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13. 無緣慈悲완릉록 보설편
◈ 완릉록 13. 무연자비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慈悲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法을 설하십니까?"
"부처의 자비란 因緣이 없기 때문에(無緣) 큰 慈悲라고 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룩할 만한 부처가 있다는 見解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만한 중생이 있다는 見解를 내지 않는 것이다.
설하시는 法은 설함도 없고 保任도 없으며, 그 法을 듣는 者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幻術師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人間을 위하여 說法을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慈悲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生覺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누구나 스스로 本來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원오당 한소리********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십니까?" 배휴의 질문이 무엇일까?
自己 스스로 疑心을 만들어 自己의 生覺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럼 한 瞬間 일어나는 本心의 作用일까? 아니다! 조용한 텅~빈 마음 본바탕에 한바탕 煩惱인 記憶을 더듬은 禪知識은 慈悲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 편안함을 얻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造作된 生覺을 일으킨 것이다.
왜 그럴까? 자기의 의심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황벽스님이 이 말에 또 情을 베풀어 그래 답답하신가 내가 풀어줄께 라고 하실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자비란 인연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說하시는 法은 說함도 없고 保任도 없으며, 그 法을 듣는 者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지금 하시는 이 말씀은 本心의 立場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텅~빈 바탕 本心에는 그 어떠한 疑心도 慈悲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무 일도 없다.. 뭍고 답하는 說法도 있을 수가 없다.
묻는데 답하는 것은 因緣이다. 질문이 있으니 답을 할뿐이다. 그래서 '부처의 자비란 인연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말한다' 큰 자비는 本心에서 하는 말씀이고, 因緣을 세워서 말하자면 卽, 차제를 세워 말을 한다면 '사랑함[慈]는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시어
먼저 本心의 텅~빈 바탕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래서 因緣法이 通하지 않는 本心은 無情이요 無作인데 어찌 어떤 說法이 붙을 수 있느냐 그래서 이렇게 첨언 하신다.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시어 本地風光을 드러내신다. 本地풍光으로 알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는 황벽스님은 부연하여 다시 이렇게 첨언을 하신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하여 說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慈悲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 자 여기서 本心을 조금이나마 기미를 느껴 보시라고 참 자비를 베풀고 계신것이다. 산새들의 노래소리와 虛空속 구름의 한가로움 개울과 시냇물의 무정곡과 自然이 주는 無情說法 등이
다 眞正한 說法이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 하는 說法은 方便法門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마치 本心에 煩惱와 妄想의 바람을 일으켜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하는 說法을 듣고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배워서 알고 生覺을 움직여 慈悲心을 내는 有爲造作으로는 本心의 그림자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有爲造作이 없는 無情說法 卽, 우리의 本心은
산하대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포섭하여 녹아있는 虛空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 自然을 通하여 하나 하나 마음에 부합해 나가는 것이다.
保任이란 本來 깨달아 있는 마음을 現象界의 現象에 代入하여 그 緣起의 實相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대사도 마음을 깨친 후 가사를 이어받았으나 16년동안 사냥꾼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山川을 떠돌며 마음의 作用과 마음의 德相을 自然과 一致 시켜나갔던 것이다. 學門과 學術과 知識이 아닌 無情說法인 自然界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保任, 悟後 修行이라고 한다.
조사님들의 행적을 더듬어 간파해 보면 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스스로 本來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설법을 하는 것은 봉사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은 것이며. 造作된 理論이나 知識이나 觀念으로 하는 說法은 하는 자도 듣는 자도 다
장님 코끼리 다리만지기와 다름이 없이 다 스스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그대는 누구에게 說法을 듣고 내가 불교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래서 황벽스님 역시 慈悲를 묻는 배휴에게 부처님의 큰 자비와 함이 없는, 인연이 아닌 무정설법과
참 그대로의 자비인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설하신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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