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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수행의 차이, 발원 기도 성취의 원리

장백산-1 2014. 8. 9. 21:54

[일요법회 녹취] 3월 23일 일요법회

 

기도와 기도 성취의 원리   영상법문 녹취록         

                                                        

첨부파일 3월 23일 일요법회- 기도와 기도성취의 원리(법상스님).hwp

 

 百年貪物日朝盡  三日修心千年寶

 

네, 날씨가 이제 완전히 봄이 된 것 같습니다. 아주 나들이하기 좋은 날인데, 나들이 대신 법당으로 

나들이를 이렇게 와주셨네요. 많은 분들이 質問하는 것들 중에 祈禱에 대한, 집에서 어떻게 祈禱하면 

좋을지 또  祈禱가 무엇이고, 또 修行이 무엇인지, 기도하면 정말 이루어지는 건지, 그리고 또 기도

하는 것은 祈福的인 것이라서 修行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祈禱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 아닌지,

뭐 이런 관련된 질문들을 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祈禱(기도)와 修行(수행)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보면 

기도와 수행에 대해서 좀 어떨 때는 그 의미를 重複的 사용하기도 하고요, 기도와 수행에 대한 어떤 

명확한 뭐랄까 구분점이 좀 모호한 모습도 보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수행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면 祈禱는 말 그대로 빌 기(祈)자에 빌 도(禱)자를 써서 비는 겁니다.

비는 것. 즉, 내 마음이 願하는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佛菩薩(불보살)님께 바라면서 그것

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을 기도라고 하죠.

 

그런가하면 修行은 닦아가는 行爲죠. 닦아가는(修) 行, 스스로 마음(心)을 닦아 내는 겁니다. 즉, 祈禱는 

쉽게 말해서 기도는 뭔가가 이루어지도록 外部에 있는 불보살님을 依持해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하

祈福的으로 비는 거라, 마음이 뭔가 願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비는 거라면, 修行은 오히려 마음을 닦

아가는 行爲인데, 修行은 다시 말하면 外部를 向해서 뭔가를 이루겠다라고 뭔가를 바라는 것이라기보

다는 오히려 내 마음을 淸淨히 하고, 내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래서 작은 어떤 이런 것들을 비는 이런 

의미가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淨化 이런 行爲들을 修行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佛敎에서 말하는 祈禱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所願, 보통 所願이 있고, 發願이 있는

데요,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는 발원이 있어야 됩니다. 發願이 있는 祈禱를 불교에서 기도라고 하지 

個人的인 부귀영화를 바라는 所願기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個人的인 소원, 나라는 것 즉, 我相과 我執을 充足시키기 위해서 個人的인 所望을 

얻겠다 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祈福이겠죠. 福을 그냥 求하고자 바라기만 하는 생각 마음 의식의 

行爲, 활동, 작용일 겁니다.

 

그런데 佛敎에서 말하는 祈禱는 어떤 利他的인 마음의 願力이 바탕이 되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적인 所願은 말 그대로 個人的인, ‘나와 내 가족과 우리집이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所願

이라고 한다면, 佛敎에서의 祈禱는 利他的인 發願이 담긴 마음의 行爲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뿐만이 

아니라 一切 衆生이 함께 잘되기를 願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기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타적인 발원이 담긴 기도가 이루어지는 目的이 나만 잘 살고 잘 먹는 目的이 아니라,

利他的으로 一切 衆生을 救濟(구제)하겠다고 하는, 내 이웃들과 모든 사람들을 돕겠다고 하는 그 同體

大悲心, 大慈大悲心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이타적인 마음바탕 속에서 ‘이러한 일을 成就하고 싶

습니다 이러한 일을 成就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비는 행위, 불보살님들의 어떤 加被力, 가지력(加持力)

에 依持해서 비는 행위, 이걸 이제 불교의 기도라고 하죠.

 

그래서 이기적인 기도, 어떤 비는 所願이 이루어질 때는 내 個人만 좋을 수 있죠. 그런데 根源에서 봐

서는 個人에게 좋지 않을 수 있는 것이,내 個人은 돈을 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 좋겠지만,

個人的으로 그렇게 많이 이루어지는 것이 根源에서 봤을 때는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보통 個人的인 成功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좀 더 교만하거나  남들을 무시하거나 이런 마음들이 깔려 

있게 되죠. 그러나 그 成功은 根源에서 본다면 成功이 아니라 오히려 失敗이고, 개인적으로 나는 성공

했지만 마음 속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남들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演習이 되는 거죠. 남을 얕잡아보는 마음, 남들 업신여기는 마음이 마음 속에서 演習이 되

어서 다음 生에는 本人이 낮은 천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個人的인 그 成功은 事實은 成功이 아니라, 이번 생, 잠깐 눈에 보이는 반짝하는 이 世上 

삶에서만 成功으로 보일 뿐이죠. 그래서 佛敎에서 말하는 祈禱는 '利他的인 願力이 바탕이 되서 비는 

생각 마음의 행위'을 기도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個人的인 所願, ‘자식 대학 붙게 해주세요, 남편 진급하게 해주세요’ 이런 願들이 所願이

라면, 利他的인 發願이 담긴 祈禱 즉, 남편이 진급을 해서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아주 

아름다운 지혜로운 영향력을 미쳐서 보다 많은 사람을 幸福으로 이끌고, 慈悲롭게 만들고, 智慧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파(傳播)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 그것이 利他的인 祈禱입니다.

 

‘내 자식이 대학을 붙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대학을 붙음으로 因해서 더 많은 사람

에게 福과 智慧를 傳하기를 發願합니다.’하는 이것이 이제 이타적인 기도를 하는 마음이죠. 개인적인 

소원은, 아무리 불보살님께 개인적인 소원을 아무리 얘기해 봐도本人이 過去 前生에 미리 베풀어 놓았던, 

미리 지어놨던 福을 끌어다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자신이 지어논 福德의 限度 내에서만 

그 果報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내가 福 지은 게 없는 사람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겠죠. 혹은 과거

에 복 지은 것이 전혀 없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그 기도하는 마음이 

現實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지은 福을 내가 미리 땡겨와서 받는 것에 불과한 거죠.

