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이 세우는 금강경이론 18 (금강경강의 18)| 불교 교양 강좌
전종식 | 조회 18 |추천 0 | 2011.10.01. 00:25
대승기신론이 세우는 금강경이론 18
금강경강의 18
제17 구경무아분의 설법이 계속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如來)라 함은 바로 모든 법(法)이 ‘그대로 같다는 뜻’이다”라고요. 이 말은 위에서 지금까지 수보리가
불타에게 질문하고 불타가 답변한 내용을 ‘여래(如來)’라는 이름으로 결론짓는 대목입니다. 수보리는 앞서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 때 어떻게 마음을 먹고 다스려야할 것인가를 질문한 바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살면서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냐고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으로 물은 것입니다.
불타는 일체중생을 내가 제도하겠다는 뜻을 세워,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했다하더라도, 그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다면, 아상, 인상 등 망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되므로,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무상정등각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게 될 때도
무슨 법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어서, 부처님도 연등불소에서 그러한 법이 없는 가운데 발심을 하였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도 수기를 주시어 내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號)으로 부처가 된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수보리와 불타간의 대화 속에서 여래(如來)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법이 없다’는 최종 결론의
이유를 여기서 밝히는 것입니다.
여래(如來)라는 것은 佛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래(如來)는 ‘있는 그대로, 본래 진리대로, 한결같다’는
뜻이므로 ‘진여(眞如) 자성대로 이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서 ‘온다’는 래(來)자가 있지만, 이는 오지
않고 온 것이고, 응신(應身)불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 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바로 ‘진여(眞如)의 각(覺)’을 말합니다. 진여가 진여대로
나타난 것인데, 그 ‘진여의 각’을 이루는데 무슨 정해진 법이 있겠습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중생이 볼 때는 얻는 법이 있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피안에서 보면, ‘진여(眞如)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본래대로 있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고
‘얻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거기에는 무슨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그대로 한결 같다’라는 ‘뜻’이라고 정의하여
‘정해진 법’이 없음을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如)라는 것은 ‘진여자성’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고,
그래서 ‘여래’와 ‘부처’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 됩니다. 부처의 경계는 평등무차별의 경지인데 거기에
무슨 차별적인 법(法)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실무유법(實無有法)인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쉬운 方便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와 같이, 生成 變化 消滅하는 現象의 本바탕에는
不變의 眞理가 있습니다. 바다에서의 波濤는 千態萬相으로 生滅하는 現象이지만, 그 生滅의 背後에는
不變의 본바탕인 해수(海水)가 있습니다. 해수(海水) 없이는 파도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생멸의 파도와
불변의 해수와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如來)’가 없으면 중생(衆生)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不變의 여래(如來)가 ‘해수(海水)’라면,
生滅의 ‘파도(波濤)’는 ‘중생’입니다. 그래서 중생즉불(衆生卽佛)이 설해지는 것입니다. 중생과 불타는
하나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물과 얼음과 수증기는 생멸하는 물리적 삼태(三態)이지만 그 背後에는 不變의 ‘H2O’가 있습니다.
이미 예로든 소주, 막걸리, 맥주, 위스키 등은 술의 변화된 현상의 모습이지만, 그 배우에는
불변의 물 H2O가 있습니다.
이를 起信論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바와 같이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의 眞理를 설합니다.
동상(同相)은 각(覺)인 불타이고, 이상(異相)은 불각(不覺)의 중생입니다.
각(覺)은 불생불멸하는 ‘여래(如來)’의 ‘여여(如如)’ 그대로이지만
불각(不覺)은 바로 생멸 변화하는 중생의 망념(妄念)입니다.
이 妄念의 不覺은 무수한 중생의 이상(異相)으로서, 각(覺)의 체(體)를 동상(同相)으로 하여
그 體를 가체(假體)로 하여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覺)과 불각(不覺)은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으로 반드시 함께 있는 것이며, 이들 둘이
함께 있지 않으면 불타와 중생은 다함께 성립되지 않으므로 불타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 됩니다.
