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8강 | 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 조회 50 | 2015/04/08 18:10:32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52
法性偈 강의를 계속 하는 중에 지난 시간에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나오는 부분에서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하는 부분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마도 華嚴思想이나 이런 것들을 工夫하지 않았던 분들은
事事無碍法界 하면 뭔지 생소하셨었다 어려웠었다는 얘기가 있으셨던 거 같아서
事事無碍法界에 대해 조금 더 부연설명 드리겠습니다.
事事無碍法界를 法界緣起라고도 해서 大乘佛敎에서 最高峰에 있는 經典이 뭐냐 하면
華嚴經을 얘기하구요. 화엄경의 核心思想이 뭐냐 하면 事事無碍法界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중국의 화엄종의 스님들이
多樣한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는 다양한 어떤 敎理, 가르침들을 풀고 있단 말이죠.
예를 들어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던가 ‘십현문(十玄門)’, ‘십현연기 (十玄緣起)’ 이래서
華嚴의 事事無碍法界 思想을 설하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핵심이니까,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할까
그래서 수없이 많은 가르침들이 나온 겁니다.그래서 이 事事無碍法界가 華嚴經의 核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佛敎의 核心이고 大乘佛敎의 核心 思想인 것이죠.
이걸 이제 제가 그 核心으로 말씀 드려서 이 現實 萬物, 지금 여기 나타나 있는 現實 그 自體를
있는그대로 眞理의 性稟이 드러난 것으로 보는 것을 事事無碍法界라고 한다고 했어요.
좀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이렇게 네 가지, 四種 法界, 네 가지 眞理의 世界를 설하고 있는데, 四種法界는 그야말로
理致와 現實, 現象世界로 봤을 때 理法界는 眞理의 世界, 法界란 世界를 眞理의 世界라고 해서
法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理法界라고 하는 理致, 眞理, 法身, 부처님의 世界, 眞理 그 自體의
世界를 理法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實際 現實世界에서 살아가고 있는 現象世界, 이 現象世界에서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다 나누고, 말에 의해서 다 나뉘어져 있는, 온갖 分別의 世界 이런 世界를 事法界羅고 부르는
거죠. 現象世界다 이거죠. 現象論 本體論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本體論이 理法界라고 한다면 現象論은 事法界인 것이죠.
理事無碍法界는 이 눈앞에 드러나는 現實世界, 現象世界인 事法界가 理致의 世界, 本質의 世界,
理法界와 서로 無碍無障해서 서로 다르지 않다. 서로 다르지 않아서 理法界와 事法界가 서로
無碍하다 장애가 없다 卽, 다시 말해서 우리가 生覺하기엔 여기에 이렇게 衆生의 世上인 現實
世界가 있고, 저기에 부처의 세상인 本質의 世界가 있어요. 眞理의 世界가 있어서, 우리는 衆生
生老病死를 輪廻하는 衆生이고 모든 부처님은 輪廻를 끝내신 분이다. 그래서 부처가 이미 되신
분이다. 卽 부처자리에 가 계신 분이고 우리는 아직 못 간 사람이다. 方便으로 어떻게 설명 하냐면
우리는 이 세계에 있고 저 깨달음의 언덕을 고해 바다를 건너서 파라미타 하는 것
깨달음의 언덕으로 도착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方便으로 그렇게 배웠단 말이죠.
그런데 理事無碍法界에서는 理와 事의 世界가 無碍해서 서로 다르지 않다.라는 얘깁니다.
現實의 世界와 理致의 世界가 서로 둘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現實世界 따로 理致世界 따로 이렇게 배웠지만 眞理를 理法界만 너무 工夫하면 교리에
대해서 빠삭하고 眞理를 다 알겠지만, 이 現象世界에서 부딪히는 自身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火 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火가 本來 텅~비어 空하다는 理法界를 알고 있은들
現象 世界에는 接木이 잘되지 않는단 말이죠.
그래서 理致의 世界와 現象의 世界를 아울러서 그야말로 無碍하게 아울러서 깨닫게 된다면
理와 事가 無碍해서 現實 世界를 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 卽, 理致의 世界 대로 살아갈 수가
있겠죠.부처님의 가르침도 알고 理法界에 대해서도 잘 알고 現象의 世界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다면 理事無碍法界라고 해서 이 現實 世界를 理致의 世界와 '하나'가 되게 만들어서
眞理의 가르침을 그대로 現實 世界에 녹아들 수 있도록 아마 우리가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現象 따로 理致 따로 있다라고 우리는 배웠고 現象과 理致가 사실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다. 서로 無碍하다. 서로 걸림이 없다. 理致가 現象이고 現象이 理致다 이렇게
이제 얘기하는 것이 ‘理와 事, 事와 理가 서로 無碍해서 걸림이 없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제 더 나아가서 事事無碍法界는 現象世界와 現象世界 自體가
現象世界 宇宙萬物의 수없이 많은 現象世界라는 自體의 現象과 現象 自體가 서로 걸림이 없다.
서로 自在無碍하고 融通圓融한다. 서로 相卽相入한다. 서로 즉하고 같아지고 서로 서로에게
投入해서 들어가기도 한다. 이 소리에요. 다시 말해서, 낱낱이 現象 世界는 그냥 現象 世界일
뿐이지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나는 衆生일 뿐이지 부처는 나와는 다르지 않느냐?
지금은 중생이다? 부처가 되려면 먼 아직 어리석은 중생들 아니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事事無碍法界에서는 理致와 現象, 이(理)와 사(事)가 그냥 딱 아무런 허물이 사라지는
境界입니다. 事事라고 표현을 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理致는 따로 있어서 안보이고 現象,
事는 눈에 보인다 이렇게 生覺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둘로 나눠 놓는단 말이에요
그렇게 事事無碍法界에서는 저 現象 現實世界 뒤에 숨어있는 理致라는 世界가 따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100%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이 現實世界로서 眞理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나도
숨겨진 것이 없다. 卽,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 이 말입니다. 事法界를 봐도 山은 山이고
물은 물이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다시 되돌아서 事事無碍法界로 다시 돌아가면 事와 事가 서로
無碍하다. 다시 말해서 現象 世界의 하나하나가 理致의 世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現象 自體가
眞理다 이 말입니다.
