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부르면 "예'하고 즉시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 참나다

장백산-1 2014. 8. 5. 20:19

 

 

 

 

                    부르면 “예!”하고 즉시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영원한 나를 찾아서

                    유당 |2014.08.05. 11:52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4361 

 

 

 

 

 

한 눈에 깨우치는 밝고 밝은 法門

 

 

衆生의 世界는 淸淨한 佛菩薩의 世界와는 달리 밝음과 어둠이 함께 共存한다.

중생의 세계는 福이 얇은 세계인지라 生存을 위해 어디를 막론하고 智略와 術手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心地가 맑지 못한 權謨術手 같은 교활한 二重性은 輪廻를 거듭하며 빛과 소리에

물이든 表面意識에서 主로 造作되는 生覺이라는 에너지 덩어리인 思念體들이다.

 

 

이런 思念體들은 빛처럼 밝은 나의 本來意識,本來性稟을 어둡게 가리는 黑幕과도 같다.

外部 事物에 너무 醉하여 本性/本來意識의 밝음이 사라지면 이런 흑막 같은 思念體들의 氣運이

내 本來意識의 主人으로 자리잡아 不斷히 執着心과 迷惑의 業에너지/行爲에너지를 만들어간다.

 

 

허나  眞正한 참나인 本來意識는 붓다의 거룩한 本來意識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참나의 本質은 無限한 光明을 지녔다고 經典은 말하고 있다. 우리들 마음/의식 속에 녹아있는 어둠의 그림자 ,卽 수시로 달라지는 感情과 氣分, 家風, 내력, 習性, 知識, 才能, 過去의 傷處나 追憶 같은 온갖 記憶들은 하나같이 내 本來의 맑은  性稟과는 크게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本來性稟은 언제나 感情이 없는 텅~빈 거울처럼 또릿또릿한 感覺 그 自體인데 이것은 선과 악을 生覺하거나 區分하기 以前의 본래바탕이다. 비유하면 한 올의 感情 없이 事物을 無心으로 비추는 太陽의 빛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輪廻로 받는 몸의 生滅과도 關係없이 永遠한 하나의 生命力으로 이어져 時空의

制約을 받지 않고 솜털만한 증감(增減)도 없이 無量劫을 持續한다고 경전은 말해주고 있다.

 

煙氣는 사라져도 煙氣를 피워대는 굴뚝은 그대로 남아있듯이 우리 內面의 生覺은 生滅에 바탕을

두고 數時로 無常하게 바람처럼 들락거리지만 生覺을 創造하고 지우는 이 마음의 본바탕은 永劫의

生命力을 지닌 채로 자리를 바꾸지 않고 宇宙가 사라져도 그 生命에너지는 變動이 없다고 붓다의 경전은 심도 있게 가르치고 있다.

 

살아서도 꿈을 꾸지만 肉身이 없는 死後의 魂靈도 生前에 지은 業과 自身의 習性을 通해

思念놀이 演劇놀이를 계속하며 생생히 꿈을 꾼다고 경전은 또 다른 깊음을 말해준다.

 

永遠토록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이 本來의 意識/性稟을 참다운 나/참나라고 부를 수 있다.

本來意識/참나를 가리켜 자성(自性),  主人公, 속사람, 觀察者, 注視者, 원신(元神), 불성(佛性), 本來性稟/本性, 참마음, 맨 意識, 天然意識, 純粹意識, 영대(靈臺), 법성(法性), 바탕마음, 

본체(本體), 自由意志, 本來面目, 마음의 根本자리 등으로 이름 지어 부른다.

 

우리의  本來意識은 神通하기 짝이 없는 永劫不變의 天然感覺으로써 모든 生命體가

나눠질 수 없는 本來意識 이것으로 하나의 큰 틀, 하나의 큰 바탕을 이루어 함께 하나로 

連結되어 있다. 法性은 하나로 融合되어 있다는 法性偈의 짧은 句節도 바로 이를 설명함이다.

