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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놈이 여래[如來]다 - 숭산 스님 [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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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1월 30일 입적入寂하신 崇山 스님은 평소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등의 화두話頭로 많은 불자佛子와 시민市民들을 깨우쳤다.
스님의 많은 法門 가운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性稟 [自性]을 일깨우는
名 法門 '보는 놈이 곧 여래[如來]다' 라는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 보는 놈이 곧 如來다. [담연湛然한 한 物件]
人生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물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 모든 사람들의 화제話題였다.
우리의 古人 가운데 고려시대 나옹懶翁 스님의 누님이 있었다. 동생에게 염불念佛을 배우고 난 후 스스로
한 글귀의 시詩를 읊으니 다음과 같다.
空手來 空手去 是人生 공수래 공수거 시인생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 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 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獨有一物 常獨露 독유일물상독로
湛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還會得湛然這一物麽 환회득 담연저일물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人生이여
태어남은 어느 곳으로 부터 왔고 죽음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이로다
뜬구름은 자체가 本來 實體가 없나니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 또한 이와 같도다
그런데 오직 한 物件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서
맑고 숙연湛然하여 생사生死를 따르지 않는구나
맑고 고요한 이 한 物件이 무엇인고?
참으로 명시名詩다. 생겨나는 것을 한탄恨歎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한 그 가운데 生死없는 도리道理를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詩를 읽고 잘되었다, 못되었다 分別하고 評價할 것이 아니라
이 詩 속에 들어 있는 問題 하나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한 物件이 있어 항상 드러나 生死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 生死를 따르지 않는 湛然한 한 物件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者는 뜬구름을 원망怨望하지 않으리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痛哭하지 않으리라. 만나고 헤어짐을 기약期約하지 않으리라.
期約이 없는 世界에 나아가려면 바로 그 한 物件을 보라. 그것을 보는 者가 곧 부처(佛)이니라.
그러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저 담연湛然한 일물一物을 生覺하는 그 놈을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본다고 보아질 수 있는 물건物件인가?
아니다, 아니다. 보려고 애쓰면 도리어 보려는 마음이 구름이 되니
그 마음까지 마저 텅~비워서 허공虛空과 같이 하면 저절로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만약 사람이 부처(佛)의 경계境界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虛空 같이 淸淨하게 하고 .
망상과 모든 고취苦趣를 멀리 하면
마음이 향하는 곳이 모두 걸림이 없게 되리라.
若有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약유욕식불경계 당정기의여허공
遠離妄想及諸趣 令心所向皆無碍 원리망상급제취 영심소향개무애
妄想이란 마음 속으로 온갖 分別 是非를 일으키는 마음이고
모든 취[六趣]는 外部에서 받아들이는 온갖 世上의 일들(六境)을 반연攀緣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 모든 因緣/세상 일을 쉬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렇게 안과 밖으로 마음이 쉬면 마음이 장벽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道에 들게된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 [ 息 쉴 식 喘 숨찰 천 障壁 장벽]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백치白痴처럼 우두커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도 들은 바 없고 보아도 본 바 없는 가운데서 自己 일을 충실充實히 하면 된다.
自己 일을 충실充實하되 보는 놈, 듣는 놈, 먹는 놈, 입는 놈, 냄새 맽는 그것, 촉감을 느끼는 그것,
생각을 하는 그것, 인식해서 아는 그것 그 놈을 똑똑히 보게되면 그대로 如來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대의 마음[意]을 텅~비워 虛空과 같이 과연 淸淨하게 하였는가 말았는가?
當淨其意 如虛空麽 당정기의 여허공마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였거든 다시 나의 말을 들어 보라.
其或未然 更聽註脚 기혹미영 갱청주각
이 바른 깨달음의 性稟은 위로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아래로 육도중생에 까지 이른다
此正覺之性 上至諸佛 下至六凡
낱낱이 당당하고 하나하나 마다 구족具足하여 티끌티끌마다 서로 통通하고
一一當當 一一具足 塵塵上通
두두물물 위에 나타나서 닦아 이룸을 기다리지 않고 뚜렷이 밝고 밝음이로다.
物物上現 不待修成 了了明明
언제나 어디에서나 깨달아 있는 우리 本來의 마음이
언제 어느 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설파說破한 시詩다.
本來의 마음은 부처라 하여 더하고 중생이라 하여 덜한 마음이 아니라, 지옥·아귀·축생·인·천·수라 등
6범六凡[六道]이 똑같이 낱낱이 당당하게 具足하고 있고, 티끌, 먼지, 돌맹이,모래, 나무등 하나하나에 分明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대로 보면 그만이지 구태여 닦고, 익히고, 이루고, 증證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요요명명[了了明明]이란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 부처다.
자, 그렇다면 이 부처를 보라 (주장자를 높이 드셨다.)