이 現象 世界에 드러나 있는 이 몸둥아리, 다 서로 分別되어 있는 거 같은 조각조각 나눠져 있는 거
같은 이 온갖 分別 妄想의 世界 이 衆生의 世界 이 現象 世界가 그대로 眞理의 世界다.
現實 世界가 그대로 眞理의 世界이기 때문에 現象과 眞理를 따로 나눌게 하나 없다는 겁니다.
現象 世界 이 自體로 드러난 宇宙萬物 모든 것이 그대로 眞理다. 그래서 이 事事無碍法界에서는
온 宇宙萬物이 서로 서로 완전하게 나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眞理의 世界입니다. 법성원융
무이상 (法性圓融 無二相) 제법부동 본래적 (諸法不動 本來漃)에서 法의 性稟, 眞理의 性稟은
圓融해서 둘로 나뉘는 差別된 相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둘로 나눠 놓으면 곧바로 이 世界는
生覺 妄想 分別의 世界입니다. 生覺이 만들어낸 幻想의 世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서 世上을 둘로 나눠 놓음으로써
生과 死, 涅槃고 地獄, 衆生과 佛, 너와 나, 잘난 사람 못난 사람, 長.短, 高.低, 去.來, 美.醜, 善.惡,
陰.陽 등 이렇게 끊임없이 나누지만, 이 事事無碍法界에서는 그렇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자 여자,
스님 신자, 뭐 이런 모든 둘로 나누는 중생과 부처라는 모든 둘로 나누는 分別心, 망상 , 생각, 관념,
개념 등 이分別心이 하나도 붙을 자리가 없는 그런 것을 얘기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그래서 이 事事無碍法界는 生覺과 槪念 觀念 妄想 識 알음알이 知識 認識과 判斷으로 接根할 수 있는
世界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꽉~막힐 수 밖에 없는 世界입니다. 理事無碍法界는 理致의
세계를 설명하고 現象 世界를 설명하면서 現象世界를 잘 살려면 이러이러한 理致대로 살면 된다.
執着 없이 살아라. 이런 다양한 法門들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事事無碍法界 法門에는
그런 얘기를 一切 方便의 法門을 전혀 부칠 수가 없단 말이죠.
事事無碍法界에선 그냥 모든 모든 것, 일체제법(一切諸法)이 있는 그대로 實相, 참모습이다.
저라는 존재, 여러분이라는 존재, 방석이라는 이런 그 모든 것이 그거 自體로써 完全한 眞理를
드러내고 있다. 제가 여기서 손을 펴고 있었다 하면 이것이 사실은 백프로 眞理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손이 접었다 폈다 하고 있구나. 접을 땐 작아지고 클 땐 커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解釋과 分別로 손이 접히고 펴지는 現象을 해석하는 겁니다. 事事無碍法界는
이걸 解釋하는 것이 아니에요. 손을 펴고 접을 때 이 現象 이것이 바로 眞理입니다.
이게 바로 眞理입니다.
‘眞理는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어떤 스님이 손가락 하나를 딱 들었단 말이죠.
‘道가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어떤 스님은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한단 말이죠.
어떤 스님은 죽비를 한번 딱 치고, 어떤 분은 ‘뜰 앞의 잣나무’다. ‘똥막대기다.’ 이랬단 밀이죠.
이게 事事無碍法界에서는 生覺 妄想 煩惱 分別心 槪念 觀念 알음알이 意識이 오도가도 못하게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生覺 意識 識 알음알이 妄想 마음
觀念 槪念 分別心등으로 虛妄하고 텅~빈 空인 虛構的인 여러분의 삶을 建設해 왔습니다.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 世上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어서 내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런 方式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生覺해 왔지만 事事無碍法界는 世上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걸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고 그래요. 나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差別 分別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드러난 宇宙萬物 現象 自體가 眞理다. 그러니까지금 여러분들은 事事無碍法界를 들으면서
理解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理事無碍法界는 思量 分別로 理解가 돼도, 만약 事事無碍法界를 思量
分別心으로 理解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事事無碍法界를 전혀 理解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 분들이 지난 주에 얘기 하시더라구요. 어떤 분이 ‘오늘 법문은 너무 어려운데..’ 이러더라구요.
그런데 事事無碍法界는 어려워야 합니다. 사방이 온통 꽉 막혀야 합니다. 이게 쉬우면 이걸 알겠다
하면 전혀 事事無碍法界의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이 그냥 꽉 막혀야 되는 겁니다. 分別의 世界로 生覺과 槪念으로 理解하던 世界가 딱 멈춰야
한단 말이죠. 지금까지 여러분이 工夫해 왔던 것은 理事無碍法界의 次元이란 거죠. 執着을 놔라.
어떻게 뭐 어떻게 어떻게 해서 앉아가지고 呼吸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면 眞理를 깨달을 수 있다.
뭐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염불하고 절하고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마음이 고요해 질 수 있고..’
이렇게 설명했단 말이죠 理事無碍法界에서는.....
그러나 事事無碍法界에서는 그런 얘기 전혀 하지 않습니다. 事事無碍法界의 법문에서는....
禪이라는게 事事無碍法界를 딱 드러내는 겁니다. 事事無碍法界는 그렇게 生覺 妄想 觀念
槪念 分別心을 가지고 理解할 수 있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그냥 곧바로 眞理를 드러낸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그 마음을 곧장 딱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마음이라 眞理 그 自體를
곧장 드러내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소리를 딱 듣고 (죽비 소리) 이것이 眞理다.
이 소리를 딱 듣고 우리는 그냥 꽉 막히는 겁니다.
아니면 확 뚫려서 알던가, 부처가 돼 버리던가, 性稟을 딱 봐버리던가. 아니면 꽉 막히게 되는
겁니다.이게 꽉 막히지 않으면 완전히 공부 잘 못 하고 있는 거죠. 眞理가 무엇입니까? (죽비소리)
이겁니다.지금 죽비소리 이 소리를 딱 듣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完全히 通해 가지고 그냥 廓然히
그야말로 過去 現在 未來가 없고, 너와 내가 없고, 둘로 나뉘는 모든 分別이 딱 멎으면서 宇宙 全切가
내가 돼 버리는 그런 體驗이 딱 오지 않으면 막히는 겁니다. 막히는 거 아니면 通하는 거죠. 막히지
않을 수가 없겠죠. 事事無碍法界라는 것을 넘어서려면 通하려면 이제는 生覺 妄想 分別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最上乘 法門에서는 뭐라고 하냐 하면 修行은 필요 없다. 닦을 것은 없다.