 

그런데 利他的인 願力이 담긴 祈禱의 特徵은 뭐냐 하면, 나만 잘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一切衆生이 

다 함께 잘되고자 하는 마음을, 그런 이타적인 마음이 담긴 발원을 일으킨 마음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

미 지어논 개인의 복력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닙니다. 이타적인 마음이 담긴 발원의 기도는 나와 네가 둘

이 아닌 '하나'인 同體, 그야말로 툭~ 트인 마음이기 때문에 宇宙法界에 충만하게 가득한 本來 圓滿具足

한 無限한 慈悲와 無限한 智慧와 無限한 힘, 無限한 能力 그런 모든 것들을 그냥 가져다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無量大福을 가져다 쓰는 겁니다.

 

내 個人에게 가지고 있는 福은 小少한 個人이 지은 福에 불과하지만, 나라는 틀, 我相, Ego만 내려놓게 

되면, 너와 나라는 一切의 分別心만 내려놓게 되면, 本來의 우리라는 存在는 宇宙法界에 充滿하고 가득

한 無量大福을 언제나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存在란 말이죠.

 

그래서 利他的인 마음이 실린 發願 祈禱는 그러한 無量大福을 끌어와서 쓰는 生覺 마음의 行爲이기 때

문에 私事로운 個人의 福을 가져다 쓰는 그런 마음의 行爲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큰, 아무리 

큰 願力이라 할지라도 그런 願力을 세웠을 때는 이루어져요. 근데 願力이 아니라 個人的인 欲望心이었

을 때는 그게 어지간해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상 말한 바와 같이 보통 우리가 祈禱와 修行을 이렇게 生覺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수행만 중요하고

기도는 중요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죠. 보통 우리 나라의 어떤 신행의 패턴이랄까, 그러니까 기도수행

의 패턴을 보면 절에 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修行을 하려고 절에 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보통 처음에 절에 오게 된 계기도, 뭐 자식 수능합격 기도를 하려고 처음 절에 왔던가, 남편 진급 기도를 

하려고 처음 절에 왔던가, 또는 본인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해내기 위한 방법으로, 너무 힘

드니까 의지할 데 없어서 절에 와서 부처님께 의지하면서 기도를 시작했던가, 혹은 부모님이나 누가 돌

아가셔서 영가천도 기도를 함으로써, 49제를 함으로써 因緣이 됐던가, 이런 식으로 처음에 주로 신도님

들이 절과 因緣이 되는 것은 祈福的인 目的에서 因緣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기복적으로 그렇게 빌기만 하면 안 돼요’하면서 내칠 것이냐, 절에서...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분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되는지를 잘 가르쳐 드리고 잘 이끌어 드림으로써

個人的인 어떤 구복(求福)이 利他的인 願力으로 바뀔 수 있게 도와드리고, 그래서 利他的인 마음이 

담긴 發願의 祈禱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나면, 그 기도가 처음에는 個人的인 利己心에서 始作되었다가,

나중에 점차적으로 利他的인 願力으로 바뀌어 가면서 또 기도하는 방법을 이제 배운단 말이에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다 보면, 처음에는 ‘해 주세요, 해주세요, 해주세요’ 하는 이런 기도만 계속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내내, 절하는 내내 1배하면서 ‘남편 잘되게 해주세요’ 다음 절하면서 ‘아들 

잘 되게 해주세요’ ‘딸 잘 되게 해주시고, 딸 중학교 합격하게 해주시고, 고등학교도 무슨 명문 고등학

교 합격하게 해주시고, 대학교는 어디 가게 해주시고, 대학원은 어디로 가서 취직은 어디 하게 해주시

고‘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사돈의 팔촌까지 한 명 한 명 다 생각해 가면서 다 그래야지만 될 것 같아서, 한참 기도하고 

나가다가 들어오시는 분도 봤어요. ^^“기도하고 나가다가 왜 들어오시느냐”고 했더니 “아까 기도했는

데 빼먹은 게 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다시 들어와 가지고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절하면

서, 빼먹은 기도를 다 채우고서야 집에 가신단 말이죠.

 

그러니까 처음엔 이런 기도를 始作합니다. 이런 기도를 시작하다가 나중에 이제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

게 되요. 그 방법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하나 다 나열해야지만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祈禱의 原理를 알게 되면 그제서야 眞正한 祈禱란 個人的인 祈福 祈禱가 아니라

는 事實을 알게 됩니다.

 

願力을 세워서 願하는 것이 이루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만, 事實은 기도를 하겠다는 마음을 낼 때 

이미 벌써 내 마음에 어떤 願力이 있는지를 宇宙, 法界, 진리의세계가 나보다 더 잘 압니다. 그러니까 

世上에 하나하나 바라는 마음을 나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요.

 

근데 중생심에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게 있지 않을까요?’ 라며 疑心을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있을

지언정 宇宙, 法界, 부처님, 하나님께서 모르는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내 말로 다 해야 되겠다’ 

하는 사람에게 이제 發願文을 쓰게 하죠.

 

기도를 할 때, 특별히 내가 100일기도나 삼칠일 기도를 할 때는 발원문을 씁니다. 발원문을 만약에 

쓰기가 어렵다면, 보통 평소에 하는 발원문을 갖다 놓고 발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밑에 한 줄, 

두 줄, 세 줄 더 쓰는 겁니다. 내 개인의 발원을. 그래서 전체 발원을 읽고 나서, 내 개인의 발원을 

말씀을 드리는 거죠. 그렇게 발원문을 쓴 다음에 기도 시작할 때 한 번 읽고, 기도를 끝날 때 한 번 

읽고 그러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간에는 구구절절 하나하나 ‘이거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저거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하면 안된다. 왜 안 되냐 하면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 理由가 있습니다. 사실은 원하

는 생각 마음은, 마음을 집중하는 기도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이 宇宙의 法則입니다. 마음을 

集中하면서 마음을 내면 그 마음은 반드시 現實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근데 우리는 너무 많은 마음을 내죠. 너무 수만가지 마음을 내다보니까 이 마음 생각 에너지의 힘이 

分散이 된단 말이에요. 하루에도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가지 生覺 마음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니까

이렇게 생각 마음의 에너지가 制限되고 分散이 되니까 기도라는 그 생각 마음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두 가지로 分別하는 생각 마음으을 일으킨다는 거죠.

