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심우송(尋牛頌) / 公案을 思量分別로 따지지 말라

장백산-1 2014. 10. 9. 15:33

 

 

§(401) 심우송(尋牛頌) / 公案을 思量分別로 따지지 말라  -     용화선원 법문듣기

       疑團獨露 하도록 잡드리해 가야 /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 / 선용기심(善用其心).

 

심우송(尋牛頌) / 公案을 思量分別로 따지지 말라-疑團獨露 하도록 잡드리해 가야 /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 / 선용기심(善用其心).



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疑團으로 公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重要한 段階인

것입니다

.


어쨌든지 公案을 參究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公案을 打破하고 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오직 그 話頭 한 마디, 한 疑心만을 向해서 疑團이 獨露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工夫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65분)에서.


(1)------------------
방금 조실 스님의 錄音法門을 통해서 십우송(十牛頌) - 10가지의 소를 찾는 게송에 대한 그 심우송(尋牛頌)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리의 마음자리를 ‘’에다가 비유해 가지고 고인(古人)들이 게송(偈頌)을 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심(菩提心)을 發해 가지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견성(見性)해서 衆生敎化하는

데까지 10단계로 나누어서 게송으로 읊은 것인데 그 게송에 따라서 고인들은 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많이 여러 가지 종류의 게송도 나오고, 여러 가지 종류의 그것에 의한 그림도 나오고,

요새는 달력 캘린더에도 그런 그림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마는,

첫째, 심우(尋牛) -'찾을 심(尋)'자, '소 우(牛)'자-‘소를 찾는다. 심우(尋牛)’

        이 단계는 菩提心을 發하는 위치여.
우리는 언제 생겨날 때가 없는, ‘언제 그 마음자리가 생겨났다’하고 헤아려 볼 수 없을 만큼

宇宙世界가 생겨나기 以前에부터서 있었던 그 '마음 소'인데,
그 '마음 소'를 부처님도 가지고 계시고, 모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그 '마음 소'를

다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중생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개·소·돼지·미물에 짐승·벌레까지라도 그 마음 소

자리를 다 가지고 있다 그말이야.

근데 우리는 그 마음 소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어 버렸어. 가지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해 모르고

살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부처님의 법, 조사의 법문에 의지해서 잃어버렸던 그 '마음 소'를 찾는다

그말이여. 그 마음, 眞如佛性 자리를 찾는 것을 그 ‘소를 찾는다’고 해서 심우(尋牛)라 그러는데,

보리심을 발(發)해야 그때부터서 '마음 소'를 찾기 시작한 거다 그말이여.

그래 아까 조실 스님께서 첫 번째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 '마음 소' 찾는 데에다가 두고 읊으신 게송인데,

그 게송이 중국의 그 곽암(廓庵) 선사라고 하는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 다음에 가서 견적(見跡)이거든. 자취를 봐. 소를 찾아서 이제 집을 떠나 가지고 그 소를 찾으러,
그 산이 험하고 물이 넓고 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그 소를 찾으러 방방곡곡이 다니는데 그 참

肉體的으로 精神的으로 苦痛이 막심을 하다 그말이여.근데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니 발자취를

發見을 했어. 발자취를 발견한 것을 두 번째 見跡이라 그러는데,

그리고 세 번째가 견우(見牛) -소를 보고,
또 소를 본 다음에는 득우(得牛) -소를 붙잡는 거여.
그리고 다섯 번째 가서 목우(牧牛)여. 소를 먹이는 거여. 길들여서 먹여.

그러니 처음에 소를 찾을랴고 하는 그 보리심을 발한 것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세계 50억

인구가 있다 하지마는 정말 그 '마음 소' 찾으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다행히 1600년 전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고구려·백제·신라를 거쳐서 또 고려, 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1600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韓國人으로 태어난 사람은 참 이 불교와 因緣이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참 여기에 까지 왔으나 그러한 국가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런 불교와 인연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를 열심히 찾다 보면은 그 자취를 發見하게 되고 그 자취를 따라서 나아가다 보면은 결국은

소가 거기에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놈을 붙잡을라고 하면 도망치거든.