불교의 진리는 콜롬보스 달걀처럼 어렵고도 매우 쉬운 것입니다.
佛은 “여래(如來)”이고, 如來는 모든 法이 ‘如如’한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범부들은 여래(如來)가 무슨 法이
있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如來)의 참뜻은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如來는 如如한 각(覺) 그대로인 것이므로 실로 무슨 法이 있어서 각(覺)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여’한 대로, 그대로인 것이, 무슨 법으로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의 참뜻이 아닙니다.
이어서 불타는 수보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여(如如)’한 경지를 무실무허(無實無虛)라고 계속 설해간다.
원문과 한글역 및 영역문을 보겠습니다.
何以故。如來者卽諸法如義。
若有人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於是中無實無虛。是故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
須菩提、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是故名一切法
왜 그러냐하면 如來라 함은 바로 모든 법이 그대로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은
어떤 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기를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말하는 바 일체법이라함은 바로 일체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 하여 일체법이라고
하느니라.
"Why is it so? Because 'Tathagata' means 'all Truth are as they are!'
Subhūti! if anyone says that the Buddha had attained perfect enlightenment, there is in fact,
no such a Truth to attain the perfect enlightenment by the Buddha.
Subhūti! the perfect enlightenment attained by the Buddha is neither truth nor falsity.
Therefore the Buddha says that the Truth of everything is the buddha's Truth.
Subhūti! what's called the Truth of everything is not the Truth of everything.
Therefore they are named 'Truth of everything.' "
여기서 또 실(實)과 허(虛)의 문제가 나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究竟의 境地이고 如來의 境地입니다.
제14 離相寂滅分에서도 나왔던 주제입니다. 제14 離相寂滅分이나 여기 제17 究竟無我分은,
같은 如來의 境地를 설하는 부분입니다.
如來의 境界는 ‘相을 떠난 맑고 고요한 境地’인 離相寂滅로 표현하기로 하고, 여기에서처럼
‘般若의 窮極은 나가 없다’는 究竟無我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如來의 境界에서는 相이 없는 寂滅의 자리고 내가 없는 구경의 자리입니다.
허망(虛妄)하다는 등의 言說이 떠나 있는 자리입니다.
言語의 극(極)을 말한다면 ‘진여(眞如)’라고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진여라는 말도 상대적인 말이 아닌 절대적인 말인 이상,
그것이 실(實)이라든가 허(虛)라는 相對的인 言語가 떠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무실무허((無實無虛)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실(眞實)은 허망(虛妄)의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絶對의 자리는 ‘相對’를 떠난 자리이기 때문에
부득이 無實無虛라든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不來不去, 不常不斷, 不一不異 등의 言說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각(覺)의 世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凡夫들의 생각(妄念)으로는
얻는 법(法)도 있고 그 境地는 진실(眞實)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生覺이 끊겨 妄想 妄念이 사라진
如來의 境界에서는 그러한 言說이 寂滅한 究竟의 자리이므로 진실(眞實)이라든가 허망(虛妄)이라는 언설이
끊긴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相對的인 말인 실(實)이라고 해서도 안 되고 허(虛)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실무허(無實無虛)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六祖는「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實로 얻을 것이 없는 마음으로 菩提를 얻는 것이어서
얻는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菩提를 얻는 것이고, 이 마음을 떠나서 밖에서 다시
菩提를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무실(無實)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얻겠다는 마음이 寂滅하면 一切의 智慧가
本來대로 있는 것이어서 만행(萬行)이 圓滿하게 모두 갖추어져 항하사만큼의 德性이 작용하여 전혀 결함이
없으므로 무허(無虛)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서는 이 무실무허((無實無虛)를 六祖는 다음과 같이 설한 바 있습니다.