 

마음 한 편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 부자가 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자꾸 부자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냄으로서, 꺼꾸로 가난과 결핍의 마음을 자꾸 演習하는, 부자와 가난함 양쪽으로 같

이 마음의 연습을 하니까 그게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죠.

 

어떤 것을 원하는 바가 있는데, 그 원하는 바에 집착을 하게 됨으로서 집착을 하면 ‘이게 안 되면 어쩌

지’ 하는 두려움의 마음을 마음 속에서 演習하게 되고, 두려워하는 것은 지속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까 집착하는 것은 한쪽으로는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거꾸로 이루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마음을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낼 때 한 가지로 집중되지 않고, 양 극단으로 마음이 분산이 되니까 플러스 

오십으로 마음을 냈는데 마이너스 오십으로 또 다른 마음을 또 일으킨단 말이죠. 연습되는 마음은 

다른 거니까 이게 제로(ㅇ)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원하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 마음이 많아지고 의도하는 바가 많아지니까 생각 마음의 에너지가 分散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생각을 고요히 하고, 잠시 기도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처음에 발원문 한 번 독송하고, 기도하는 중간에는 생각을 탁! 내려놓고 기도하는 그 주

제에만 정신을 집중을 한단 말이죠.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 念佛을 한다' 그러면 온갖 雜念과 分別 煩惱 妄想을 탁! 내려놓고 관세음보살 

염불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정신을 집중을 하고, 금강경 독송에만 정신을 집중을 

하고, 절 수행에만 정신을 집중을 한단 말이죠. 절에만 정신을 집중을 하고...그렇게 마음을 集中을 하

면서 모든 잡념과 망상 번뇌를 내려놓고 탁 기도만 한단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많이 봤죠. 기도를 하려고 시작했지만 기도를 올바른 방법으로 하게 되면 저절

앞뒤에 발원은 할지언정 기도하는 사이에는 생각과 번뇌를 내려놓고 온전히 수행을 하게 되는 겁

니다. 그러니까 祈禱으로 始作했지만 結果的으로는 修行을 하게 되는 겁니다. 뭔가 마음을 내서 ‘이

루어지게 해주세요, 해주세요’ 하는 기복적인 기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온전한 기도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간에는 모든 생각 마음을 내려놓고, 번뇌, 망상을 내려놓고, 온전히 그 기도 자체

에만 생각 마음 정신을 집중하는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생각 마음 정신이 고~요해집니다. 막 번잡했

던 생각 마음이 고요해져요. 그렇게 고요해진 마음상태에서 이제 발원문을 마지막으로 읽는 겁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 읽는 발원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끝날 때 발원문을 탁 읽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고요하고 텅~빈 마음 속에서 그 발원하는 바가 탁 일으켜지니까 거기 마음 에너지가 집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고요한 텅~빈 마음속에서 일으킨 한 生覺, 한마음은 强力한 힘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고요히 기도를 하고, 기도 끝에 내가 원하는 바를 탁!  말씀드립니다.

 

근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많은 기도하는 분들이 조금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고, 잘못 알고 있다

기보다는 지금 그것이 오해가 되어서 많은 분들이 기도의 효과를 좀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기도하면 첫 번째로 떠올리는 게 뭐냐 하면, ‘기도할 때 어떻게 하냐’ 물어보면 간절

하게 해야 된다, ‘간~절한 기도를 해야 된다’ 이렇게 지금까지 배워왔잖아요. 근데 뭐랄까, 좀 쉬운 말

로 하면, 기도는 너무 간절하게 하면 안 됩니다. 설렁 설렁 해야 돼요. 대충 대충 해야 됩니다.

 

저, 누구예요? 저 노래하는 박진영 무슨 오디션 프로 하는 심사위원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노래는 대충대충 불러야 된다.”고 그랬다는데, 기도도 좀 대충대충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건 뭐 精誠스러운 마음을 다 내려놓고 하라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말은 내가 마음에서 精誠스럽게 기도하라는 얘기예요. 精誠스런 마음으로, 純粹한 마음으

로, 텅~빈 淸淨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하라는 얘기지, 그게 ‘간절하다’라는 것이 우리는 잘못 오해가 

되어서 個人的인 어떤 所願을 간~절하게 비는 것, 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陷井이 뭐냐 하면, 

그 간절한 기도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간절한 기도 그  裏面에는 많은 사람들이 個人的인 欲望과 

我相을, 我相에 執着하는, 그러니까 欲望과 我相에 執着하는 생각 마음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의 기도

라고 錯覺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간절하게 원하거든요. 자식이 대학 붙기를 간절하게 원한단 말이에요. 근데 이 간절하게 원했을 

때,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졌을 때 이게 이제 집착이 된단 말이죠. 집착이 되니까, 겉에 드러난 모습은 

간절함인데, 그 간절함 이면에 너무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지니까 간절한 마음 이게 執着心이 되는 겁

니다.


分明하고 確實한 理致는 執着하는 생각 마음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執着한다는 마음 그 自體

가 그 執着하는 마음이 현실로 안 이루어지게 하는 방향으로 힘을 쓰고 있는 거예요. 表面意識, 껍질의

식 생각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바로 밑의 意識 생각 마음 바로 밑의 의식 마음 생각으로 들어가면 

執着하는 마음 그게  마음이 원하는 것이 現實로 안 되는 方向으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너무 간절하게 바라면 恒常 두려움이 생기거든요. 근심, 걱정이 생기고 막 불안불안합니다.

반드시 돼야 된다는 生覺 마음 의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러 합니다. 

근데 ‘돼도 좋고, 안 되도 좋다’는 생각 마음 의식이 있으면 恒常 생각 마음 의식에 여유가 있죠.