지금 여기 이대로 完全하게 完成되어 있는 게 事事無碍法界이고, 現象 그대로가 眞理이고,
지금 여기 이대로가 眞理인데 뭐가 더 닦을 것이 있느냐?
理事無碍法界에서 妄想 生覺 分別心 하나만 걷어내면 진리인데 事事無碍法界에서는 妄想 生覺
分別心 그 自體가 眞理다. 妄想 일어나는 거 그 自體가 眞理다. 그러니까 꽉 막힐 수밖에 없는
거죠 꽉 막히니까 궁금하고 궁금하니까 알고 싶고, 알고 싶은데 모르겠고 이것만 꽉 막힌 채로
이게 알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있을 때 疑情, 의단(疑團), 疑心이라고 하죠. 疑情이 딱 뻥하고
뚫리는 瞬間에 그냥 事事無碍法界라는 말이 뭔지 이 眞理가 뭔지를 바로 그 자리에서
打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事事無碍法界는 思量 分別 理解로 接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이
事事無碍法界 화엄의 사사무애법계 때문에 불교에서는 우리가 많이 듣는 소리가 그거에요.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세상은 언제나 완전하다 언제나 완성돼 있다. 어디로 갈 곳이 없다.
누구나 다 부처 아닌 존재가 없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華嚴의 事事無碍法界입니다.
事事無碍法界는 이처럼 이 世上은 如來라는 性稟, 華嚴이 如來라는 性稟, 眞理라는 性稟
法性圓融無二相 할 때 이 法性, 法의 性稟 眞理의 性稟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게 現象 世上
입니다. 여러분도 중생인 내가 아니라 眞理가 드러나 있는 게, 바로 眞理가 드러나 있는 게,
지금 眞理가 드러나 있는 게, 이 소리(죽비소리)고, 모든 것이 法性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것
아님이 없다. 이 世上 宇宙萬物이 法性이 드러나 있는 眞理의 世上인 것이다. 그래서 事事
無碍法界 이것을 華嚴의 代表的인 思想 또 하나 뭐라 그러냐 하면 華嚴의 性起 思想이라 합니다.
法界의 緣起 思想 이걸 보통 緣起法 이러지요.
因緣에 따라서 緣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일어났다 사라졌다. 그럽니다.
華嚴에서는 法界 緣起라고 하고 法界緣起를 性起思想이라고 부릅니다.
性起란 뭐냐 하면 因緣에 따라서 緣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맞는데
그 因緣에 따라서 緣하여 있는 모든 萬物 그 모든 것 自體가 眞理의 性稟이다.
참性稟이다. 性稟이 일어납니다. 眞理의 참性稟, 法性(法의 性稟)이 일어난 것 밖에 없다.
이 世上에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은 眞理의 性稟, 法의 性稟, 法性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華嚴 性起思想 이렇게 부릅니다. 華嚴 性起思想 이게 이 세상 모두가 진리라는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는 또 다른 方式이 性起思想이구요 이것을 六相圓融이라고 해서 보통
事事無碍法界라는 法界緣起를 드러낼 때 六相圓融, 十玄緣起 두 가지를 가지고 얘기하는데요.
간단간단하게 제가 말씀을 드려보면
緣起法에 法界 緣起에 體.相.用이라고 봤을 때
體는 本體를 얘기하고, 相은 겉에 드러난 모습 모양, 用은 그것의 쓰임새을 얘기합니다
體相用이라고 봤을 때 法界緣起의 體를 설명하는 게 六相圓融중에 여섯가지 相으로 나누는데
그 相이 다 圓融하다 圓融自在하다 이러는데 總相과 別相 이렇게 얘기합니다.
卽, 六相의 첫 번째 緣起가 體로 되어 있는데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인데 즉 이 세상은 全切性
이라는 어떤 總相 총상이라는 게 全切的인 어떤 모습 이것을 總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個別的인
모습이 따로따로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花郞 護國寺 法會라는 總相으로서 全切로서의
하나의 總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명 한명이 個別的인 모습을 지니고 있죠.
집으로 말하면 집이라는 전체의 총상이 있지만 석가래도 있고 기와도 있고 담장도 있고
하나하나의 個別的인 別相이 존재한다.
總相과 別相은 서로를 因緣해서 成立되는 것이죠. 총상은 있는데 별상이 없는건 있을수 없죠.
個別이 없으면 全切도 이루어질 수 없고, 자동차란 총상이 있지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가 갈수가
없고 바퀴가 없으면 자동차가 갈수가 없는 거처럼, 個別的인 것이 全切가 되고 全切가 個別的인
것이다.全切와 個別的인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음 圓融無碍함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존립하게 만드는 根據가 된다. 그래서 全切와 個體느 전혀 다르지 않다.
이 宇宙萬物 全切와 나라는 個體的 存在는 總相과 別相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圓融한 겁니다.
圓融無碍하다. 서로 걸림 없이, 둘이 아닌 하나다. 全切 總相이라고 해도 이 眞理 하나일 뿐
別相이라고 해도 이 眞理 하나일 뿐입니다. 事事無碍法界라는 이 眞理는 말로도 문자로도
무엇으로도 表現할 수가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眞理라고도 표현하고 法이라고도 표현하고
마음이라고도 표현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本來無一物이라고 해서 딱 잡을 수 있는 뭔가는 아니다. 認識의 對相이 아닙니다.
境界가 아니다. 이렇게 표현하죠. 眞理는 境界가 아닙니다. 認識의 對相이 아닙니다.
머리로 알음알음으로 知識으로 眞理를 깨닫는다고 하면 그것은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 眞理속에서 總相이 나오고 別相이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나오고 저도 나오고
生覺도 나오고 妄想도 나오고 부처도 나오고 중생도 나오고 마음도 나왔다. 그래서
華嚴經에서는 부처(佛)와 중생(法)과 마음 이 세가지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다.
