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모든 法의 性稟은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다.

장백산-1 2014. 11. 3. 00:17

 

 

 

1. 모든 法의 性稟은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다.            

                                                                                                  2013/04/2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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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 보설(普說)

 

제27장 법성공(法性空)

 

 

1. 모든 法의 性稟은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다.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현재의 迷惑한 '나'가 經典도 많이 읽고 法門도 많이 듣고, 때에 따라서는 傳統的으로 權位가 있다는 온갖 苦行도 마다 않는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그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는 여여(如如)한 聖人의 풍모(風貌)를 갖추는 것으로서 修行의 目標를 삼는다.· · · · · · 그러나 結論的으로 말해, 이러한 修行은 結局 그 中心에 恒常 '깨달아야 하는 나'가 철옹성 같이 자리 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修行이 계속 되는 限, 그 뿌리는 점점 요지부동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쯤 되면 萬法이 인연생기(因緣生起)라거나, '나라고 할만한 나는 없다'라는 말들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괜한 말쯤으로 흘려버리기 십상이다. 스스로는 지극히 올바르게 修行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事實은 聖人의 뜻과는 正反對로 내닫고 있는 꼴이니, 그야말로 첫 단추부터 철저하게 꼬이는 것이다.

 

물론 처음 입문하는 시점에서야 그러한 접근이 무리가 아닐 수 없겠으나, 참으로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입문하면서부터 듣게 되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깊은 참구를 통해 과연 修行의 主體로서의 '나'란 누구인가라는 疑證을 내기 마련이다.· · · · · · 지금 '나'의 目前에 보이고 들리는 무수한 바깥 境界는 고사하고 가장 가까이의 이 '자기(自己)'에서부터 工夫가 始作되는 것이다. 올바른 修行은 이러한 참구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숱한 말씀이 있어왔지만, 그 모든 말씀은 結局 萬法이 因緣生起라서 그 무엇도 自體性이 없다는 말로 歸結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모든 法의 性稟이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라 그 무엇도 집착할 것이 없고, 여읠 것도 없으며, 긍정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다는 事實, 법성공(法性空)을 투철하게 깨달아야 한다.

 

모든 法의 性稟이 텅~비었으니, 더 以上 迷惑한 衆生도 없고 깨달아 마친 聖人도 없고, 解脫도 없고 束縛도 없다.

그 모든 것이 다만 人間이 意識으로 제멋대로 가져다 붙인 槪念이요, 텅~빈 이름일 뿐이니, 그것이 精神作用이 됐건 物理的 存在가 됐건 모두 한 性品이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꿈처럼 헛개비처럼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텅~빈 道理'를 말하고 있는 사람이나, 또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나, 自·他, 彼·此가 몽땅 빈 것이니, 그 內容이 解脫이 됐건 涅槃이 됐건, 부처가 됐건 중생이 됐건 그 모든 言說이 지금 당장 저절로 끊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 · · · 이렇게 一切의 희론(戱論)과 망정(妄情)이 몽땅 쉬게 되면, 그때 비로소 오직 '참된 하나'(眞一)만이 훤칠하게 드러날 것이니, 행여 그 자리를 본 者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부리를 댄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意識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맥질을 해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경전(經典)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그 뜻을 깊이 참구하여 길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萬法이 本來 生滅이 없음은, 마치 純金이 장인(匠人)의 솜씨로 그릇이 이루어지되, 金의 體性은 變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한 마음' '한 성품'이 바로 萬法인지라, 다시는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과 같다. 이 같은 理致로, 부처가 되었을 적의

마음이 늘지 않았고, 범부일 때의 마음 역시 줄지 않았으니, 마음이 因緣을 따를 적에 제 性稟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상(像)이 생긴 것은 다만 因緣이 생겼을 뿐이고, 像이 없어진 것도 다만 因緣이 없어졌을 뿐이라, ― 상(像, 諸相이 非相)은 原來가 제 體性이 없어 空하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된 것은 깨끗한 인연이 생겼을 뿐이요, 범부가 된 것은 물든 인연이 났을 뿐이니, ― 범부와 성인은 本來 남(生)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一切萬法은 다만 因緣을 따를 뿐, 제 性稟이 없으며, 本來 생겼던 일도 없고, 지금에 없어지는 일도 없는 것이다.

 

바로 짓는 때에도 지음이 없고, 짓는 이도 없으며, 하는 때에도 함이 없음(無爲)이어서, 모두가 제 性稟이 없다. 그러므로 恒常 '本來의 萬法' (法性이 虛空性 無生性이라 生滅이 없다) 그대로요, 恒常 아직 생기지 않았을 적과 똑 같다. 가령 중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이 '성품 없음의 종'(無性宗)을 여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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