근데 반드시 되야만 된다는 생각 마음 의식이 있으면 이제 생각 마음 의식이 막 두근두근 거립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행사를, 큰 행사를 하나 계획을 하는 게 있었어요.

큰 행사를 계획했는데, 이것이 어떤 큰스님께서 오케이 해주면 이제 되는 거예요.

만사 오케이, 순탄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이 분이 안 된다고 하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근데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저는 반드시 돼야 된다는, 행사에 대한 執着이 있었던 거죠.

그 스님을 만나러 가면서 너무 막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안된다면 어쩌지, 어쩌지....'

생각해보면 돼도 되고, 안 돼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저는 그걸 반드시 돼야 된다고

너무 간절히 생각하다보니까, 그 스님을 만나러 갈 때 가기 전 날부터 막 떨려 가지고

‘이 스님이 안 된다면 어쩌나’ 걱정이 되가지고 막 그러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야, 이 분이 어떻게 나를 맞아주실까’부터 막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법당에서 이런 저런 큰 행사를 한다,

이런 저런 큰 어떤 일을 한다, 그래서 어떤 큰스님을 모시거나 어떤 누구를 모시고 해야 된다

그러더라도 마음을 아예 텅~비우고 시작을 합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이 스님을 모셨는데 이 스님이 된다고 그럴 수도 있고, 안 된다 할 수도 있다.

또 이분에게 ‘우리 불사를 하는데 불사비를 좀 보태주십시오’ 했는데

그 스님이 보태주실 수도 있고, 안 보태주실 수도 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근데 가만히 生覺해보면 모든 일들이 되도 되고, 안 되도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되도 괜찮고, 저런 방식으로 되도 괜찮습니다. 사실은 반드시 되어야 되는 게 없어요.

이 세상에는 되도 되고 안 되도 되는 일 투성이에요.

반드시 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의 執着이고 我執일 뿐인 거지요.

 

그러니까 되도 되고, 안 되도 된다는 마음으로 가면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떨 게 하나도 없게 돼요.

걱정될 게 하나도 없고. ‘해주시면 고맙고, 안 해주시면 말고’니까. 그러니까 그 분을 만나러 가도...

 

여러분, 저기 제가 모 법당에 있을 때, 제가 그때 20대밖에 안됐을 때인데,

어떤 분이 저한테 막 과도하게 너무 심각하게, 과도하게 겸손하시면서

당신들을 너무 낮추면서 너무 과도하게 겸손하게 저한테 막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이상한 겁니다. 너무 과도하게 이러시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분들이 당신들이 어디 저기 구석에 있는 쪼만한 大隊 하나, 대대 하나인데,

그 대대의 兵使들이 法堂에 나가봐야 한 이삼십 명 나가고 있었는데,

두 개 세 개 대대가 모였으면 괜찮은데, 한 개 대대가 몇 명 나오지도 않는데,

거기에 그 당시 오억 짜리, 사단 법당보다 더 큰 오억 짜리 절을 짓겠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당신들이 알아서 후원받아가지고 다 짓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억 짜리 그 엄청나게, 그 당시는 대개 큰 거였어요.

큰 거를 어떻게 어떻게 짓고 해서 계획을 다 세워가지고

대대장, 연대장님한테 다 얘기 해가지고 다 했더라고요.

 

제가 딱 갔는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큰 법당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이분들 자체가 조금 돈을 모아놓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해서

조금 갸우뚱한 거예요. 그래서 이분들에 대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주변 계시는 분들에게 알아봤더니

이분들이...그런 분들이 계셔요. 안 그럴 것 같지만. 절 지어준다고 그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문적인 그 뭐랍니까. 브로커 비슷해가지고 여기저기서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군소 종단이나 돈이 좀 있는 이런 스님들한테 찾아다니면서 돈을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신도님들한테 돈을 달라고 그러고..

그래서 실제는 오억, 십억 이상을 받아가지고 실제 2억짜리 절을 지어준다든가

이런 방식으로 하는 분으로 유명한, 종단에서 요주의 인물로 꼽혀 있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저한테 과도하게 겸손하게 막 그러면서 막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나중에 이분들이 막 밤늦게까지 찾아와도  제가 안 된다고 했더니만

저한테 뭐 큰 소리를 막 치면서 어떻게 이렇게... 하여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내면서

그렇게 막 큰소리로 윽박질러 가면서 협박하듯이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휘관분들도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여기는 이렇게 까지 큰 법당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제가 별도로 해가지고 거기에 맞는 딱 맞는 법당을 만들어 드렸고, 그렇게 해

줬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처럼 뭔가 내가 ‘반드시 이것이어야 된다’라는 어떤 개인적인, 사적인 어떤 

망이 들어가면 그것을 위해서 뭐라도 합니다. 어떻게든 하려고. 의외로 그런 분들이 불교계에 더

러 더러 계시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보니까 더러 더러 계셔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분들이 계시는구나.’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이런 마음을 내고 사신다는 게 얼마나 참...

부처님을 팔아서 장사하는 일인데, 이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찌되었든 그분들을 보면서, 그분들은 어떤 하나를 딱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과도하게 매진을 

합니다. 근데 그렇게 과도하게 집착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그리고 걱정스럽고 떨리고, 그러

면 생각 마음 의식이 조마조마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진짜 眞正한 간절한 기도가 되려

어떤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냐 하면요, 이 기도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던 ‘모든 것은 진리대

로 흐른다.’ 라는 법화경에서 말하는 諸法實相의 이치, '모든 것은 인연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완전히 마음을 우주법계에 내맡길 줄 아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타적인 생각 마음 의식이 없는 기도라는 게 뭐냐 하면, 나라는 我相이 없는 眞正한 기도

거든요. ‘나라는 我相이 없다’ 라는 말은 나를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일체중생을 위해서 하는 

기도 아니겠어요? 그런데 스님들도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사회복지 하는 사람들도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남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그 마음 때문에 거기 집착하는 생각 마음 

의식을 正當化해요.