보았느냐? 還見麽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또 묻는다. 탕!..)
과연 들었느냐? 還聞麽
이미 分明하게 보고, 이미 또렷하게 들었으면, 結局 이것이 이놈이 무엇인가?
旣了了見 旣歷歷聞 畢竟是 箇其麽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여도 30방망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喝]!..
3×3 = 9 이니라.
듣는 다는 것도 분별分別이고 본다는 것도 分別이기 때문이다.
같다고 하는 것도 分別이고 다르다고 하는 것도 分別이다.
같다, 다르다 하면 3×3 = 9가 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이 팔리는 사람은 佛法은 커녕 俗法도 제대로 얻기 어렵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그대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니
어떤 物件이 부서지지 않고 누가 영원히 기리기리 견고堅固한 者이냐 그대들은 아는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고 오는 데 속지 않을 것이다. (탕!..)
여삼세제불 일시성불공 如三世諸佛 一時成佛功
십류군생 동일열반삼세 十類群生 同一涅槃三世
모든 부처님들이 일시에 성불하고 십류군생이 한날 열반에 들었다는 말이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일시에 成佛하였다는 말은
그대가 成佛하면 三世諸佛이 언제나 成佛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이미 時間 以前에 三世諸佛 그들은 成佛해서 있었다는 事實을 明確히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時間的으로만 그런 삼세제불이 이미 성불해 있는 것이 아니라,
地獄 ·餓鬼 ·畜生 ·人 ·天· 수라· 聲聞· 緣覺· 菩薩· 부처(佛)의 十類群生이 함께 涅槃에 들게되는 것이다.
개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證果는 涅槃인데 諸佛이 一時成佛하면 群生이 同時에 同一涅槃할 것은 疑心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理解가 잘 안 되거든 다음 글귀에 눈을 붙여 보라.
눈 가진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말없는 동자童子가 답답해 한다.
얼마나 답답하면 돌사람이 눈물을 흘릴고..
◇ 形相없는 한 物件 [월봉月峰 선사]
형상 없는 물건 있어 虛空을 궤뚫으니
千萬가지 것으로도 이와 견줄 수 없네
분명하고 明白하나 찾아보면 흔적痕跡없고
아득하고 심오하나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 있네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조리는 이건 누군가
옷 입고 밥먹는 이것 어찌 그가 아니리
이 가운데 일을 좀더 듣고자 하는가
돌호랑이 울음소리에 산은 스스로 탄식하네
내 가슴에 있는 이 한구절
그대에게 읊어 주려 해도 불가능하네.
그것이 도데체 무슨 글귀냐고 묻는다면
바람에 처마끝 풍경風磬이 운다고 말하리
◇ 나는 내가 아니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자
이따금 내가 만나지만 대부분을 잊고 지내는 자,
내가 말할 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자, 내가 미워할 때 容恕하는 자,
가끔은 내가 없는 곳으로 산책을 가는 자, 내가 죽었을 때 내곁에 있는 자,
그 者가 바로 나다.
◇ 不滅의 言語를 찾고 있는가 [월봉月峰 선사]
그대여, 不滅의 言語를 찾고 있는가 文字로 쓰면 이미 어긋나 버리나니
물 속 저 둥근 달 만지면 부서지고 거울 속 사람 모습 잡아내어 올 수 없네
잠 곤히 잘자고 깨어 있을 때 한가한 그것 그곳에 바로 심오深奧한 의미가 있네 그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두텁게 옷을 더 껴입는 그것,
이러한 일상활동의 앎이 바로 마음 너머에서 비춰주는 일이요.
이런 自己 안의 앎을 버리고 무슨 더 깊은 뜻을 찾아 헤메는가
햇살 잘 비치는 양지陽地 바른 곳에 앉아 아침햇살 찾지 말게나.
◇ 원願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교회나 절에 와서 祈禱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求하는 마음일 경우가 많다.
명예, 돈, 아이들 장래, 대학, 출세, 더 좋은 연인, 집, 차, 직업, 지위, 직장, 승진, 등등…
하지만 實際 이런 것들은 祈禱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이 宇宙가 그런 方式으로 運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총선거는 한 선거구에 적게는 2~3명, 많게는 7~8명씩 나온다. 그 중 당선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후보자들은 몇 년 동안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을 한꺼번에 투자하고 家族들까지 선거운동에 동원하지만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求하고 願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苦痛이 찾아온다.
몇 년 전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 친인척들까지 동원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만 1등과 다섯 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채무자들과 친인척들이 몰려와 그에게 빚 갚으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는 자살하고 싶었지만 약 살 돈조차 없었고, 결국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돈 들이지 않고
죽고 싶다는 所願을 實現한 셈이었다. 試驗에 떨어진 사람, 競技에 진사람, 事業에 실패한 사람의 苦痛이 어찌
이보다 못할 것인가. 自殺할 勇氣가 없으니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苦痛 그 自體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苦痛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어떤 苦痛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强하게 노력하는 마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고통도 있다.