그놈을 잘 어떻게 해서 智慧와 忍耐와 方便으로써, 그놈을 잘해서 接近을 해 가지고 그놈을 재치있게

붙들어야지. 소를 저 먼 밑으로 소 봤다고 해서 막 智慧없이 쫓아가서 어거지로 잡을라고 하면 그 소가

도망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參禪도 역시 그 바른 先覺者의 바른 指導下에 如法하게 精進을 해야 되지, 自己 멋대로 아무렇게나

우격다짐으로 막 몰아붙인다고 해서 이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것을 잘 붙들고, 붙든 다음에도, 그놈을 참 지혜롭게 요령있게 소를 잘 먹여야지,

붙들어만 놨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놔두면 다시 또 도망쳐 버릴 것이고.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이

소를 잘 다스려 나가는가? 그것을 참 精誠을 다해서 잘 그 소를 먹이고 거두어 나가야 그 소가 토실토실

살이 찌고 번질번질하니 기름져서, 그 소가 농사도 짓고 병도 안 나고 그 소를 이제는 맘대로 참 잘 길러

가지고,

여섯 번째 (騎牛歸家)가서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외양간에다 딱 묶어 놓고 잘 먹이는데, 얼마동안 잘 먹이다 보면,
일곱 번째 가서 망우존인(忘牛存人)이거든.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어.
이제 딱 잘 먹여서 외양간에다 딱 묶어 놓으니까 소가 길이 들어서 도망가질 않으니까,

소에 대한 關心을 놔 버리고 딱 主人만 있는 거지.
'소에 대한 生覺'은 소가 이쩨는 아주 길이 잘 들여있고, 便安하게 외양간에 길들여져서 있으니까,

이것도 다 공부해 나가는 절차를 거기에다 그렇게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쉬웁게 말하자면은 이 마음 소를 길을 들이는 過程에서는,
話頭를 熱心히 열심히 애를 써서 열심히 들다 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대로 의단(疑團)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는 과정, 그놈을 거쳐서 나중에 公案을 打破해 가지고 確撤大悟를 하거든.
확철대오를 하면은 一切處 一切時에서 깨달음의 境地가 朗然獨存하며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境地에 이르르거든.  무수이수(無修而修)거든 닦음이 없이 닦는 거거든.

그리고 여덟 번째 가서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거든. 이제 사람과 소를 완전히 다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집에 돌아와 가지고 소는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도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과 소  둘 다 잊어버린 것은 보리(菩提)를 이룬 位置다.

또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은 소승(小乘)에서는 아공(我空)의 境界를 그렇게

表現을 했다 그러고, 그 다음에 인우구망(人牛俱忘)의 자리는 大乘의 境地에서 말하는 菩提를 이룬

境地에다가 비유해서 人牛俱忘이라  말했다고 古人은 그렇게 解說을 합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 와서 이 반본환원(返本還源) 이 말은 열반(涅槃)의 境地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것은 大乘이나 小乘이 다 같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열 번 째 가서 수수입전(垂手入廛) 손을 드리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중생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10가지 段階로 보리심을 발(發)해 가지고 도업(道業)을 成就해서 보림(保任)을 다 完成을 한 다음에

중생을 교화하러 나가는 그러한 단계를 10가지로 이렇게 구분한 것인데,
참 대단히 그 '마음 소'를 찾는 境界를 그 '소' 찾는 境界에다가 비유해서 이렇게 게송을 읊고

또 그림을 이렇게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道를 닦아가는 데에 퍽 理解하기 쉽고 재미스럽게

표현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께서는 첫 번째 제일 심우(尋牛) 단계와

두 번째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의 단계만을 게송으로 읊으시고 그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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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疑團으로 公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산승이 읊은 그 게송이 ‘불법(佛法)이다. 전등(傳燈)을 계승한다’ 그러한 生覺도 일으키지

말고, 다못 자기의 공안-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위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공부를 지어 가는데,

공부를 지어 가는데 있어서 고인(古人) 公案 상에 복탁(卜度)하고 妄靈되이 解釋을 加하지 말아라.