 

‘나는 이거 내가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옳아’라고 마음이 과도하게 집착을 합니다. ‘옳다’

라는 生覺 마음 의식 때문에 옳으면 집착해도 되느냐?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아도 그

것을 하는 방식이 잘못됐으면, 방식이 집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옳은 일을 하더라도 옳은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害하면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옳고 그른 일이 固定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定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옳은 일이야’ 라는 것은 자신의 오만이고, 만용에 불과해요. 아무리 옳은 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틀리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냥 포기할 줄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러셨거든요. 당신이 한 세 번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한다면 그러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부처님과도 같은 온전한 지혜가 있는 분들도 그렇게 내버려두실 진데, 집착하지 않고 놔두는데, 내가 얼

마나 부처님보다 위대하고 대단해서 그것을 끝까지 기어이 관철해야 된다고 執着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바탕이 있느냐 하면, 내가 간절하게 발원하고 기도할지언정

그 내가 원하는, 발원하는 마음 생각 의식에는 나라는 것,我相이 介入된 것이거든요.

 

그런데 宇宙法界는, 부처님께서는 뭐를 보셨습니까?

내가 生覺하는 내 個人的인 觀点이 더 智慧롭겠어요 宇宙法界가 보는 관점이 더 지혜롭겠어요?

‘우주법계에서, 부처님께서 나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원력이 담긴 기도를 할지언정 그게 안 된다 할지라도 괜찮다.

‘돼도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걸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하지만 안 돼도 괜찮다. ‘아, 이것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 안 되는 것처럼 겉모습을 보일 뿐이겠구나.’ 이생만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 이 현실만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사실은 지금 안 될 것 같지만,  ‘아..그때 그렇게 됐으면 큰일 날 뻔 했네’ 하는 일

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까지를 다 보지 못하고 살거든요.

근데 宇宙法界가 諸法實相이라는 法界의 理致는 宇宙法界는 그 모든 것을 確然하게 본단 말이죠.

그래서 時空을 超越해서 多次元的으로 理解하고 알고있단 말입니다.

나의 삶,, 현실, 세상을 모든 것들을 이 宇宙歷史를 다 理解하고 알고있단 말이죠 宇宙法界는...

 

 

 

 

그래서 宇宙法界에서는 나를 眞正으로 더 크게 위하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안 되게 해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사실까지를 완전히 믿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맡길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어떤 我相을 내려놓는 利他的인 祈禱예요.

 

그 利他的인 마음이 담긴 祈禱 發願이 어떻게 執着할 수 있겠어요?

나를 위하는 게 아니고 利他的인 것인데, 眞正으로 利他하는 存在는 누구겠어요?

宇宙法界고, 法身부처님 法身佛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방식이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걸 따르겠다는 생각 마음 의식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어떤 이타적인 발원은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건 돼도 되고, 안 돼도 됩니다.

만약에 이건 돼도 되고, 안 돼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돼야만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필히 이타적

인 발원이 아닙니다. 個人的인 所願에 불과한 것이지. 利他的인 發願은 반드시 돼야 되는 게 없어요.

 

부처님의 삶을 보면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교화를 하지만 돼도 되고 안 돼도 되요.

인연 따라 하는 것이지 거기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물으셨어요. 이것과 비슷한 얘기라서 같이 제가 얘기를 하면요,

“일요일 저녁에 TV프로그램에서 보험사기극을 보았습니다. 영아를 입양하여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하

여 병들게 하고, 죽음까지 몰아간 모정은 저를 더욱 분노케 하였습니다. 어떻게 극악무도한 이들을 이

해해야 할까요?”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정말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런 생각만 하더라도 내 마음이 오염되는 것 같아서 정말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이런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이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요, 우리가 과도하게 이 사람을 막 이해하려고 하거나

과도하게 이런 어떤 상황에 몰입되어 가지고 이 사람을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고 세상을 원망하거나 한탄하거나 이럴 필요는 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한둘이면 그 사람을 어떻게든 많은 사람이 모아서 탁 바꾸면 좋겠죠.

근데 이 세상을 뒤져보고, 뒤져보고 신문을 찾아보면 정말 이것보다 더한 무지막지한 나쁜 사람들이

신문지상에 끊임없이 등장을 하고, 역사 속에 엄청나게 많이 있었습니다.

自己 個人의 利益하나를 위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일들은 너무나도 多盤事로 있었어요.

 

이 사람은 그 애기 하나 入養해가지고 그 애기를 어떻게 잘못 병들게, 아프게 해서

자기가 돈 벌어 먹는 거 아니겠어요? 톡 까놓고 얘기하면 이 사람은 한 명을 이렇게 괴롭힌 거잖아요?

그런데 인류역사 속에는 본인 한 명이 이익을 얻고자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이런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그 모든 죄악들, 모든 이런 나쁜 것들을 다 끄집어내서 내가 그걸로 인해서 계속해서 

마음이 아파지고그래야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게 되면 내 마음이 온전히 수행이 되어서 온전히 중심 잡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共鳴을 합니다.  에너지 波動이 이렇게 重疊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두 개의 물결 波動이 하나로 합쳐지면 波動이 합쳐지면서

중간에서 重疊이 되는 새로운 波動이 더 크게 일어나듯이

내 마음이, 이런 않좋은 現象들을 아파하는 마음 에너지 波動들이 계속해서 重疊이 되면

마음 아파하는 내 마음의 파동이 이러한 않좋은 波長과 感應을 한단 말이에요. 共鳴을 한단 말이에요.

가슴 아픈 마음의 에너지 波動이 共鳴을 하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의 에너지 波動, 波長 自體가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 에너지 波動으로 자꾸 닮아가기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責任感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책임을 져야 된다’라는 말은 내가 무엇을 볼 것인지, 내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내 스스로 책임을 져야 됩니다. 내 마음 의식 생각이 보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現實이 되니까. 내 마음 의식 생각이 집중하는 마음 생각 의식이 나의 現實을 끌어오는 창조의 에너지

로 다가옵니다. 좋은 생각 마음 의식에 집중하든 나쁜 생각 마음 의식에 집중하든 집중하는 생각/마음

/의식은 現實로 이루어집니다.그러니까 이것을 통해서 가슴 아픈 마음에 집중하게 되면, 그 가슴 아픈...

