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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變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이런 試圖를 두고, 自由主義者라면 個人的 苦痛이니 個人이 堪當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治癒的 觀點을 가진 ‘宗敎人’이라면, 愛着과 執着이 낳는 그런 苦痛은 特別한 個人들의 病的 證狀이니 그 愛着과 執着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反復이 同一함 規定하지만 同一함 속에는 差異가 存在
差異의 힘을 認定하는 것이 無常을 바르게 理解하는 것
그러나 同一性의 思惟, 同一性의 欲求가 産出하는 苦痛은 個人的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必然的 無知의 또 하나의 特徵을 指的해야 分明해진다. 有用性과 必然性을 갖는 이 無知는 個人的인 無知나 ‘主觀的인’ 誤謬가 아니라, 비슷한 環境에서 살고 비슷한 말을 사용하는 이라면 대개는 共有하고 있는 集團的이고 ‘客觀的인’ 無知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前에 본 사람과 同一하다고 믿는 것 만큼이나,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나무가 옆에 있는 이가 보고 있는 것과 同一하다고 믿고 말하고 行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自身이 生覺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옆에 있는 이 또한 同一하게 生覺하게 하고자 하기를 바란다.
이는 필연적 무지가 각자의 삶에 局限되지 않고 작용함을 뜻한다. 가령 韓日戰 축구시합을 하는데, 자신은 日本팀의 축구스타일이 좋다며 일본팀을 응원하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내부의 적’으로 취급될 것이고, 자칫하면 남들에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 韓國人이라면 韓國人의 同一性에 附合하도록 말하고 行動해야 한다는 同一性의 意志가 現實的인 ‘힘’으로 作用하는 것이다.
그건 심지어 學校에서 反復하여 가르쳐지는 것이다. 男子들이라면 어떤 일로 울다가 “男子가 이런 일로 울면 안되지”라는 말을 듣지 않은 이 없을 것이다. 男子는 엔간해선 울면 안된다는 同一性(正體性)이 강요되는 것이다. 덕분에 男子들은 성인이 될 때 쯤이면 엔간한 일론 울지 않도록 感情이 말라버린다. 男性들의 感情的 同一性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 치마나 스타킹에 매료되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男子가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또라이’가 될 것이다.
이른바 ‘正體性’을 만들고 維持하는 힘이 종종 폭력마저 同伴하며 作動하는 것이다(‘正體性’이란 ‘同一性’을 뜻하는 identity란 同一한 英語單語의 번역어이다). 同一性의 權力, 그것이 秩瑞와 調和의 이름으로 强要된다. 同一化의 無知, 이는 경책되기보다는 권고되고, 억제되기보다는 조장되는 무지, 나아가 가르쳐지기고 하고 강요되기도 하는 無知다.
이 同一化의 無知는 단지 내 生覺만이 아니라 集團的으로 共有하는 환(幻)이다. 함께 사는 이들의 無知가 모여 만드는 世界다. 그렇기에 내가 아니라 ‘一切有爲法’이 “꿈이고 허깨비고 幻影”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저 根本的인 無知에 依해 만들어진 集團的 幻影이요 顚倒된 幻想인 妄想의 世界다. 現實的인 必要 때문에 實相을 보지 못해 만들어진 虛構的 幻影이지만, 避할 수 없는 幻影이고 비슷하게 사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共有하고 있는 集團的 幻影이다. 그래서 쉽게 깰 수 없는 꿈이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現實的 幻影이며, 個人이 벗어나는 경우에조차 그것을 압도하는 現實的인 힘을, 많은 경우 權力이나 爆力이라고 명명되는 그런 힘을 稼動시키는 有力한 幻影이다.
석가모니 당시에 사람들을 분류하고 주어진 동일성/정체성에 따른 직업이나 삶을 강요했던 신분적 카스트 또한 이런 同一化의 權力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前生의 ‘業’으로 現生의 身分的 同一性을 正當化하고, 現生의 業을 다음 生에 잇는 業과 輪廻의 同一性은, 이런 同一性의 權力이 여러 生마저 貫通하며 作動함을 보여준다. 反面 어떤 業도 緣起的 條件에 따라 그 本性이나, 未來, 심지어 過去마저 달라질 수 있음을 설파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現生의 刹那的 瞬間에조차 그런 同一性이 없음을 통해 그 權力의 作用을 停止시키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同一化의 意志, 同一性의 捕捉을 겨냥하는 ‘同一性의 思惟’가 現實的 힘을 갖는 集團的 虛構를 만들어내고 維持한다. 差異의 思惟, 差異의 哲學은 이런 同一性의 思惟가 稼動시키는 權力과 爆力에 異意를 제기하고 그것을 中斷시키고자 한다. 同一化하려는 意志에 反하여, 差異를 肯定할 것을 요구한다. 삶의 필요로 인해 同一化하는 思考를 避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實相이 無常한 變化의 흐름만 있는 것이라면, 그 同一性 안에 差異를 새겨 넣고 그 差異가 作用하도록 해야 한다.
