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11. 보시-중

장백산-1 2015. 3. 24. 02:32

 

 

 

 

 

 

> 뉴스 > 연재 | 철학자 이진경 불교를 말하다
11. 보시-중
주었음도 받았음도 모르게 주고받는 선물
2015년 03월 23일 (월) 11:32:29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타얼사만큼은 아니지만, 불화의 주인공인 보살들 역시 화사하게 성장(盛裝)한 차림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가령 일본 카가미(鏡) 신사에 소장되어 있는 高麗佛畵 ‘水月觀音圖’는 내가 본 어느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그림인데, 거기서 관음보살은 옷부터 목걸이와 관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불상들이 수행자의 더없이 素朴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알다시피 菩薩이란 ‘보시’의 이타행과 짝이 되어 대승불교의 전면에 등장한 새로운 槪念이다. 정확하게 ‘선물’ 내지 ‘증여’를 뜻하는 布施는 육바라밀의 첫 번째 항목으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八正道엔 없던 것이다.

선물을 선물로 의식한 순간  채무·기대감이 동시에 생겨
보시는 이런 부담서 벗어나  주고받음서 자유로운 상태

 

 

 

대승의 보살이 한결 같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등장하는 건 타얼사의 ‘소모’를 위한 장식과는 약간 다른 이유를 갖는 듯하다. 치장을 권하고자 화려한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치장을 권하는 순간, 그를 위한 재물의 소유를 개인에게 권하는 게 되고 말 것이다. 불화에서 보살의 치장은 반대로 치장으로 상징되는 부유한 이들이 크게 늘어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일 게다.

 

 

생각해보면 석가모니 사후 500년이 지나는 동안 국가나 상인들의 부가 크게 늘어났을 것이고, 사원에 오는 이들 가운데는 그런 이들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렇게 부가 늘어나면 부의 반대편에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게 되고, 공동체는 빈부에 의한 분열과 대립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공생적인 공동체의 삶을 가르치는 불교에서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 부유한 이들에게 ‘보시’를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치장의 이유는 상반되지만 공동체를 위해 증여와 소모를 실행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티베트의 사원에서 국가보다 많은 돈을 써 없앤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布施는 서로 기대어 사는 중생들의 삶에서, 共同體라고 명명되는 關係를 形成하는데서 지극히 중요하다. 서구에서 공동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commune’이란 단어는 선물을 뜻하는 ‘munus’와 결합을 뜻하는 ‘com’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선물을 통해 결합된 사회, 그게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이사 가서 떡 몇 장을 이웃에 돌리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공동체는 그만두고, 이웃과 얼굴이라도 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작정 가서 벨을 누르곤 ‘옆집에 이사왔는데요’라며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면 서로 민망한 일만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떡 두 장 들고 가면 자연히 문이 열릴 것이고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며, 그걸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디언 사회뿐 아니라, 우리를 비롯해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는 선물로 결합된 공동체사회였다. 포틀래치는 극단적 사례로 보이지만, 음식이 흥건히 남도록 차려놓고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드세요”라고 말하는, 사라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관습도 소모적인 성격의 증여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시사회에서도 선물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선물을 받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답례를 해야 한다. 선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답례는 일종의 의무였다. 그래서 인류학자 모스는 선물 또한 교환의 일종이라고 본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고, 주었으면 받게 마련이니, 선물의 교환이라는 것이다. 이는 두 번의 선물을 한 번으로 교환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선물에 답례의 의무가 따를 경우, 경우에 따라 교환이나 채무가 될 위험을 부정하긴 어렵다. 선물을 받았다는 걸 의식하는 한, ‘무언가 되갚아야 하는데’ 하는 채무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답례를 바라고 선물을 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흔하고, 이를 겨냥해 ‘뇌물’이라는 말까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러니 노자 풍으로 말하면, “선물을 ‘선물’이라고 하면 선물이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선물이 선물임을 의식하는 순간 받는 이에겐 채무감이 생기고, 주는 이도 뭔가 해주었으니 돌아올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에, 그건 선물 아닌 ‘교환’이나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선물의 역설’. 이런 이유에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선물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선물과 공동체의 미덕에 주목했던 나 같은 이로선 극히 당혹스런 얘기다. 정말 선물은 불가능한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절대적 선물’조차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금강경’에서 설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바로 그것이다. 아상가가 주석을 달고 있듯이, 보시를 행한 자신에 대해서도, 그로 인한 보답에 대해서도, 그런 선행의 결과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머무는 곳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應無所住 行於布施)”이다.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는 것, 그렇기에 받으려는 마음도 동반하지 않고, 그렇기에 받은 이에게 어떤 채무감도 부과하지 않는 것, 따라서 교환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는 증여, 그게 절대적인 증여고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절대적 선물이다. 전에 어딘가에서 달라이라마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한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주었다는 생각을 하고 주면, 받은 사람도 그걸 잘 알게 마련이다. 받았음을 의식하게 된다. 반면 주었다는 생각조차 없이 주었다면 받은 사람도 받은 줄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무주상보시의 절대적 선물은 선물인줄도 모르는 채 주고받는 선물이다. 도대체 이런 선물이 어떻게 가능한가? 있을 수 없는 선물이란 점에서 ‘불가능한 선물’ 아닌가?

 

膳物이란 말에서 어떤 물건이나 돈, 혹은 ‘재능’이나 봉사 같은 가시적인 것만을 떠올리는 한 이런 선물은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가시적인 선물이란 주고받는 게 보이는 선물이니, 선물이란 생각 없이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비가시적인 것은 받아도 선물인 줄 모르고 주면서도 선물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 선물이 되기 쉽다. 불교에선 ‘불법’이라고 표현하는, 삶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은, 설하는 이도 특별히 선물이란 생각 없이 그저 할 일을 한다며 설하기 마련이고, 듣는 이도 선물이라는 생각 없이 그저 ‘듣는다’ 내지 ‘배운다’는 생각만으로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좋은 삶을 살려는 이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종류의 선물을 불교에선 ‘법시(法施)’라고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외시(無畏施)’라고 부르는 또 다른 종류의 보시도 있다. ‘두려움 없는 마음을 줌’이란 뜻이지만, 불안이나 두려움을 덜어주고 기쁨이나 편안함을 주는 것을 뜻한다. 가령 화난 사람 옆에 있으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공연히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어떤 언행 없이도 화의 감응이 내게 신체적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말없이 ‘두려움’을 주고받은 셈이다. 반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득 찬 이 옆에 있으면, 그 감응 또한 내게 전해져 나도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진다. 사람만은 아니다. 언제나 주인을 보면 기뻐하며 달려드는 개는 우울한 기분을 어느새 덜어준다. 단 한 번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가수의 노래에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면, 음악이나 예술이 준다는 생각 없이 어떤 좋은 감응을 우리에게 ‘준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이나 분노의 감정과 無關하게 身體는 이웃한 身體에 무언가를 준다. 신체의 波動이 이웃한 신체에 傳해지면, 어떤 感應을 야기한다. 그래서 주지 않으려 해도 무언가를 주게 된다.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닌데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이도 있다. 여기에서 편하게 해주는 이는 무얼 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고, 편안해하며 좋아하는 이 또한 받았다는 생각 없이 무언가를 받은 것이다.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존재 그 자체만으로 좋은 감응을 주는 이들이다. 存在 그 自體가 말없는 膳物이 되는 이들이다. 無畏施란 存在 그 自體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는 그런 布施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