물론 이것은 상대를 變化시키겠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된다는 건 아니에요. 變化시켜야죠, 變化할 

수 있을 만큼 最大한 變化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걸 變化시키는 데 마음/의식/생각 에너지를 직접 투여하기 보다는 마음 속으로

辱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증오하는데  마음에너지를 투여하느라고 내 마음을 오히려 손상시키고 

그들을 眞正으로 變化시키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내 눈 앞에 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이 사람을 어떻게든 쉽게 말해 한 대 때리고 싶고, 이러고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이에요. 그럼 이 

사람이 한 대 맞았다. 그럼 이 사람이 반성을 더 잘하겠습니까? 絶對로 反省 더 안하죠.

 

憎惡心을 가지고 나를 變化시키려 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를 변화시키려 해도 나는 진정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조차 사실은 우리가 이런 사람의 이 죄조차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사람,

이 사람도 어린아이 때부터 그런 나쁜 사람이었겠어요?

 

살아오면서 오죽 돈이 없고, 오죽 가난하고 오죽 안 좋은 것들을 많이 봐오면서 안 좋은 것들을 자꾸 

가슴에 담고 그리 살다보니까 그들과 共鳴이 되어서, 이 사람 마음이 그와같이 汚染됐다는 것이 얼마

나 안쓰럽고 측은하고, 그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어쩌면 이 수억겁 속에서 그 사람이 수억겁 전에 내 

자식이었을 수 있죠. 근데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했는데, 그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무조건 욕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을 辱하는 마음 代身 辱하는데 쓰는 생각/마음/의식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이런 마음을 가진 이 세상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여기

에 더 집중을 해야겠지죠.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들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을 어디 가서 만날 겁니까. 주소 찾아가서 

만나지겠습니까? 이 세상의 이런 나쁜 사람들을 다 찾아가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世上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일일이 찾아가서 世上 사람들을 다 바꿀 수 없어요.

우리는 나와 因緣 맺은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에게 어느 날 찾아와서 맨날 힘들다, 괴롭다, 막 징징 

짜던 내 친구, 너무 심하게 그러니까 이제는 귀찮아가지고 내가 안 만나주는 그 사람, 그 사람을 

한 번 더 만나서 그 사람을 따뜻하게 다독거려주고 하는 마음이 이 증오심을 오히려 자비와 사랑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방출시키는 아름다운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나쁜, 안 좋은 것들을 

보고나서 아주 안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하나의 그 안좋은 마음을 演習하는 것이 돼요. 그래서 그 

안좋은 마음/생각/의식을  現實化시키는 어떤 창조적인 에너지가 됩니다. 안좋은 삶을 만들어내는...

 

그러니까 기도뿐 아니라 우리가 마음 내는 것을, 어떻게 마음을 내야 되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마음을 내듯이, 고요한 가운데서 마음을 내어야 하고,

안 좋은 마음 쪽으로 자꾸 미운 욕을 하고, ‘바꿔야 돼, 바꿔야 돼’ 하면서 막 안 좋게 얘기하는 마음도

오히려 안 좋은 마음 쪽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더 크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로운 기도와 마음 내는 방법은, 내가 나쁜 것을 욕을 열 번 하는것보다 차라리 그 

分野에서내가 조금 더 좋은 부분을 당장 하나라도 더 실천하고, 더 좋은 방향을 살펴보고 더 관찰하고,

더 관찰하고 지켜보고 그런 관찰자의 생각/마음/의식이 더욱더 아름답겠죠.

 

그러나 이런 안좋은 사람들을 無條件 外面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내 앞에 있다’ 그러면 내 아픈 마음, 힘든 마음을 깨어 있는 의식/생각/마음에서

觀察者 의식/생각/마음이 되어 分明히 지켜보면서, 주시하면서, 관찰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생각/마음/의식을 일으켜서 기도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겠죠.

 

 

 

제가 어제랑 그저께랑 연이어 이틀간 어찌어찌 알게 된 분들이 돌아가셔가지고 시다림을, 기도를 하고 

왔는데요, 이렇게 시다림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인데, 어떤 장례식장에 가면 정말 이 분이 돌아가시는 

이유 자체도 좀 힘들게, 아주 힘들게  사시다가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시게 됐거나 혹은 또 그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주 좀 힘들게, 힘들게 하면서 보냈거나 이럴 경우에 아주 많이 침체되어 있습니다. 

분위기 자체가 아주 침체되어 있고, 뭔가 모르게 기도하고 나서도 저부터도 마음이 참 힘들고 이런 

느낌들을 받을 때가 있는데,

 

또 어떤 장레식장에 가면요, 분명히 이분이 돌아가셨는데,  好喪이라고  할수 있겠죠. 또 그뿐 아니라 

살아 있는 분들이 智慧를  가지고 계신 분들, 이런 분들은 돌아가신 분을 마음속으로, 이렇게 마음속

으로 아쉬워하고 가슴아파하고 이럴 수 있겠지만, 뭐랄까...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자식들이 이제 장례를 치르는데, 삼박사일, 삼일 내내 엉엉 엉엉 울고, 삼일 내내 

그냥 침체된 분위기에서만 있어야 되는 걸로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렇게 해야지만 잘하는 행동처럼 생각하니까 主로 어른들이 애들이 막 웃고 이러면 이빨을 

꽉 물고 “이빨 보이지마!” 이러더라고요. “이빨 보이지마, 웃지 마!!” 이러고^^ 본인들도 웃긴 일 있

어도 안 웃어요. 기어이.

