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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無我 - 上

장백산-1 2015. 3. 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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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無我 - 上
주어진 條件 따라 다르니 어떤 것이 ‘나’인가
2015년 03월 03일 (화) 11:08:59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카게(影)’란 일본어로, 그림자(幻影)란 뜻이다. ‘카게무샤’란 말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적들의 정탐에 대처하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 城主와 같은 중요한 이를 代身하게 하는 ‘무사’를 뜻한다. 구로자와의 영화 ‘카게무샤’는 전국시대 유명한 가문의 성주인 다케다 신겐의 카게무샤가 되어 살았던 한 도둑을 둘러싼 얘기를 다룬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敵의 攻擊에 家門이 몰락할 것을 예감한 다케다 신겐은 3년간 자신의 죽음을 감추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적의 정탐이 있을 것이기에, 그들을 속이려면 자기 일족들을 먼저 속여야 했다. 다케다 신겐의 동생은 극비리에 신겐을 빼닮은 도둑을 하나 데려다 설득해 죽은 형의 카게무샤 역을 하게 한다.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던 그 도둑은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되는데, 어느덧 신겐의 役割에 沒入하게 된다. 가족들마저 속일 수 있었지만, 다케다가 타던 말은 속일 수 없었기에 가짜임이 드러난다.

 

결국 敵들마저 알게 되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공략으로 결국 가문은 몰락한다. 그런데 카게무샤 役을 그렇게 끝내고 나온 이 도둑은, 자신이 다케다 신겐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다케다 家門이 歿落하는 마지막 戰鬪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그 패배를 지켜보며 마치 自身이 敗하고 몰락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린다.

집에선 착한 아빠이지만  피의자 앞에선 고문경찰
 眞正한 自我란 애초없고  外部環境에 따라 달라져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實際 다케다 가문과 아무 關聯이 없었음에도 다케다 일족의 몰락에 고통스레 흘리는 이 눈물은 누구의 눈물일까? 우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애초의 ‘도둑’이라면, 그처럼 眞心으로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다. 애초에 그는 카게(그림자)가 되길 거부하기조차 했으니 이 苦痛의 ‘主體’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 눈물은 분명 다케다가 있었다면 흘렸을 눈물이다. 그러나 우는 이 사람은 처음부터 明示했듯이 다케다가 아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사람이 ‘나’라고 스스로를 稱할 때 그 ‘나’는 대체 누구일까? 이게 아마 그 影畵를 통해 구로자와가 던지고 있는 質問일 것이다. 이 質問은 의도했든 아니든 近代哲學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를 겨누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疑心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고선 確固한 것에 到達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疑心할 때조차, 疑心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疑心하는 ‘나’였다. 그것 疑心하는 '나' 없인 疑心조차 不可能할 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내’가 疑心하는 限, 疑心하는 ‘내’가 存在하는 것은 確固하고 自明하다고 生覺했다. 疑心하는 것을 生覺하는 것으로 바꾸어도 다르지 않다고 보아 그는 “나는 生覺한다, 고로 存在한다”라는 結論에 도달한다. 무슨 生覺을 하든, 生覺을 하는 ‘내’가 存在한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나’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나’가 ‘나’임은 自明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물었어야 했던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그 ‘나’가 대체 누구냐고. 사실 데카르트의 ‘나’는 단지 데카르트라는 특정 개인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疑心을 하고 生覺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너도 모든 걸 疑心해 봐 그럼 네가 存在함을 確信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저 도둑도 다케다인 양 전장으로 달려가 울고 있는 저 사람도, 구로자와도,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모두 해당된다.

 