 

좀 더 具體的으로 설명하면 우리의 根本마음은 옷 입고 밥 먹을 줄 아는 살아있는 意識 그 自體다. 말은 意識이라는 하나의 單語로 單純히 表現되지만 그 살아있는 意識의 作用과  變化는 實로 無窮하여 그 깊이는 누구도 가볍게 測量할 수 없다.

 

살아 있는 意識은 밝게 쓸 때는 太陽과 같고 어둡게 쓸 때는 漆黑과도 같다.

작게 쓸 때는 먼지나 좁쌀과 같고 크게 쓸 때는 大洋이나 虛空과도 같다.

 

비었다고  生覺하면 形體가 없는 眞空이지만 꽉차있다고 生覺하면 世上 宇宙를 다 품어도 여전히 비어있을 만큼 廣闊하다. 내 안의 모든 思念을 만들고 부수는 그 當體이다.  意識의 本來바탕은

原來부터 二元性의 南女도 없고 老少도 없으며 形質이 텅~비었음으로 貌樣도 색깔도 없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그런 形體가 아니기에 大小長短처럼 定해진 規模도 있을

턱이 없다. 本性의 自由性은 時代나 地域도 相關이 없으며, 無數히 흘러간 過去도 瞬息間에

비춰내고, 아무리 먼 곳도 刹那에 오고 간다. 누구라도 이 안에서는 古今을 하나로 慣通하고,

거리도 전혀 相關없는 놀라운 大神通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本來意識은 이처럼 自由自在性이

넘쳐나 그 動態는 홀연히 오고 가는 바람같기도 하며, 몸 안에 作用하여 四枝  動作을 取할 때는

 一種의 血流나 氣流와도 같고, 思念을 퍼내 쓸 때는 固定된 틀이 없음으로 天地四方으로

확 터진 虛空과도 같다.

 

흔히 精神自體로 認定하는 이런 思念의 틀을 마음의 本體라고도 하는데 이 思念의 바탕,

마음의 本體은 거룩한 부처라고 해서 그 思念의 틀이 더 밝거나 크지도 않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해서 그 틀이 더 어둡거나 작지도 않다. 形質에 拘碍를 받지 않아 몸이 태어난다고 해서 새로 生기는 것도 아니며 肉身이 무너질 때 조차도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思念의 틀, 마음의 本體는 온종일 四大로 構成된 肉身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 當體로써, 또렷한 知覺作用을 보면 짐짓 靈魂이라고 잘못 錯覺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本質은 가을하늘처럼 더없이 淸淨한지라 業力과 習性이 그대로 녹아있는 中陰神이나 靈魂과는 그 槪念自體가 完全히 다르다.

 

 

또  意識의 本質은 경전에 말한 대로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며(不垢不淨),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不生不滅),

어디에 묶이듯 部分으로 存在함도 아니기에 안도 밖도 없고 따라서 中間도 없다.

意識의 本質은 人生과 宇宙 全切를 한 보자기로 能히 包容하고도 남아 

存在界 全切가 알고 보면 바로 내 意識의 몸통이요,

내 意識이 投映한 하나의 畵幅에 다름 아니다.

 

事實  비치고 보이는 그 무엇도 내 意識의 投映인 投影物이 아닌 게 없다.

意識의 바탕本質이 이와 같음으로 邊두리에 머물 듯 어디로 가고 오거나 머무는

그런 矮小한 對相이 아니다.

 

生覺을 만들어내는 根本 틀/바탕, 이 法性의 正體를 더욱 쉽게 말하면

一生토록 한 瞬間의 感覺機能도 놓치거나 버리지 않는 내 內面의 實際的인 참~主人이다.

 

이것이 바로 心臟을 뛰게 만드는 生命의 本質로써 平所에 보고, 듣고, 말하고, 수작하는 에너지가 모두 여기에서 우러나온다. 더 쉽게 말하면 부르면 “예!”하고 즉시 對答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思念 以前의 純粹 淸淨한 내 本來의 感覺體로서 모든 生命體가 함께 지닌

意識의 基本 틀이며 始作과 終末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바탕意識인 것이다.