‘差異의 哲學’을 철학사의 전면에 부각시켜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위해 동일성이 ‘반복’에서 온 것임을 주목한다. 세상에 동일한 두 장의 나뭇잎이 없음에도 ‘은행잎’이란 말로 수많은 나뭇잎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특징이나 형태, 양상의 반복 때문이다. 작년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또한 반복 때문이고, 한번도 같은 장마가 없지만, ‘장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현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어떤 것에도 同一하게 反復되지 않는다. 해는 매일 반복해서 뜨지만, 오늘 뜨는 해는 어제 뜬 해, 지난달에 떴던 해와 다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다. 따라서 反復이란 差異의 다른 이름이다. 反復 안에서 差異를 意圖的으로 지울 때, 同一性이 發生한다. 同一性이란 差異 없는 反復이다. 아니, 差異가 지워진 反復이다.
모든 반복 안에 사실은 차이가 숨 쉬고 있고, 모든 동일성 속엔 차이가 숨어 있다. 그 차이로 인해 동일성은 어느새 변이의 선을 타게 되고, 다른 것이 된다. 가령 ‘남성’이라고 동일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숨어 있다. 거칠고 힘 좋은 전형적인 남성도 있지만, 섬세하고 눈물 많은 남성도 있고, 여성보단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도 있고, 여성의 옷을 더 좋아하는 남성도 있고...... ‘원래’는 ‘버젓한’ 남성이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여성적인 감수성을 갖게 되고, 여성의 옷을 입기 시작하는 남성도 있다. 별의별 남성들이 있다. 男性 안에 女性性이 숨어 있고, 女性 안에도 男性性이 숨어 있다. 無常함이란 男性이란 이 同一性의 無常함이고 無力함이다. 無常함을 본다 함은 그 안에 있는 差異에 의해 分割되고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 同一性임을 보는 것이다.
남성적 정체성/동일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同一性의 思惟는 이 모든 差異가 最少化되고 사라지도록 억누르고 抑壓한다. 反面 無常과 差異를 본다면, ‘남성’이란 동일성 안에 수많은 差異들이 숨어 있음을 보고, 그것들에 따라 同一한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差異의 哲學은 그런 差異化에 대해 억지로 막지 않고 열어둘 것을 요구한다. 그런 差異化에 의해 發生하는 多樣性을 肯定하는 것이고, 同一性에 가두려는 權力에 對해 抗義하고, 差異를 肯定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必然的 無知에 의해 構成되는 避할 수 없는 虛構의 世界, 業種子와 名言種子에 依해 構成되는 이 同一性의 世界에 대해, 그것이 꿈과 같은 幻影이고 물거품 같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恨歎으로, 하염없는 ‘虛無’의 色으로 現實을 채색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反對로 無常한 差異化를 놓치고, 모든 것의 ‘根底’에 있는 끊임없는 差異의 힘을, 變化와 生成이 만드는 열린 世界를 가리는 同一性의 幻影이 無知에 依해 構成된 것임을 指的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벗어나 差異가 肯定되는 그런 世界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無常의 實相을 놓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인식론적’ 관심보다는, 그 同一化하려는 意志의 다른 이름인 愛着과 執着으로부터 各者의 삶을 벗어나게 하려는 ‘倫理學的’ 關心에 따른 것이다. 問題는 ‘저 사람 몸에 꽂힌 화살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것인가를 아는 게 아니라, 그 화살을 얼른 뽑아 治癒하는 것’이란 <아함경>의 얘기가 뜻하는 게 바로 그것일 터이다. 그런데 同一化하려는 힘이 ‘眞理’의 이름을 얻어 가르쳐지고 集團的으로 强要되는 지금 世界에서, 그 倫理學的 關心은 他人들, 아니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同一性의 權力을 停止시키고 弱化시키는 ‘政治學的’ 關心을 뜻한다고 해야 한다. 이를 ‘差異의 政治學’이라고 명명하자.
석가모니가 당시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身分이나 性에 개의치 않고 모든 이들을 승려로 받아들였던 것을, 심지어 앙굴리말라 같은 ‘악마적 범죄자’로 지탄 받는 이들마저 승려도 받아들였던 것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굳이 불교라는 말에다 큰 수레를 뜻하는 ‘大乘’이란 말을 다시 덧대었던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윤리학이란 말이 빠지기 쉬운 ‘개인’이란 영역이 아니라 중생이라고 부르는 뭇사람들, 집단적인 동일성의 권력으로 인해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안고 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變하고 사랑이 떠날 때는 어떠합니까?”
“마음에 부는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