眞理에서는 나뉜게 없어요. 오직 이 眞理 하나 그걸 禪師스님들은
사람들이 眞理라는 相을, 法이라는 相을, 마음이라는 相을, 佛性이라는 相을 가지니까
眞理, 法, 마음, 佛性이라는 槪念 觀念 妄想 生覺 分別心 識 알음알이을 가지니까
'이거다' 이렇게 표현했단 말입니다. 이거다 이거 이 진리속에서 總相도 나오고 別相도 나오고
妄相도 나오고 부처도 나오고 모든 것이 이 眞理 하나에서 나왔지 나뉘고 分別 差別된건 하나도
없다. 總相과 別相이 緣起의 體라고 本體 緣起法의 本體에서는 總相과 別相으로 나누고
緣起법에서 겉에 드러난 모습은 相의 側面에서는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으로 나눕니다.
서로 같은 모습과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겉에 드러난 모습으로써는 다 같고 다른 게 나뉘어져
있잖아요. 相의 側面에서 생김새가 다르고 종이는 종이의 생김새가 다르고 서로 다 다르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방석은 그런데 미세하게 또 다르지만 방석은 같이 同相으로도 있단 말이죠.
나무는 나무로서 同相이지만 나무는 種類別로 또 서로 다른 異相이란 말이죠.
우리는 사람으로서 같은 同相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눈코입 달려 있다는 것
똑같은 사람으로 同相도 있지만 異相이란 서로 다르단 側面도 있단 말이죠.
이처럼 同相과 異相이라는 側面을 따로 가지고 있지만 事實은 이게 다 하나의 根源 본바탕
자리에서 나와서 同相과 異相이라는게 서로 依持해서만 서로 同相과 異相이죠.
나 혼자 있으면 差別된 相이라는 게 있을게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내가 같이 있어야지만 같다 다르다라는 差別心이 나올수 있지 않습니까
緣起에 依한 存在로서만 같다 다르다라는 差別이 나올 수가 있어요. 크다 작다라는 큰 것으로 같다
너는 크고 나는 작으니까 우린 서로 다르다 이것은 서로 因緣 關係속에서 緣起關係속에서만 同相과
異相이라는 差別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緣起의 相의 側面이라고 하는데 서로 같거나 다르다는게
實際로 같거나 다르다는게 아니라 因緣에 따라서 잠시 같거나 因緣 따라 잠시 다를 뿐 그 本質에서는
같고 다르다는 게 本來 없다는 겁니다.
또 緣起에서의 쓰임의 측면 用의 側面에서는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이라고도 합니다.
成相은 이 이루어진 하나의 合體된 모양이고 壞相은 무너진 모양을 얘기하죠.
뭐가 모이거나 무너지거나 집이 모여 있으면 成相이고 이게 흩어져 가지고 기둥은 기둥대로 쓰고
그럼 壞相이 되겠죠 우리는 成相의 모습으로도 혹은 壞相의 모습으로도 언제나 드러나는데
이 이루어진 하나의 모습과 무너진 모습 이루어진 게 있으니까 무너지는 게 있고 무너진게 있으니까
이루어진 게 있는 것이지 내가 나를 좀 犧牲시켰을 때 全切가 드러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화랑 호국사에서 法會를 하고 法會를 한 시간을 할까 두 시간을 할까 삼십분을 할까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 다르겠죠 어떤 분은 삼십분만 했으면 좋겠다, 어떤 분은 세시간 했으면
좋겠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일 했으면 좋겠다 서로 다 개별적인 생각은 다 다르단 말이죠.
그런데 자기 자신만 계속 고집하면 이 법회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을 가지고 법회를
딱 한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내 생각을 잠시 무너뜨릴 때 이 법회가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죠.
法會가 成立 될수가 있는 거죠.
이것처럼 個體인 나를 잠깐 무너뜨려야 全切가 成立될 수가 있고 내가 좀 희생돼야, 나의 性稟
나의 本性을 조금 무너뜨렸을 때 全切가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成相과 壞相이라는거
만들어지는 것과 무너지는 것 서로 따로따로 나뉜 거 같지만 서로 因緣 關係로서 因緣 맺어진 것이지
서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모여서 성립 됐을 때도 그냥 이것이고 흩어졌을때도 그냥 이것이지 이
眞理일 뿐이지 서로 다른 모습 다른 상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총상(總相)·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괴상(壞相)이라는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는 가르침으로 法界의 緣起를
表現하기도 하구요.
또 십현문(十玄門) 십현연기 (十玄緣起) 무애법문(無碍法門) 이래서 事事無碍法界를 表現하고
있는데요.고십현(古十玄), 신십현(新十玄)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십현(新十玄)을 살펴보면
이 法界 緣起의 모습이 이렇다는 겁니다.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 이렇다는 거에요.
동시구족상응문 (同時具足相應門)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한다.
즉, 낱낱의 모든 現象世界는 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同時에 같은 時間帶에 서로 相應하면서 具足 되어 存在하는 것이다.
卽, 다시 말해서 時間的으로 모든 事物은 一切가 서로 서로 緣起的 關係에 있다.
그래서 同時에 이 同時間帶에 宇宙森羅萬象이 全部 다 서로서로 各各 自己 자리를 다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흩어지지 않고 同時에 相應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같은 時間帶의 모든 것이 서로 相應하며 具足 되어 있다.
그래서 森羅萬象이 緣起的으로 다 하나에 具足 돼서 어떤 하나의 物質을 잡아서 들어올리더라도.
그 속에 宇宙의 모든 것이 같이 成立되고 具足되어 있다(執一含三). 이런 표현을 쓰죠.
티끌 하나 속에 宇宙森羅萬象이 다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과거현재미래를 우리는 다 따로따로 따로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라는 지금 이 瞬間 속에 過去도 없고 未來도 없는 거죠.
現在도 없습니다. 지금 이 瞬間에도 지금 이 자리 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이
나누려고 해도 나뉘어지지 않고 사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다 具足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다 따로따로 나누고 分別하고 떨어뜨려 生覺하고 있지만......
어떤 보살님이 인터스텔라 영화를 요즘에 뜨는 영화라고 해서 하도 보라고 해서
과학도 들어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시기에 뭔가 싶어서 제가 보고 왔습니다.
인터스텔라에 보니까 그렇대요.딸과 아버지가 딸의 房에서 어떤 幽靈을, 딸이 유령이라고 얘기하죠.