 

儒敎에서는 이 바탕意識을 허령(虛靈)이라고도 하고 虛靈者心, 영대(靈臺)라고도 하며,

禪宗에서는 이를 참마음, 맨 의식, 심왕(心王), 참性稟, 불성(佛性), 관찰자(觀察者),

무위진인(無爲眞人), 명상좌(明上座), 金剛座 등으로도 불러왔다.

 

붓다의  經典에서는 법성(法性), 진성(眞性),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道家에서는 원신(元神), 천군(天君)이라고 불렀다.

基督敎에서는 속사람, 영성(靈性), 신성(神性), 더러는

信仰的인 觀念으로 尊嚴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魂으로 生覺하는 경우도 있다.

 

옛 사람도 말했다. “고요할 때는 性稟이고 움직일 때는 마음이다”(聖稟性 魔音心)이라고.

잠잠할 때는 性稟 그대로의 모습이라 적연(寂然)한 沈默 그 自體지만, 일단 에너지를 일으켜

思念이 作用할 때는 크고 작은 모든 智慧와 知識과 感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양태(樣態)를 알 수 없는 무수히 多樣한 作用으로 萬事萬物을 干涉하고 주무른다.

이  意識자리는 사실 거룩한 자리라고 할 것도 없다. 왜?

텅~빈 거울이 對相가 전혀 없는 것처럼 너무 虛虛롭기 때문이다.(廓然無性)(虛虛空空性)

 

 

바로 인생/삶과 萬物이 여기서 出現 始作됨으로 格을 賦與하면 最上의 存在로 認識되는 造物主

또는 唯一神과도 같은 하나님 또는 眞理의 本質인 붓다의 法身(法身佛) 等으로 尊貴한 觀念을

만들어 生覺할 수도 있다. 참으로 妙한 事實은 우리의 法性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없는

神靈함 그 自體인데, 肉體를 아무리 千갈래 萬갈래로 精巧하게 解部해도 그 원핵(元核), 참나로

불리는 이 性稟의 正體는 결코 보이지도 않거니와 찾아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醫學이나

科學이 엿볼 수 없는 限界이며 眞理 本質의 그 神靈한 秘密이다.

 

 

우리들 意識의 이 萬能的인 感覺性은 父母로부터 태어나기 以前이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누구도 始作을 알 수 없는 옛적으로부터(無始以來) 天然스럽게 具備되어 있어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귀를 막아도 들을 수 있으니 思念의 소리 없는 作用은 참으로 神奇하고 신기한 그 무엇이다.

 

 

휴정스님의 선가귀감에도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이를 傳하겠는가?”라는

서두의 표현도 意識의 神秘性을 가리키는 그 말에 다름 아니다.

 

원효스님도 강조한 바가 있다. 知覺의 自由性으로 말하면 여기에 뭘 더 보태거나 여기에 무엇을

더 뺄 수 없는 그야말로 全能한 感覺 그 自體라고 말이다. 다라니를 통해서 깊은 삼매에 들거나

선정을 잘 닦아서 性稟이 크게 맑아지면 如來의 特別한 能力처럼 신변자재(神變自在)한

기적의 육통(六通)도 저절로  發現된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凡夫가 평소 제 마음이라고 固執하는 그 日常의 生覺이나 마음들은 알고 보면 거울에 때가

낄 대로 낀 이른 바 광겁(曠劫)을 통해 汚染된 迷惑한 生覺과 妄想의 集合體에 다름 아니다.

위에 이미 밝힌 대로 우리의 本性은 永劫을 하나로 通해있고 육통(六通)을 두루 갖춘 온전함 그

自體라지만 無量劫의 輪廻를 通하여 다져진 業의 때인 汚染된 迷惑한 生覺과 妄想의 集合體는 

本來性稟의 自由自在性을 完全히 등진 墮落한 마음이 굳게 造成되어 시시각각 흔들리는 感情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그 어둠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不完全함 그 子體이다.