「무실(無實)이란 法의 체(體)가 空寂해서 얻을 수 있는 相이 없다는 것이며,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항하사만큼의 성공덕의 작용이 있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무허(無虛)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하여
無所得이므로 眞實이 아니고 성공덕이 있으므로 허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조의 이 두 가지 설법 모두는 적절한 설법이 되지 못한다. 이미 위에서 필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여래가 이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각(覺)의 세계는 망념이 사라진 구경의 자리이므로 진실(眞實)
이라든가 허망(虛妄)이라는 언설이 끊긴 자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상대적인 말로 실(實)이라고
해서도 안 되고 허(虛)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실무허(無實無虛)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육조는 여기에서 ‘이래서 실(實)이 아니고 저래서 허(虛)가 아니라’고 상대적인
언설을 쓰고 있으므로 적절한 설법이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한 물건도 취하지 아니하므로 실다움이 없고, 한 물건도 버리지 아니하므로 헛됨이 없다.
마음밖에 따로 구할 길이 없으므로 실다움이 없고 얻을 바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덕성이 완전히 갖추어지므로
헛됨이 없다.(우학스님의『금강경 핵심 강의』, pp.229-230.)로 해석하여 양변(兩邊)을 부정하는 이치가 아닌
실(實)과 허(虛)를 취하고 버리는 상대적 언설의 무소득(無所得)의 경계로 이를 보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혹자도「실(實)도 없다는 것은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얻은 법이 없다는 것이다. 허(虛)도 없다는 것은 이처럼 일체법이 적멸한 청정심에서
부동하는 가운데 설하는 것도 있고, 듣는 것도 있으며 얻는 것도 있고 전하는 것도 있는 것을 말한다.
(고목스님의『금강경』, p.304.)」고 하여, 불(佛)의 경계에서의 무소득(無所得)과 범부경계에서의
소득(所得)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가 입장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상대적 언설을 버린 여여(如如)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상대적 언어 그 자체의 입장에서 설하고 있음은, 이 글귀 무실무허(無實無虛)가 나온 동기인
‘여래자즉제법여의(如來者卽諸法如義)’ 즉 ‘여래’라는 것은 바로 일체법이 상대적 양변(兩邊)을 떠나
그대로 같다는 ‘뜻’에 어긋난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기를 일체법은 모두가 ‘불타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일체법은 그대로 진실이고 여여하여
한결 같아야 합니다. 차별이라는 ‘언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일체법이 여여하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신론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일체제법은 오직 망념에 의해서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만약 차별이 생기게 하는 ‘망념이 마음에서 떠나면’,
차별이 있던 ‘일체경계의 모습도 없어진다’고. 그래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떠나 있고, 명자상
(名字相)을 떠나 있으며, 심연상(心緣相)도 떠나 있어, 필경 평등한 것’이라고. 또한 이것들은 변하거나 달라지는
‘변이(變異)가 있는 것이 아니며, 파괴될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은 오직 일심(一心)이기 때문에 이를 진여(眞如)
라고 이름 한다’라고요.
그래서 ‘일체언설은 빌어온 가명(假名)이고 진실이 아니며, 단지 망념 따라 말하는 것일 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여(眞如)라는 말도 역시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언설의 극(極)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며,
말로서 말을 버리는 것’이라고요.
기신론은 위와 같이 지금 금강경이 설하고자 하는 일체법이, 모두 불타의 법이라는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타의 법’, 불법(佛法)은 바로 ‘진여’ 그것이고, ‘여래’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타는 여기에서 수보리에게 ‘말하는 바 일체법이라함은 바로 일체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일체법이라고 한다”고요.위에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이라고 설하여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불법(佛法)인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일체법이라고 설합니다. 일체법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떠나 있고, 명자상(名字相)도 떠나 있어, 필경 평등의 자리라고 설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일체언설도 빌어 온 가명(假名)이고, 진실 그대로가 아니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바로 ‘진여(眞如)’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진여라는 말도 역시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언설의 극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며 말로서 말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체법은 일체법이라는 말로서는 그 실상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며 단지 그 이름이 일체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11. 9. 30.
대승기신론연구회장 전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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