事實 그게 幽靈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유령이 아니라
五次元 世界에 있었던 또 다른 아버지가 하고있던 모습이었고
아버지가 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주기 위하여 뭔가 모습으로 바꿔가지고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이 五次元의 世界에 있는 또 다른 次元 또 다른 時間帶에 있는 아버지가 지금 나한테 보내는 메시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여기서 보더라도 우리는 나중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그 중간에 막 宇宙로 旅行을 떠나게 되고 外界人과 만난 것 같다. 여자 주인공이 얘기하기도 하고,
나중에 어떤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는 거 같다. 라고 하면서 외계인의 존재를 한참 얘기를 합니다.
나중에 뭐라고 얘기 하냐면 우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존재가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 있는 내가 또 다른 우리 또 다른 나였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절에 가면 화엄성중(華嚴聖衆)이라는 있지 않습니까?수많은 화엄성중들이 神중님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
그렇게 표현을 해요. 그런데 신중님들이 時空을 超越해 있는 우리가 槪念으로 理解할 수 없는 存在입니다.
神衆이라는 존재는. 우리는 神衆이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守護天使라고도 하는데 유교에서는 使者라고도
하고 저승사자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그 어떤 존재를 특정한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인터스텔라에 나오는대로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내가 뭔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여러분들
그런 경우 있지 않습니까? 뭔가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어떤 도움을 받았다.
알 수 없는 힘의 도움을 받았다. 유령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모든 것이 알려지고 난 다음에 쉽게 부처가
된 다음에 나중에 되돌아 보면 나에게 도움을 줬던 게 딸이 유령이라고 했던 거처럼 사실은 딸을 돕고
지구를 돕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낸 것처럼 사실은 내가 나 自身의 도움을 받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의 나의 더 높은 차원의 상위차원의 자아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있는 메시지
나를 돕고 있는 메시지 힘을 지혜를 지금 받고 있는걸 수도 있단 말입니다.
다양한 차원에 있는 이 無窮無盡한 無限히 重疊된 無限한 宇宙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눈물겹게 우주로 나아가서 원으로 뛰어 들어가서
블랙홀로 가서 오차원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이런 온갖 과학이 발전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眞實에 다가가고 있구나. 온갖 想像力을 동원해 가면서 저렇게 힘들여서 이 眞理의 眞實에 接近을
하느냐? 그렇게 眞實에 接近하는 方法도 있는 것 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재능도 없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필요가!
이 자리에서 (죽비소리 탁!) ‘이게 眞理다’라고 했을 때 이것이 眞理라 했을 때 저것이 왜 眞理인가
이 眞理만은 알아야겠다 하고 發心을 해서 이 眞理와 接近하는 瞬間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난단
말이죠. 이 數없이 많은 無限한 次元間 空間間 時間間 과거 전생 미래 이런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同時에 具足 해서 完全히 相應한다.그 모든 차원과 시간은 모든 것이 서로 구족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하나로 탁 통한다. 이 소리입니다. 이 하나, 眞理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주 단순한
겁니다. 이 하나 밖에 없는 겁니다. 이 眞理 하나만 탁 통해 버리면 모든 차원 모든 수준 모든 근기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이 眞理 하나로 딱 이 자리에서 宇宙船 타고 어디까지
갈 필요가 없단 말이죠. 블랙홀로 찾아 다니면서 그 안으로 뛰어들 필요가 없단 말이죠. 지금 이 자리
에서 마음=진리=법=불성 하나 깨달으면 宇宙全切가 同時에 具足해서 相應하기 때문에 동시에 구족해서
서로 상응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이 마음만 깨달으면 우주전체를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이라는 글이 있는데요.
공간적으로 넓고 광협 넓은 것과 협소한 것 작은 것은 서로 自在해서 걸림이 없다.
넓다 좁다, 넓은 게 따로 있고 좁은 게 따로 있는 거 같지만 넓은 게 따로 있고 좁은 게 따로 있지
않습니다.事事無碍法界를 탁 깨닫고 나면 이 손바닥 안에 宇宙 全切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단
말이죠.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단 말이죠(一微塵中含十方).
제가 처음 시간에 티끌 속에 宇宙의 모든 情報가 波動의 形態로 다 담겨 있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그거랑 비슷합니다. 耳鍼을 하는 사람은 귀 안에 몸의 모든 情報를 담고 있다 몸이 어디가 아플 때
귀의 특정부분을 자극해 주면 그 부분이 낫는다. 手指鍼은 손바닥 속에 우리 몸 전체의 情報가 담겨
있다 머리카락을 딱 뜯어 가지고 후~ 불면은 손오공이 分身을 하잖습니까.지금 그게 맞다고 과학적
으로 머리카락 있는 DNA 하나 재생을 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게 그 머리카락 하나에 다 들어 있습니다.
廣狹 ‘넓다 좁다’, ‘큰 것과 작은 거’ 이거 서로 다르지 않은 겁니다.
우리의 알음알이 分別心 妄想 生覺 속에서나 크다는 槪念 작다는 觀念이 있지
宇宙全切로 뛰어 나가나 아니면 細胞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이 原子核 주위를 도는 電子를 탐구하나
結局에 眞實은 같은 곳에 이른다 우주 끝까지 나가든 원자 속으로 뛰어들든
넓고 좁은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因緣 따라 작다고 느껴지고 因緣 따라 크다고 느껴지고
因緣 따라 내 分別心이 크다 작다 比較 判斷 分別할 뿐이지 실제 크다 작다 넓다 작다 이런 거 없습니다.
제가 강원도 양구에 있을 때는요 강원도 양구에 있을 때 우리 군종병을 데리고, 얘 소원이 뭐였냐면.
한 몇 주 밖으로 장보러 안나가자나요. 그럼 소원이 시장 구경 가자는 겁니다.
너무 안에 있으니까 답답하다고 시장 구경 가자고. 그래 그럼 가자 그래서 갑니다.
양구 시내 갑니다. 양구 시내에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도 사주고 이럽니다.
그럼 아주 기분이 좋아져요. 나중에 몇 번을 데려 갔는데 나중에 양구 시장 언제 데려갈 거냐고
맨날 갔잖아 그랬더니 고작 그게 양구 시내냐고 그러더니 나중엔 그냥 거기만 가도 좋아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서울 주변에 살 때는 제가 25사단 있을때는 군종병들 데리고 서울 시내 가 가지고
연등 축제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면 그러니까 그 시내 나가는 건 성에 차지 않는 겁니다.