 

그래서 붓다와 달리 중생의 本來性稟의 밝음이 사라진 理由는 물들대로 물든 貪欲과 感情 爲主의 성냄과 배움에 인색한 어리석음의 망습(妄習, 妄寧된 習性)을 제 살림, 제 마음으로 錯覺하고 살기 때문이다.

 

解脫을 위해서는 반드시 닦음을 必要로 하는 우리의 이런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가볍게

흔들림으로 重要한 約束에는 契約書와 도장이 필요할 만큼 촌각도 그  混亂한 思念을

서로 간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本來  凡夫들의 生覺이란 浮虛한  生滅性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時間만 지나면 이 思念에너지

덩어리는 狀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突變할 수 있다. 般若心經의 한 토막 설명에도 

生命體의 모든 思念作用 또한 虛妄하기 짝이 없다는 말도 바로 이 뜻이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통상 수행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숨이 한번 나갔다가 들어올 그 찰나 사이에도 벌써

內面 意識은 便히 쉬지 못하고 또 다른 方向으로 고개를 틀어 색다른 자리를 向해 두리번거린다.

마음의 변덕성이 이처럼 搖動을 치니 눈을 감으나 뜨나 온갖 뜨거운 煩惱가 머리 안을 제멋대로

휘젖는 것은 아주 必然的이요 自然스러운 現象이다.

 

이 쉴 새 없이 헐떡거리는 떠돌이 意識을 萬年不動의 意識처럼 고요하고 安定되게, 매우 平和롭고 또 힘차게 만드는 特別한 訓練方法이 바로 經典에서 말해지는 사마타의 큰 修行法이다.

 

허나 제 아무리 道를 깊이 通達하고 最上의 意識의 集中과 寂滅을 온전히 이뤘다 할 지라도

意識의 本質만큼은 다함없는 活動性 그 自體라서 生覺은 여전히 쉬지않고 부단히 全 方位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금 움직이는 思念을 바른 길로 引導하는 깊은 修行 ,卽 思念을 觀照함과 같은

마음챙김이라는 위빠사나 수행을 이어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卽 集中과 觀察이라는 이 兩大 修行으로 마음을 닦는 자세가 圓滿해지면

意識의 基本바탕이 湖水처럼 맑아져 매우 智慧롭고, 매우 慈悲롭고, 意識을 虛空처럼 텅~비우는

막강한 힘도 생겨서, 삶이 보다 安穩하고 어떤 內面의 感情도 能히 다스리는 超人的인 能力을

自然스럽게 구사하거나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本來가 선인선과(善人善果)요, 악인악과(惡人惡果)라는 경전의 가르침은 바꿀 수 없는 眞理

自體라서 來生은 차치하고 죽음이 닥치기도 前에도 벌써  天上界나 地獄界라는 苦痛스런 조짐은

마음 한복판에서 正確히 일어나기 始作한다.

 

世俗的인  位上이 아무리 크고 높아도 內面의 本來性稟이 病들면 한낱 有名한 바보로서

겉만 요란한 졸렬한 凡夫에 지나지 않는다.

 

經典에서는 生死를 返復하는 意識狀態 卽, 輪廻를 整理하지 못하는 마음의 苦痛을 가장 큰 災殃

으로 여긴다. 붓다의 모든 修行法은 바로 輪廻苦의 빠른 淸算에 그 中心的인 비중을 맞추고 있다.

 

경전에도 밝고 臨終時에 當當하게 往生極樂의 奇蹟을 보여준 중국의 큰 선지식 철오선사의 말씀에 의하면 “마음을 잘못 써서 한 번 惡道에 빠지면 그 苦痛이 五千劫을 持續한다”고 하였다. 生覺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거의  無量劫에 가깝도록 내 魂을 참혹하게 짓이기는 이런 윤전고(輪轉苦, 윤회하며 받는 고통)

를 깔끔히 終了하는 붓다의 큰 修行法을 놔두고 또 무슨  修行法을 찾아서 넋이 빠진 듯

이리저리 헤맨단 말인가?

 

 

- 담허대사의 <三界를 벗어나는 最上의 解脫法>(如是娥聞)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