비록 낱낱이 해석을 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었다 할지라도 '참나'를 깨닫는 일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아무 所用이 없다는 말입니다.

公案을 갖다가 思量分別로 따져서 이것은 무슨 최초구다, 이것은 말후구(末後句)다,

이것은 제삼구(第三句)다, 이것은 제2구다, 이것은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이런 식으로.. 이것은 본분이다 신훈이다. 옛날에 講師나 또는 의리선(義理禪)을 하는 사람들은

公案을 낱낱이 그렇게 分釋하고 따져 가지고 그렇게 結論을 내리고서 그 公案을 다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니여. 그러한 式으로 백 천 公案을 다 따져서 결론을 내려 봤자

그것은 生死解脫도 아니고 見性成佛도 아니여.

古人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렇거늘,

하물며 그 불 속에 어떻게 앉거나 누울 수가 있겠는가?
公案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比較하고 分釋하고 그래 가지고 어떤 分別心으로 結論을

내리는 것은 마치 불덩어리에 훨훨 타는 무서운 불길 가까이 가 가지고 그것을 만져 볼랴고 그러고

또 그 속에 들어갈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거거든.

그 공안 속에, 크게 나누고 작게 나누고 논상논하(論上論下) 이러쿵 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신훈이다, 본분이다, 일구·이구·삼구다, 이렇게 따진 것이 다

분대분소(分大分小)하고 논상논하 한 것이거든. 이러면 그것이 상신실명(喪身失命)-벌써 수행자로써 공안을 갖다가 의리(義理)로 따지고 思量分別로 이렇게 따지는 짓을 하는 것은 벌써 生命을 잃어버린 것이여.

조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것은 이 公案을 가지고 思量分別로 따진 것을 極히 嚴格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까닭이 바로 公案은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하면은 수행자로서의 生命을 잃어버려.

公案을 그런 식으로 따져서 무슨 공안을 대하든지, 법문을 듣던지, 어록을 보던지,

보면은 자기 나름대로 이러쿵이러쿵 따져서 結論을 내려.

조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기를 사견종자(邪見種子)라 그랬습니다.
사견(邪見) 삿된 種子, 삿된 見解를 가진 씨알머리다 그 말이거든. 邪見種子는 암만 해봤자

어떻게 해볼 道理가 없어.『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러주면 『예 알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금방 다음에 또 邪見을 내거든.

어쨌든지 公案을 參究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公案을 打破하고

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또 하나, 공부하는 사람이 注意할 것은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여.

글을 찾고 글귀를 쫓는 거여.그것이 공부하다가 답답하고 암만해도 안 되고 하면은

뭐 전등(傳燈)·염송(拈頌) 기타 조사어록 모다 이런 것을 뜨적뜨적 하며

행여나 거기서 무슨 좋은 해결이 나올까?

워낙 해도 해도 안 되고 가슴은 못 견디게 그렇게 답답하니까 혹 그런 것을 보면 좀 후련하고

시원해지는 맛이 있어서 그런 것을 다 볼라고 그러고, 또 그런 어록 속에 기언묘구(奇言妙句)-

'기특한 말과 妙한 글귀'가 있으면 그런 것을 마음속에 기억을 하고, 이런 것은 다만 아무 利益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큰 障碍가 된다. 眞實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짓을 하지 말아라.

그 공부가 안 되고, 암만해도 공부가 진취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앉아서도 답답하고

서서도 답답하고 추호도 어떤 그 공부가 잘된다고 하는 그런 시원한 대목이 없으니까,
대단히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마는, 그 답답하고 꽉 맥히고 이 단계가 이러한 경지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重要하고도 좋은 境界라 그랬습니다.