그러니 카게를 하며 다케다의 自我에 사로잡힌 저 도둑의 ‘나’가 누구인지 答해야 한다. 處한 條件과 環境에 따라서 다르게 行動하기 마련인 모든 이들, 그래서 종종 같은 한 사람의 ‘人間’인지 疑心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 家族에겐 아주 착하고 좋은 아빠요 남편이지만, 彼疑者들을 잡아 고문할 땐 끔찍한 괴물이 되는 고문경관뿐만 아니라, 집에서, 學校에서, 會社에서, 술집에서 相異한 役割을 하고 各異한 行動을 反復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니까.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環境과 條件에서 分離되고 孤立된 ‘나’란 있을 수 없다고 非判한다. 모든 ‘나’, 모든 ‘自我’란 그가 속한 ‘世界’ 안에 있는 나이고 그 世界의 規定 속에서 存在하는 나이다. 構造主義 以後 現代 哲學者들이 데카르트의 ‘主體’ 槪念에 對해 非判하는 것은 약간 다른 理由에서다. 主體는 어떤 生覺이나 行動이 出發하는 不變의 出發点이 아니라, 그 自體로 텅~빈 자리일 뿐이며, 텅~빈 자리인 主體 그걸 둘러싼 關係 속에서 채워지는 結果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環境, 條件에 따라 關係에 따라 우리는 다른 主體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心理學者나 腦科學者들도 ‘確固한 나’나 ‘確固한 自我’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가령 ‘多重人格障碍’ 精神疾患者들은 전혀 다른 듯이 보이는 相異한 人物처럼 生覺하고 行動한다. 이들의 腦를 스캐닝해보면 다른 人格이 될 때마다 腦의 다른 部分이 活性化된다고 한다. 이는 逆으로 우리 또한 腦의 다른 部分을 저런 式으로 使用하게 되면, 여러 人格의 人物로 살게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다중인격’을 구성하는 相異한 人格의 人物들이 하나의 腦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우리가 여러 役割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러 패턴의 行動을 할 수 있는 腦의 이런 潛在性 때문이니까. 다만 그 여러 役割들에 一貫性이 없다면, 남들도 자신도 곤혹스러워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反面 내가 '하나뿐인 眞正한 自我’로 꽉 차 있다면, 우리는 다른 關係, 다른 環境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경우 世上과의 不和를 겪을 때마다 얼른 어린 시절의 ‘나’로 退行해버리게 된다. 이런 退行이야말로 疾病이다.

 

하나의 有機體를 이루는 身體를 들어 ‘나’의 확고함을 증명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나 심리학자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기들의 身體가 有機的 全切가 아니라 ‘部分對相’들의 集合體임을 지적한 바 있다. 아기의 입은 엄마의 젖가슴에 反應하는 部分對相이지, 特定 機能을 修行하도록 分化된 ‘器管’이 아니다. 그래서 가짜 젖꼭지를 빠는 것으로도 充分히 滿足을 얻는다. 아기들이 自己 身體가 하나의 有機的 全切임을 알게 되고, ‘自我’가 形成되는 것은 生後 18~24개월경이라고 한다. 거울 속에 있는 自己 모습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때가 바로 그 때다. 이 時期를 精神分釋家 라캉은 ‘거울段階’라고 부른다.

 

이때쯤까지 腦의 神經細胞들은 千兆 個 가까운 數의 시냅스로 連結된다. 우주 전체의 별보다 많은 숫자다. 自我가 形成된다 함은 行動이나 思考에 一定한 패턴이 만들어짐을 뜻한다. 그에 따라 連結되어 있던 시냅스 가운데 쓰지 않는 것을 다시 斷絶시킨다. 이때 2/3 정도의 시냅스가 斷絶된다. 모든 方向으로 열린 潛在力이 ‘自我’라는 말로 要約되는 反復的 選擇紙만 남겨두고 縮小되고 消滅되는 것이다. ‘나’라고 부를 어떤 패턴의 人格이 形成되는 過程은 엄청난 數의 시냅스, 그것이 할 수도 있었을 巨大한 潛在性의 縮小 내지 消滅을 同伴하는 것이다. 어떤 自我가 살아남을 것인지는, 特定한 뉴런들을 活動하게 刺戟하는 外部 環境과 條件에 依해 決定된다.

 

自我란 이처럼 外部 條件 環境에 依해 活動을 持續한 뉴런과 시냅스로 連結되어진 그 連結網과 相依相關的인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아기들은 12개월경 以前에는 모든 소리를 區別할 수 있지만, 그 때가 지나면 母國語를 쓸 때 아무 役割을 하지 않는 소리(音素)를 區別하는 能力을 잃게 된다. 自我 내지 人格의 形成이란 이와같이 特定한 것만 알아듣고 特定한 方式으로만 生覺하고 行動하는 身體的 制限과 함께 온다. 이는 그나마 남은 1/3의 시냅스마저 끊어지게 한다. 보통 腦細胞의 10%도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연후에도 腦細胞는 계속 生成될 수 있고, 腦細胞(뉴런)들은 새로운 連結에 對해 열린 채 있다. 새로운 關係, 새로운 生覺은 새로운 連結網을 만들어낸다. 예전에 심리학자들은 3살 정도면 사람의 性格이 確立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最近 硏究에 따르면, “사람의 性格은 평균 50살이 되어서야 安定的으로 確立된다”고 한다. 事實 우리의 腦細胞는 至極히 유연하고 可變的이어서 그 以後에도 계속 變化되고 再構成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性格도 變할 수 있다. 그렇기에 原來의 ‘自我’나 ‘本來의 眞正한 나’ 같은 것은 없으며, 實存主義자들 말처럼 自身의 ‘自我’를 實現하려는 努力도 아무 意味 없는 일이다. 自我는 腦細胞가 外部 環境 條件 關係 등 外部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潛定的인 安定性을 뜻할 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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