언젠가 한 미국인 학생이 나에게 상담相談을 해왔다.
“禪師님, 괴로움이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저는 멋있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업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제 能力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參禪한다고 앉아 있으면 저는 계속 이런 생각만 들어요. 여자 친구, 돈, 직장, 여자 친구, 돈, 직장…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佛經을 외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여자 친구, 돈, 직장만을 되뇝니다. 生覺하면 할수록 더 크게
내가 願하는 것들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苦痛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狀況에서는 사실 參禪 修行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마음 속에 執着心이 寶物처럼 들어 있어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오히려 이렇게 助言했다.
“지금보다 더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학생은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더 많은 고통을 겪으라니요. 저는 이미 무척 힘듭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고통을 겪으면 여자 친구도 생기고 돈도 벌고 좋은 직장도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 1千拜를 하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五千번씩 외세요.”
“과연 그렇게 하면 제가 願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중국 속담에 以熱治熱, 以寒治寒이라는 말이 있지요. 苦痛은 苦痛으로 치유해야 한다(以痛治痛)는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힘들어 하고 있지만 그 苦痛은 깨끗하지 않은 苦痛입니다. 1千拜를 하고 觀世音菩薩을 외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끗한 苦痛입니다. 苦痛을 다른 苦痛으로 治療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本來 당신의 苦痛은 사라지고 대신 智慧가 생길 것입니다.”
그 학생은 내 말을 따라 1백 일 동안 열심히 절과 念佛 修行을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거짓말처럼 훌륭한
여자 친구와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났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그 학생은 뭔가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수행했다.
그리고 그 過程에서 마음修行의 本質, 生覺의 本質, 苦痛에 신음하는 마음을 본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단
修行이라는 藥을 먹으면 올바른 修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可能하다.
나는 그의 마음의 病을 고치기 위해 그의 病을 ‘利用한’ 것이다.
이것을 ‘法 사탕’[Dharma candy]이라고 부르고 싶다. 1백 일 수행이 끝난 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修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한 段階 높은 水準의 修行이 必要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참자아(眞我)를 發見하는 修行입니다.”
일단 그가 修行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 단계 높은 가르침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이 학생에게 준 가르침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8萬 4千 가지
各各의 苦痛마다 모두 다른 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隨病說藥/應病與藥].여러분들 중에도 뭔가 얻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절을 하고 念佛을 하고 參禪 修行하라. 그렇게 하면 다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면 傷心한다. 그러나 實際로 무엇을 얻기 위해 熱心히 努力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저 바라기만 할 뿐, 언제나 現實을 苦痛스러워하면서 定處 없이 방황彷徨하기만 한다.
그러나 參禪 修行하는 사람들은 結局 그들의 참자아(眞我)를 發見해 다른 生命들과
完璧하게 一致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참자아(眞我)를 발견한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자! 여러분은 어느 길을 擇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만든 작은 世界[境界]에 갇혀 산다. 마치 모기가 작은 병 속에 들어가
‘앵앵거리며’ 탈출구를 찾듯, 모든 人生은 이 苦痛의 연옥煉獄에서 헤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自己 마음 속에 强하게 자리 잡고 있는 固定觀念과 執着心들이 自由로운 人生을 사는 데 防害가 된다.
연옥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快樂과 感覺에 더욱 執着한다.
無常 無我의 理致, 緣起의 理致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世上 모든 苦痛은 스스로의 生覺으로 만든 幻想 幻影일 뿐이다.
“늙는 게 싫어.” “그와의 관계는 끝났어. 너무 비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니 믿어지지 않아.”
이 世上이 結局 無常하다는 眞實을 알면 모든 苦痛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지만
無常 無我의 理致를모르면 고정된 실체가 없는 텅~빈 空한 이 世上에 執着하게 된다.
그 結果 苦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 苦痛을 만들어가면서 살 뿐이다.... ♧♧♧
부처얼굴은 마치 맑은 보름달 같고
또한 천개의 해가 밝은 빛을 비추는 것과 같네
佛面猶如淨滿月 亦如千日放光明
텅~비어 깨끗한 법의 몸은 안과 밖이 따로 없고
오고 가고 나고 죽음이 없어 한결 같고 참되어 변함 없도다.
淸淨法身 無內外 去來生死 一眞常
♧ 출처 : 화계사[華溪寺] http://www.hwagyesa.org/
♧ 음악 : 한마음 수채화 http://blog.naver.com/yonsei809/
[출처] 담연湛然한 한 물건 - 숭산 스님[崇山行願]|작성자 혜연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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