대혜 스님도 그러한 境地야말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중要한 단계니까, 거기에서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아라. 煩惱心을 내지 말고 거기에서-그 답답하고 답답한 그런 境地에서,
선용기심(善用其心)-잘 그 마음을 잡드리를 해 가지고, 話頭를 놓치지 말고 參究를 잘 해가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고인이 한결같이 당부하신 말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이 비량(比量) - 이것과 저것을 比較하고 公案을 이 公案과 저 公案을

比較허는 거야. 그래 가지고 마음을 가져서-이 공안 저 공안에 대해서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서

주박(湊泊)을 혀.그걸 따지고 그놈을 가지고 속으로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여. 이렇게도 生覺해 보고

저렇게도 生覺하고. 그렇게 하면은 도(道) 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야. 公案을 가지고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이놈과 저놈을 比較허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思量分別로 복탁(卜度)하고 이런 것은

미륵불(彌勒佛)-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생허실 때까지 이르러도 그 사람은 참 깨달음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그래서 이 活句參禪을 허는 사람은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 속에 갇혀 있는 거와 같애서,
‘다못 어떻게 허면 이 四方이 銀山鐵壁으로 둘러서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허면

여기서 빠져나갈까?’ 오직 그 활로(活路)를 찾는 그 한가지 일만이 문제가 되야 해.

그래서 그 活路를 찾는 방법이 「이 뭣고?」거든. 「이뭣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板齒生毛 화두를 말씀허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無字 화두를 허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허신 분은 「이 뭣고?」
오직 그 화두 한 마디, 한 疑心만을 向해서 疑團이 獨露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공부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또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머리가 개운하면서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리면서

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화두가 잘 들릴 때가 오되, 그럴 때라 하더라도 ‘아! 됐다. 이제 공부가 잘된다’

그런 기쁜 마음을 내서는 안 돼. 그런 기쁜 마음을 내면 금방 또 境界가 확 變한 거거든.

그래서 설사 공부가 좀 수월허게 話頭가 잘 들리고 疑心이 疑團이 잘 순일허게 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안 돼.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는 恒常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권속이 六根門頭에 와서 지키고 있거든. 그래 가지고 잠깐이라도 틈만 있으면 그 六根을

通해서 들어와 가지고 아주 內亂을 일으킬라고 작정을 허는거여.

마치 한 국가도 이웃 나라가 그 나라를 침범을 할라며는 항상 간첩을 보내 가지고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감시허다가, 감시허면서 계속 서로 이간(離間)을 붙이는 거여.정부와 백성을 이간을 붙이고, 백성과 백성을 이간을 시키고, 신하와 임금을 이간을 시켜 가지고, 이간을 시켜서 싸움만 일어나면은, 그 때에 바로

침범해서 그 나라를 갔다가 빼앗기가 가장 좋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나라가 이웃나라로부터서 침범을

안 받고 멸망을 안 할랴며는 어쨌든지 그 나라 백성이 서로 和合을 해야 하거든.그 나라 백성이 화합이 돼

가지고 모두가 서로 믿고 자기의 맡은바 소임을 열심히 허고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가장 나라를 위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는 것이 되어서 외부에서 침범해봤자 도저히 성공을 못 허는 것이여.

우리 공부해 나가는 사람도 눈과 코와 입, 귀 卽,-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서로

눈은 自己의 役割이 따로 있고, 입은 입의 역할이 따로 있고, 또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고,
그러니 우리의 發心한 그 마음으로 주재(主宰)가 되어야, 육근(六根)이 심왕(心王)의 命令에 모두가 다

복종을 하고 합심해서 한 대사(大事)를 향해서 合心이 될 때에 도(道)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여.

그런데 그놈이 흩어져 가지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지고 탐진치(貪瞋癡) 三督心의 從이 된다면

도업(道業)은 성취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국은 마군(魔軍)이의 함정에 빠지고 그 홀랑게에 걸려서

道業 이루기는 커녕 魔軍이의 종자(種子)가 되고 마는 것이여. 그 마군이의 종자가 안 되고 법왕 권속이

되는 길은 마군이의 올개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면은 그 올개미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올개미가 바로

思量分別이거든.

우리가 工夫하는 분상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一切處 一切時에 알 수 없는 疑團으로 그렇게 나가면 魔軍이가 거기에는 발붙이지를 못하는거여.
꽉 맥히지 않고, 알아 들어가고, 理致 길이 있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 갈 길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魔軍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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