 

그런데 이것은 사실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智慧로운 葬禮文化라고 할 수 없어요. 儒敎的인 觀念이 

많이 내려오다 보니까 유교에서는 자꾸 울어서 영가님을 보내지 말아야 되거든요. 여기 남게 해야

돼요. 남게 하려면 내가 슬픈 척을 해야 영가가 나에게 執着해서 가슴 아파서 못가거든요. 자꾸 붙

잡아 놓기 위해서 엉엉 우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目的이 영가를 보내는 거거든요. 보내드려야 돼요. 지혜롭게 잘 보내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영가님이 어떻게 하면 가겠어요? 내가 펑펑 울고 있으면 執着이 돼서 못갑니다. 영가님에게 ‘내

가 당신에게 집착을 탁 떼겠습니다.’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당신이 미워서가 아니라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온전히 아름다운 곳으로 가시도록 해주기 위한 방법은 제가 당신에게 執着을 탁 떼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이生에 대한 執着을 여의십시오. 떨구십시오. 저에 대한 執着, 자식에 대한 

執着, 손자에 대한 執着 다 내려놓으세요. 저희는 저희가 알아서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저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執着을 부디 내려놓으십시오.’ 하고 마음속에서 자꾸 마음을 내어 드려

야 돼요.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웃고, 즐겁게, 즐겁게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당신은 참 살아생전에 이

러이러한 좋은 일이 있으셨고, 당신 살아생전에 이런 것 때문에 내가 많이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깨달

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지언정.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요, 정말 그 아드님, 손자, 손녀, 며느리 이 사람들이 장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독실한 불자집안이었었거든요. 정말 장례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막 비참한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뭔가 모르게 참 和氣愛愛하고 막 그렇다고 웃고 떠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에너지가 이렇게 

밝은, 밝은 에너지...저도 또 기도하면서 참 마음이 가볍고, 기쁘고  기도하면서 참 기분 좋게 했던 

기억이 있는 곳들이 있단 말이죠.

 

그것처럼 우리가 어떤 波動하는 에너지, 어떤 波動하는 波長, 어떤 마음에너지 波動으로 모든 하루

하루 삶에 臨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그런 비슷한 波動의 波長을 우리에게 계속 끌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간절하게 기도를 뭔가 간절하게 원해야지만 기도가 아니고 하루하루 어떤 마음

에너지의 波動으로 사는지 우리 가족이 우리 집에서 나날이 뭔가 좀 웃음꽃이 피는지,

 

그러니까 어...이런 게 있죠. 누가 봐도 이거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狀況인데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집이 있죠. 자식들이 초등학생들, 중학생들이 너무나 즐겁게 뛰어놀고  막 소리 지르고 막 장난치고, 

초등학생들은 뭐든지 다 신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뭐 놀이공원을 가든, 어딜 가든 전부 다 신기하니까 

막타고, 매달리고, 막만지고 지저분한 것도 모르잖아요. 分別心이 없으니까, 道人들이니까. 分別心이 

없으니 막 만지고, 막 입에도 넣고 막 뛰어다니고 하잖아요 어느 누구의 눈치도 않보면서 천진난만하게...

 

그 행동들은 있는 그대로 봤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場面입니까. 아이들이 健康하다는 사실이고,

이 즐거운 날, 즐거운 오후에 와서 아름답게 뛰어놀고, 그 뛰어놀고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모습들이

얼마나 정말 극락세계를 연상시킵니까. 근데 그 아름다운 場面을 우리 부모님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地獄으로 바꿔 버립니다. (법당은 웃음바다~)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막 그냥 욕을 욕을 해가

면서 “거기 먼지 묻는다, 여기 이거 하면 안 된다, 이거 만지면 안 되고,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면 

안 된다” 하면서 그 아이의, 물론 식당같이 남들에게 피해주고 이런 것에 대해서는 탁 막을 필요는 

있겠죠.

 

근데 굳이 남들에게 피해주지도 않는데도 ‘너희들이 땍땍거리는 소리에 내가 시끄럽다’ 이것 때문에 

화를 낸다면 그것은 그 아이들의 그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내가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에 地獄으로 

바꿔버리는 것과 똑같거든요.

 

우리는 마음만 활짝 열고 있으면 그 모든 일이 다 된다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마음이 열렸을 때는 아이들이 막 떠들고 할 때, 함께 재밌잖아요.

그런데 내 마음이 닫혀 있을 때는, 내 마음/생각/의식이 뭔가 스트레스 받고 있을 때는

‘조용히 안 해!!!’ 하면서 계속 윽박지른단 말이죠.

 

이것처럼 상황은 아주 아름다운 상황인데, 우리 마음 때문에 그 상황을 괴롭게도 만들 수 있는 게

우리들의 마음 의식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의식/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사느냐는

그 생각/마음/의식에너지 파동이 그대로 삶/현실/세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해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집이 만날 웃고 떠들어도 즐겁고 행복한 집이라면 그 집은 놀라운 집인 겁니다.

매일 매일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놀랍게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잖아요.

 

근데 어떤 사람이 성격도 안 좋고, 만날 집안에서 화만 내고 짜증내고 이런 집이다.

그럼 그 집은 사실은 심각한 집인 거예요. 이런 집은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

계속해서 생을 어둡고 어둡게 만들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부모님이, 아버지가 무섭고 엄하고 막 이럴 때 ‘난 절대 우리 아빠 같은 남편을 만나지 말아

야지’ 했는데 마음 속에서 演習한  마음이 그거니까  아버지와 똑같은 남편을 만나가지고 똑같이 

남편한테 시달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비슷한 마음에너지 波動의 波長을 자꾸 마음속에서 

演習했기 때문에, 그 마음에너지 파동의 파장과 비슷한 사람의 마음에너지 波動의 波長을 만나면, 

 파장을 만나면 내마음도 모르게 괜히 波動이 增幅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딸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게 그러한 비슷한 마음에너지 波動의 波長을 發하는 남자친구를

만나는데, 이 남자친구가 아주 나쁜 남자 스타일이고, 막 화도 잘 내고 이러는데도 오히려 그게 괜히 

매력적으로 보인단 말이죠. 나를 확 끌어주는 것 같고 괜히, 分明히 나쁜 남자인데,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럴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비슷한 마음에너지 波動의 波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죠.