저 넓은 서울시내 구경시켜 달라고 이렇게 얘기하더란 말에요. 양구에서는 그냥 나가서 라면 하나만
먹고 와도 행복해 하는데 서울에서는 VIPS 이런데 데려가 달라고 한단 말이죠.
우리 동석이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이게 心理的인 要因에 따라 다른 것이지
이게 뭐 서울은 넓고 양구는 좁다. 심리적인 차이인거지. 저 끝자리에 혼자 사는 사람은 읍내만 나와도
행복하고 이렇게 느끼는 거죠. 그러한 것처럼 廣狹은 서로 自在해서 無碍하다.
이 고십현(古十玄)에 보면 이 부분은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 具德門)이라고 되어있는데
純粹한 것과 雜된 것 에 대한 分別이 나오는데요 순수한 것과 잡된 것 그것도 定해져 있습니까?
因緣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요. 불자들이면 다른 종교에 가면 우리가 잡교가 되겠고
절에 오니까 순수한 게 되겠죠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이 한국에 있음 순수혈통이 되지만
다른 나라에 가면 잡종이 되지 않겠습니까 因緣 따라 순수하게 되기도 하고 잡종이 되기도 하는 거지
이건 정통이고 이건 정통이 아니야 그런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宗敎도 어떻습니까 처음엔 다 異團으로 시작했다가 그게 이제 교세가 넓어지면 正統인 것처럼 바뀐단
말이죠. 순수한다 잡되다 하는 것도 우리의 分別心일 뿐이지
事事無碍法界에서는 그런 어떠한 差別이 있지가 않습니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이라고 해서
하나와 많은 것 서로 容納되면서 그러면서도 混雜하지가 않다.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다. 一卽一切多卽一 할 때 제가 말씀을 드렸었죠.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제법은 일체 모든 제법은 서로 相卽해서, 서로 自己를 잠시 犧牲해서 다른 것과 같아지는 이런 걸
相卽이라고 해요. 서로가 諸法은 서로가 相卽해서 서로 같아져서 自在하게 서로 같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存在는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 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서로 나뉘어져 가지고 차별 된
존재인 거 같지만 이 眞理의 次元에서 본다면 하나도 나뉘는 게 없습니다.
各己 個別性을 다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에 하나로서 相卽하는 眞理로서의 性稟 부처로서의 性稟
法性 그것을 다 지니고 있다. 諸法, 一切萬物은 서로서로 相卽하는 부처로서의 事事無碍法界의
그 眞理 자리가 다 具足 되어 있는 存在들입니다.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라고 해서
숨은 것과 드러나는 것은 서로를 구성하는 사사무애 연기의 관계 속에 있다
금사자 상이라는 책에 보면요. 金으로 만든 獅子가 있다 그래요.
금으로 만든 사자다 하면 여러분들은 사자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자를 보는 사람은 사자만 봐요. 금을 못보고. ‘금을 좀 보여주세요’ 하면 이걸 가르친단 말이죠.
‘여기다. 이거다.’ 하면 사람들이 그럼 그건 사자잖아요. 사자를 자꾸 본단 말이죠.
금인데 사자로 본단 말이에요. 그리고 옆에 금으로 만든 시계가 있어요.
‘금을 보여주세요. ‘ 그래서 시계를 보여주면 그럼 ‘그게 시계지 무슨 금입니까?’ 이런단 말이죠.
똑같습니다. 진리도 이와 같단 말이죠
眞理를 보여주세요. 事事無碍法界 眞理가 뭡니까? (컵뚜컹을 들으며) 이게 바로 眞理다.
진리가 뭡니까?(손가락을 하나 들고) 이게 바로 眞理다.
손가락을 본단 말입니다. 컵 뚜껑을 보고 眞理를 보지 않고...
마치 저것과 같이 빛이 하나도 없는 방에 들어가면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터 불을 탁 켜면 모든 게 갑자기 다 드러나죠. 인형도 있고 컵도 있고 그릇도 있고 칼도 있고
가위도 있고 책상도 있고 책도 있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그 사실 모든 걸 다 分別 돼 있는걸
우리가 보고 있지만 눈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보는 건 뭐에요?
시계, 책상, 책장 이런걸 본다고 생각하지만 實際 우린 책상과 책장을 보는 게 아니고, 實際 그냥
빛을 보고 있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그 모든걸 볼 수가 없잖아요.
색깔, 색 색깔, 다른 색깔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그런데 어둠 속에 가면 이건 뭐 그냥 하나에요.
그냥 하나지. 서로 다를 게 없습니다. 다른 색깔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지.
우리는 무엇을 보든 사실 빛을 보고 있는 거지 부처님을 보거나 컵을 보는 게 아닙니다.
빛을 보고 있는 것이지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들고) 이걸 딱 들었을 때
이걸 보면 안되고 그 빛을 봐야 한단 말이죠. 이 바탕, 이 바탕에 달라지지 않는 하나.
이게(컵) 진리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이게(컵뚜껑) 진리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이 소리(죽비소리)가 진리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을 指稱해도 다 비추듯이
그 무엇으로 指稱해도 달라지지 않는 그 바탕 그 바탕에 깔려 있는 하나,
다 비추듯이 달라지지 않는 하나의 眞實, 하나의 眞理, 하나의 法, 그것을 보는 것이 이 工夫입니다.
‘은밀현료’라고 했는데 숨겨진 것과 드러난 거
우리는 진리는 숨겨져 있고 진리 아닌 것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드러나 있는 모두 하나도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망상할 때는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망상하지 않으면 진리는 백퍼센트 진리는 어디에나 드러나 있다
진리는 찾으면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찾지 않으면 언제나 드러나 있고 그런데 진리를 찾아가는 입장에선 또 찾아가게 됩니다.
마치 이와 같아요.
우리가 隱密顯了,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이 잘 因緣 關係를 調和롭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이 世上이 유지가 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젊은이가 한 여인과 콩깍지가 끼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남자가 그 여자를 보니까 너무 순수하고 순진하고 너무나도 그야말로 내 맘에 쏙 들어요.
그 여자도 이 남자가 맘에 쏙 들어요. 그 여자가 보니까 자꾸 이 남자 앞에 가면 부끄럽고 내숭도 떨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 내숭 떠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단 말이에요 콩깍지가 쒸인 상태에서
서로간의 實體가 안 보인단 말이에요. 實體가 안 보이고 숨겨진 건 안보이고 그때 일어난 것만 본단
말입니다. 이 최고의 여인인 줄 알고 結婚을 딱 해 버린단 말입니다.
