는 마음은 지켜보는 意識에 감지됩니다.

이는 마치 동물이 덫에 걸리는 것과 같고,

정확하게 겨냥되어 날아간 돌에 목표물이 맞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수행자가 妄想하는 마음을 알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마치 그 마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압니다. 수행자는 그렇게 意識이 일어날 때마다 압니다.


피로함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피로함을 注視하면 사라집니다. 다시 나타나면 다시 注視하고 다시 사라집니다. 이런 종류의 사라짐이 더 높은 상태의 위빠싸나에서 더욱더 명백해 집니다. 피로하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피로하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하나씩하나씩 사라집니다.

 

하나의 피로와 다음 피로 사이에는 아무런 聯關이 없습니다. 통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아프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매 注視마다 각 통증이 사라집니다. 하나의 통증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습니다.

각 통증은 다른 것과 分離되어 있습니다.


보통사람에게는 피로나 통증이 持續的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피로나 통증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오랫동안 지속되는 피로나 통증은 없습니다.

 

하나의 피로와 다음의 피로, 하나의 통증과 다음의 통증은, 단지 아주 짧은 조각들,

아주 分離된 것들입니다. 수행자는 注視함에 따라 이것을 보게 됩니다.


수행자가 배가 일어남을 注視할 때, 일어남이 서서히 나타나고, 서서히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꺼짐을 注視할 때, 꺼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이 事實을 모르는 보통사람들은 일어남과 꺼짐을 배의 우수꽝스러운 모습이라고 生覺합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수행자들도 또한 우수꽝스러운 배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효과에 대해서 트집을 잡기도 합니다. 추측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해 보고 스스로 느껴보라고 경고합시다. 충분히 열심히 노력한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가 구부림을 注視하면, 어떻게 움직이고 사라지는가, 움직이고 사라지는가,

하나가 움직이고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움직이고 사라지는지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제 '마음과 物質이라는 現象은 한 場所에서 다른 場所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경전에서 말한 것을 이해합니다. 보통사람들은 구부리기 전의 팔과 같은 팔이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같은 팔이 안 쪽에서 바깥 쪽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바뀌지 않는 팔입니다. 왜냐하면 事物이 聯續하여 發生하는 方式인

事物의 聯續性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洞察하는 智慧가 없기 때문입니다. 無常은 持續性 뒤에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冥想하지 않기 때문에 숨어 있습니다.

 

淸淨道論은 말합니다.

'일어나고 꺼지는 現象을 注視하지 않기 때문에, 無常의 特性은, 聯續性 뒤에 숨어 있는 限,

드러나지 않는다.'  (Vis., xxi, Path of Purity, 781)


수행자가 일어나는 現象마다 注視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精神的 物質的인 現象들은

수행자게 分離되어서, 分離되지 않은 全切가 아닌 부서진 조각들로 나타납니다.

 

여러 마리의 개미가 가는 것을 멀리서 보면 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事物의 現象을 부서진 조각들로 보기 때문에 聯續性이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無常한 特性이 수행자 앞에 自身을 드러냅니다. 그는 더 이상 幻想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어남과 꺼짐이 터득되고 聯續性이 破壞되었을 때,

無常이 自身의 固有한 特性을 드러낸다.'  (같은 책)


이것이 冥想을 해서 無常을 洞察하는 智慧를 얻는 방법입니다.

冥想하지 않는 單純한 熟考는 이 지혜를 생기게 하지 못합니다.

일단 이 지혜를 얻게 되면 苦痛과 無我의 智慧도 따라 옵니다.


'메기야여(Meghiya), 無常을 안 사람에게는 無我에 대한 自覺도 確立된다.'
(A. iii, 169)


수행자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잘 아는 것을,

어떻게 自己自身이며 에고이고 存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自己自身이 일생동안 계속해서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自己自身에게 執着합니다.

 

일단 자신의 경험으로 人生이란 持續的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象들로

構成되어 있는 幻影일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 지면, 자기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이 경이 메기야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보디(Sambodhi)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無常을 自覺한 사람은 無娥에 대한 自覺도 確立된다.' (A. iii, 165)


나아가서, 無常을 체험한 사람은 苦痛도 체험합니다. 어떻게 마음과 事物이 생겼다가

사라지는지를 체험한 수행자는, 이 두 사건, 일어남과 사라짐이 어떻게 자신을 짓눌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보디 경의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無常의 特性을 알게 되면, 無我의 特性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無常, 苦, 無我 중의 한 가지를 알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無常의 特性 하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