그래서 삶속에서 어떤 마음에너지 파동의 파장 그러한 파장을 演習하고 하느냐가 아주 重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했을 때는, 이렇게 利他的인 願力의 祈禱를 하게 되면 반드시 그 기도의 加被가 

있습니다. 기도가 집착이 담기지 않고 이타적인 원력을 내어서 순수한 善意志로써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아, 그러나 나는 이렇게 되기를 발원합니다.’ 라고 부처님께 발원하고 기도를 하게 됐을 때,

그 기도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 기도하는 마음은 반드시 現實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量子物理學에서 量子수프(quantum-soup)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宇宙法界는 宇宙萬物은 無限한 量子수프 狀態로 存在한다고 그래요.

 

 

이 世上은 宇宙는 宇宙萬物은 宇宙法界는 무엇도 될 수 있고, 어떤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量子수프의 상태, 卽, 量子場 狀態의 無限한 波動에너지場의 狀態로 存在하다가 그 量子場이 

現實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强力한 힘이 뭐냐 하면, ‘사람의 意圖/意識/마음/生覺’이라는 에너지 波動이

라는 겁니다. 불교로 말하면 ‘祈禱의 마음’인 거죠. 祈禱를 하게 됐을 때 그 생각/마음/의식/의도라는 

에너지 波動의 無限한 可能性이 現實로 딱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래서 量子跳躍(quantum-jump)이  

可能하다고 해요.

 

온전히 마음/생각/의식/의도의 에너지 波動의 周波數를 우주법계의 에너지 波動 周波數와 제대로 맞춰

서 祈禱할 때, 즉, 여러분 中道가 重要한 理由가, 매직아이를 볼 때 그냥 멀쩡하게 봐도 안 보이는데,

눈을 사팔로 뜨고 봐야지 보이는데 이것도 과도하게 사팔로 하면 또 안보이잖아요. 적절히 사팔로 했을 

때 탁 보이지 않습니까?

 

기도도 과도하게 집착하고, 과도하게 에너지를 쓰면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고, 또 그렇다고 대충 기도

도 안하면 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주 적절한 中道를 지켜야 되는데, 그게 아까 말했던 집착과 과도한 

어떤 집착이 없는 利他的인 純粹한 願力이었을 때 그 波動의 周波數가 宇宙法界의 波動 周波數와 맞

는단 말이죠.

 

그 두 波動의 周波數가 딱 맞아지게 됐을 때,  量子도약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量子跳躍! 양자도약은 

뭐냐 하면, 하나의 可能性이라는 時間의 흐름을 따라서 恒常 우리 삶은 存在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

리가 늘 볼 수 있는, 預想 可能한 狀況으로 삶은 存在한다는 거예요.그런데 그렇게 預想 可能性으로 

存在하다가 때때로 전혀 다른 可能性으로 量子도약을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疾病으로 고생하던 세계가 나의 세계였어요, 日常이었어요. 몸이 허약한 삶이 나의 일상

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기도를 통해 불보살의 가피를 받거나 이런 것을 통해서

갑자기 몸이 멀쩡하게 건강해지는 그렇게 갑자기 바뀌는 삶, 삶이 갑자기 도약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전혀 다른 삶으로 바뀔 수 있잖아요. 그게 量子도약이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것이 實際 可能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그 방법을 설명을 하는 것이 제가 지금 말한 방법입니다.

‘과도하게 執着해도 안 된다. 宇宙萬物은 서로가 '하나'로 連結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 量子物理學이 可能한 理由가 '量子얽힘(quantum-entanglement)'라는 것 때문인데, 양자얽힘이 

뭐냐 하면, 緣起法입니다. 이 世上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連結되고 얽혀있단 말이에요. 連結되어 있고 

얽혀있기 때문에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宇宙全切가 超時空間性으로써 全切宇宙 끝에서

까지 同時的으로 非局所的으로 생각/마음/의식/의도가 일으킨 마음에너지 波動이 서로 連結되어 있고 

얽혀져 있기 때문에 그 얽혀진 마음에너지 파동이 전달이 되었다가 同一한 量子 波動, 내 마음에너지 

波動이 粒子狀態로 變換되어져서, 여러분, 粒子는요, 양자물리학에서 粒子는 여기에 있는 粒子가

저 宇宙 끝에 있는 粒子와 하나로 連結되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이게 量子얽힘 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어떤 光量子(light-quantum) 하나가 여기서 振動을 일으키는데, 가시적으로는 전혀 

連結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 우주 끝에서 同時에 같이 振動한다는 거죠. 여기서 마음에너

지 波動을 일으켰을 때 나의 마음에너지 波動과 連結된, 나의 마음에너지 波動과 얽혀져 있는 美國에 

있는 어떤 物質의 細胞 波動의 波長이 同時에 똑같이 振動하면서 움직이더라는 거죠. 그게 이제 양자

얽힘을 가능하게 해주는, 즉 이 양자얽힘을을 하나로 連結시켜 주는 우주의 어떤 波動하는 에너지場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量子場인데, 이런 量子場으로 宇宙의 모든 에너지 波動이 하나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

에너지 波動이  간절하게 祈禱를 일으킬 때 量子얽힘을 通해서, 卽, 緣起的인 因緣, 連結性을 通해서 그 

기도하는 마음에너지의 波動과 共鳴을 이루는 우주법계의 마음에너지 波動들이 기도하는 내 마음에너지 

波動에게로 끌려오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너지 파동에게 힘을 실어주는 영향을 주기 시작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거나, 갑자기 뜬금없이 과거의 

누군가가 갑자기 지금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든가 나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티브이를 켰는데, 거기서 

놀라운 情報가 나와서 그 解答을 얻는다거나, 이런 놀라운 어떤 삶의 양자 도약의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어떤 순수한, 집착하지 않는 순순한 마음에너지 파동의 기도를 통해서 그것이 可能해진다.

 

이게 宇宙萬物이 相互 緣起的으로 서로 하나로 連結되어져 있기 때문에 可能하다. 그리고 그것을 可能

하게 하는 方法은 순수한, 집착하지 않는 순순한 마음에너지 波動의기도를 통해서 그것이 可能해진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를 했을 때, 분명히 순수하고 올바른 기도를 했을 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서,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