그 때부터 숨겨 있던 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그땐 이미 결혼했고 자식까지 낳았으니까
어쩔 수 없단 말이죠. 이렇게 이 世上은 因緣은 숨겨진 게 있고 드러난 게 있기 때문에 이 世上이 調和를
이루고 있는겁니다. 숨겨진 게 없으면 이 세상에 결혼할 사람 없을걸요? 밑천을 다 봤는데 누가 그 사람
이랑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처럼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이 적절히 因緣 따라 다 調和를 이룸으로써
이 世上은 이 法界 이 事事無碍法界는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서로 맞는 걸맞는 因緣을 맞춰가면서.
그러나 事實은 내가 콩깍지가 끼니까 그렇게 안 보이는 거지, 콩깍지 꼈을 땐 아무리 옆에 사람이 ‘야 얘
實體는 저렇지 않아 밥을 깨작깨작 먹지만 實體는 그냥 막 퍼먹는 사람이야’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걸
믿지 않는단 말이에요. ‘야 음해하지마 우리 얘는 천사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아무리 얘기해줘도 모른단 말이죠. 콩깍지 꼈을 때는 숨겨져 있을 때는 모릅니다.
우리가 사기 당하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전화 와 가지고 어디 투자하면 몇 배가 뜁니다.
숨겨진걸 못 보는 사람은 그때 그냥 그 말만 듣고 투자를 한단 말이에요.그러니까 거기서 망한단 말이죠.
숨겨진 것을 보지 못하니까 이렇게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은 서로 因緣 關係를 잘 맺고 있단 말이에요.
量子物理學에서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은 ‘접혀힌 秩序와 펼쳐친 秩序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어요. 접혀져 있는 보이지 않는 世界와 펼쳐져 있는 보이는 世界,
理法界와 事法界를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던 것이죠.
화엄현담(華嚴玄談)이라는 華嚴經을 주석한 책을 보면 半을 드러나고 半은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거나 드러나 있는 게 아니고 因緣 따라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 숨겨져 있거나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眞理에서는 어떤 하나도 숨겨질 게 없습니다. 백퍼센트
明白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眞理입니다.우리는 진리를 찾기위해 없는걸 찾기 위해 뛰어갈 필요가 없다.
이 자리에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 것들 한 책(혜민 스님)은 그래서 나온 겁니다.
妄想 피우고 뭔가 찾으러 밖으로 쫓아가고 달려가니까 보이지 않지만
멈춰야지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가 그 자리가 完成된 자리구나 하는 것이 보이는 거죠.
印度로 히말라야로 道를 찾으러 아무리 돌아다녀도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멈춰 있는 게 필요할 뿐이지. 여기도 드러나 있고 히말라야에도 있는데
뭘 히말라야에 까지 가서 찾느냐 여기서 찾으면 되지
미세상용안잎문(微細相容安立門)이라고 해서
微細한 것과 微細한 것 하나 하나는 能히 많은 모든 것을 相容 抱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뒤섞이지 않고 서로 安足되게 난립되어 있다. 微細한 것에 全切 많은 것이
담겨 있고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고 해서 인다라망 그물코 말씀 드린 것처럼,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이 宇宙法界 全切는 現象世界 現象世界가 連結되어 있다 여기 法會 나오면 서로 다른 사람이라
生覺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돈에 팔촌에 몇촌까지 쉽게 말해 탁 까보면 전부 다 친척 아닌 사람이 없겠죠
連結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무슨 대학교 아니면 고향, 친구의 친구,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동생 하면 다 連結되어 있다. 連結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실 모두 各各이 中心으로 다 連結되어 있다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託事, 이 現象 世界는 託事 事라는 거에 依託해서 法을 드러낸다. 이 現象世界에 드러내서 法을
眞理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 현상세계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 이 現象 世界가 그대로
事事無碍法界이기 때문에 託事顯法生解門 이것에 依託해서 眞理를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모두 萬物에 依託해서 眞理를 드러낼 수 있어요. 眞理는 무엇입니까? 이거다 해도 좋고, 그 무엇을
억하고 소리를 질러도 좋고, 그 모든 것은 그 現象 世界에 依持해서 眞理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事事無碍界니까 當然히 그렇겠죠.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과거 현재 미래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는 이 十界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앞에서 구세십세호상즉 (九世十世互相卽) 얘기했던 그런 이야기죠.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主와 客, 主와 觀이 서로 因緣 따라 主가 되고 客이 되지
因緣 따라 집에서 나는 主고 밖에 나가면 客이 될 수도 있는 거지
因緣 따라 主가 되고 客이 되지 전승 해주거나 전승 받거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죠.
主라고 해도 이것이고 觀이라고 해도 이것이고 客이라고 해도 이것이고 主人公과 엑스트라는
보조나 조연들은 서로 나뉜 거 같지만 서로 나뉘지 않죠. 自己 人生에서는 저마다가 主人公이죠.
남의 人生을 注目해서 볼 때나 그 사람의 人生이 主人公인 것처럼 비추어질 뿐이지
主와 客이라는 것은 主人公은 중요하고 主人公이 아닌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고 錯覺하지만
더 重要하고 덜 重要하고 이런 것은 없고 主와 客 이런 것도 없단 말이죠.
단지 因緣 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法界의 根源에서는 그런 差別 分別들이 一切 없다.
그 어떤 差別도 있지 않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해가 안되셔 가지고 아마 지금 답답하실텐데 괜찮습니다. 이게 불교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最高 어려운 內容이에요 이런 얘기도 영 안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런것도 알아야 내가 그 길로 내가 언젠가는 가야겠구나 하고 알 수 있기에..
이 다음 게송이 간단해서 말씀드리면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能仁은 能人, 能力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깨달은 道人을 얘기 할 수도 있죠. 스승일 수도 있고요
능인이 해인삼매 가운데 해인삼매가 뭐냐면요 바닷가가 늘 출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배를 타고 나가서 육지를 거슬러 보면 산도 있고 배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물결이 계속 치니까 그게 鮮明하게 보이지 않잖아요.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에서는 산이 다 비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닷물에서는 이게 비치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바닷물은 하나도 비추지 않고 출렁출렁거린단 말이죠.
그런데 能仁이 海印三昧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바닷가가 일순간 고요해서 파도가 하나도
없는 瞬間이 딱 되면 산도 들도 나무도 집도 환하게 비출 거 아니겠습니까 바다가 환하게 비춘다
그전에 비추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고요해지니까 이 水面위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죠.
그대로 明確하게 明明白白하게 이 現象 世界가 ....事事無碍法界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 사람하고 저 사람하고 差別이 있는거 같지만 海印三昧같이 能仁이 海印三昧를
만난거처럼 이 煩惱妄想을 딱 멈추게 되면 모든 걸 明確하게 드러낸단 말입니다. 이 海印三昧처럼.
여러분이 그대로 부처이고 生死가 바로 涅槃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能仁이 海印三昧 가운데서 繁出如意不思議 무성하게 드러낸다 뜻대로
부사의 하면 不可思議하게 能仁이 海印三昧 가운데서 모든 것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眞理는 이 世上의 萬物 그 自體가 自己 뜻대로 不思議하게 眞理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 옷 하나에 眞理를 드러내고 있고 종이 한장에 眞理를 드러내 있고
이 宇宙 全切에 眞理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없다 繁出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무수히 무성하게 언제 어디서나 眞理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雨寶益生滿虛空 이런 보물같은 眞理의 비가 중생이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허공 가운데
이 法비(法雨)가 뿌려지고 있단 말입니다. 언제나 法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瞬間에도 法비를 맞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法비는 뿌려지고 있다. 事事無碍法界니까.
하늘을 봐도 法이고 法비가 내리고 있고 땅을 봐도 法이고 들을 봐도 法이고 法 아닌 게 없지
않습니까? 법비가 언제나 내리고 있지만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자기 根機 따라 이익을 얻을 뿐이다.
이익을 얻어갈 뿐이다. 法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眞理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중생이 자기 根機만큼만 받아가고 있을 뿐인 겁니다. 海印三昧를 딱 깨달아 버리면 그냥 이 죽비 하나
속에도 죽비를 하나 딱 들면 이 자리가 그 자리고 眞理의 자리가 돼 버리고
숨을 쉬면 숨을 쉬는 그것이 眞理가 되고 妄想을 부리면 妄想이 부리는 그 자체가 眞理에서 나오니까
妄想도 眞理가 되고 그 모든 現象世界가 그대로 眞理가 되는데 어느 하나도 眞理 아닌 것이 없는데
우리 根機가 아직 안되니까 그 중에서 眞理를 發見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보다 맘이 열린 사람이면 마음이 열려서 工夫에 대한, 工夫는 맘을 여는 거 以外에
다른 게 없습니다. 맘이 닫혀 있으면 이 法비, 眞理의 비를 받지를 못해요. 닫혀 있는 게 어떻게 비가
들어오겠어요. 맘을 열어놔야 비가 들어올 거 아닙니까 이 맘을 열지 못하는 사람
모르는 것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眞理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줄 쳐 가지고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맞으니까 이 책 대단하다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건 工夫가 안 되는 거에요. 많은 工夫가 안돼요. 내가 아는 건 自我를 强化시키는 뿐이지
自己 生覺 妄想 分別心 觀念 槪念 알음알이 識만 强化시킬 뿐이지
귀에 들어오는 것은 들어오는대로 아 이건 내가 아는 거구나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내가 언젠간 저 얘기도 언젠간 들어 오겠지
이렇게 확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工夫는 마음을 여는 거라고 그래요.
여러분들이 마음이 확 열려 있어서 여러분 工夫가 조금이라도 느신다면 일년 뒤에 어디서 저를 만났다
아니면 인터넷에서 法門을 듣던가 일년 뒤에 제가 하는 法門을 들었다 여러분들이 전 般若心經도 듣고
金剛經도 들었는데요. 그러지만 일년 뒤에 제가 하는 반야심경 금강경 강의를 법성게 강의를 또 한번
듣는다 하면 난 알아 하고 안 들으면.. 안됩니다. 안된단 얘기는 뭐 냐면
제가 반야심경 강의합니다. 이러면. 전 반야심경 하니까 안 들어도 되겠네. 이럽니다.
스님들이 해주는 法門은요 어떤 經典을 뭔 經典을 하느냐는 重要하지 않습니다.
무슨 경전이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경전을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고 경전을 方便으로 해서 法을
알려주려고 하니까 무슨 경전이든 아무 상관 없는 겁니다.일년 전에 공부했으니 안 해도 되는게
아녜요. 저도 제가 3년 전에 금강경 강의하던 것과 2년전에 강의하던 것과 5년전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하던 금강경과 3년전 속초에서 하던 금강경과 요새 강의하는 금감경이 들어보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요. 전혀 다른 얘기라기보다 저도 그만큼 달라졌을 것이고 그때마다 달라진단 말이죠.
마음을 열게 되면 언젠가 이 법을 들으면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한번 들었던 얘기지만 오늘 들었던 강의를 제가 목탁소리 카페에 들으실 수 있도록
올려놓겠습니다. 일년 뒤 이년 뒤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이런 얘기를 했었나 저런 얘기를 했었나
내가 마음이 열린 게 다르기 때문에 내 공부가 익어가는게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가 사람에 따라서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여러분들이 얻어갈 거만
쏙쏙 받아갑니다. 더 많은 것들을 얻어 갈수도 있구요. 더 신기한 것은, 더 신기한 것은요.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한마디 하는 말에서도 깨달을 수가 있다니까요.
지난 번에 어떤 할머니가 金剛經에 대해서 한마디 해보라고 하는 한마디에 딱 깨달았잖아요.
불교를 모르는 아들 딸 한마디에 어떤 스님이 기왓장이 탁 튀어가지고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지 않습니까. 自然萬物이 일으키는 그 소리 하나를 듣고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모든 萬物이 眞理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걸 眞理라고 생각하지 않고
새가 울면 새가 우는구나 새소리 속에서 眞理를 들을 수가 있는 거죠
모든 것 속에 眞理는 담겨 있지만 우리가 마음을 닫고 있으면 우리의 깜냥만큼만 들어 오는 겁니다.
이처럼 이 現象 世上은 부처님(佛), 能仁, 法身이라고도 할 수 있죠.
法의 비, 眞理의 가르침은 언제나 어디서나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能力에 따라서 이것을 얻어 가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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