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念處 觀察, 사념처 관찰 일기 쓰기 -- 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 2015.04.23. 16:43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56
지난번에 ‘사념처 관찰 수행일지’를 쓰라고 말씀 드렸었는데
‘써 보셨죠, 다들?’ ‘써 보셨습니까?’ ‘써보니까 좀 어떻던가요?’
‘어떤 느낌이 들으셨는지 쓰신 분들 이야기 좀 잠깐 들을까요? 쓰면서 느낀 거나 이런 게 있는지..’
( 어떤 보살님 말씀 )
어찌 보면 無常에 대한 洞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無常하게 變해 가는데
우리들 여러분들은 過去에 마음이 수도 없이 많이 출렁거렸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수도 없이 많이 괴로워하고 좌절하고 무너지고 했는데
어쨌든 여러분들은 지금 가지 살아 남아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계시고
지금까지 수도 없이 출렁거리는 게 지속되진 않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출렁거리는 이 마음 이게 계속 되는 줄만 알고 진짜인 줄 알고
엄청 스트레스도 받고 충격도 받고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수도 없이 많이 출렁거렸던 마음 이걸 가만히 지켜보면 지금에 와서 보면
다 흘러가는 것이었고 지금은 흘러 가서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흘러가서 없는 것이 될 텐데 그 때 그 瞬間에 마음이 휘둘리는 바람에
그 瞬間의 奴隸가 되는 바람에 그때 그냥 화도 내고 싸우기도 하고 내 감정도 상하고
에너지도 낭비하면서 그러고 지냈던 거 아니겠습니까? 공연한 일을 벌인 꼴 밖에 되지 않죠?
굳이 그렇게 까지 내 마음이 휘둘리지 않았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온전히 깨어있지 못 하다 보니까
世上 모든 일이 無常하다는 事實을 洞察하지 못하다 보니까 그때그때 그렇게 휘둘리는 겁니다.
제가 이제 몇 가지를 비유 들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사념처 관찰 수행일지’를 쓰는 것은
내가 每 瞬間 瞬間 日常 속에서 自身에게 오는 어떤 境界들에 대해서 觀察을 하는 것인데
觀察을 할 때 조금 더 鮮明하게 觀察을 하기 위한 어떤 마음의 演習입니다.
事實은 굳이 수행일지를 쓰지 않더라도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면 괜찮겠죠.
그런데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요렇게 적기 시작하다 보면 하나하나 적다 보면
처음엔 두리뭉실하게 적게 되다가 나중에는 조금 더 微細하게 細密하게 觀察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놓치고 있던 部分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하게 보게 되고 해상도 높게,
고해상도로 마음도 事物도 觀察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이렇습니다. 어떤 경험한 일.. 경험한 일이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데 원하지 않게 끼어들 수 밖에 없었던 이런 狀況이 있었다고 해요.
몸에서는 목소리가 아주 커지고 눈도 커지고 血壓이 오르는 것을 몸에서 느끼게 되었고
내 느낌 感情은 그 瞬間에 막 ‘화’ 오로지 화밖에 없었던것 같다.
그리고 이제 生覺해보니 부모님이 두분 다 어리석은 거 같다 이런 生覺이 들었고’
이런 말씀 써 주셨구요.
또 한 분이 쓴 것 보니까 ‘아이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밤 늦게까지 핸드폰을 한 것을 알았다.
몸(身)의 反應은 목소리가 가라앉고 表情이 굳어지고 몸이 硬直되는 느낌 같았다.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느낌과 感情은 화가 올라왔고 氣分 나빠졌고
生覺은 ‘어떻게 反應을 할까? 어느 程度까지 制裁를 해야 될까?’ 잠시 고민을 했고
올바른 習慣을 길러줘야 되겠다는 生覺이 들었다. 그래서 자식에게
왜 約束을 어기고 그렇게 했는지를 물었고, 約束을 안 지켰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反應이 없어서 이주 동안 휴대폰 사용을 禁止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써 주셨는데....
이런 多樣한 일들이 일어날 때 그때그때 마음(心)을 觀察해 보는 거죠.
예를 들어 아이가 핸드폰을 하지 않기로 約束했는데 몰래 핸드폰을 했다
그러면 그 瞬間 화가 나지 않습니까? 욱하고 화가 난단 말입니다, 約束했는데..
이런 화가 일어났을 때 그 화가 일어났다는 事實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죠.
大部分은 그런 화가 일어났다는 事實을 모릅니다. 그냥 그 화에 휩쓸리고 화가 나는 狀況에
휩쓸려서 그냥 있는 그대로 화를 내게 됩니다. 그냥 그 화에 끌려갑니다.
내가 그 화, 내 삶의 主人이 되지 못하고 화나는 그 狀況에 끌려 가는 겁니다.
狀況에 휩쓸리게 되니까 내 感情이 계속 막 욱욱하고 올라오고 온갖 生覺들이 화나는 그 狀況을
暴風처럼 덩치를 키워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휩쓸려서 휩쓸린 對應 밖에 못하죠.
그러니까 붙어 싸우거나 짜증을 내거나 이런 어떤 結果가 온단 말이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 그 瞬間 境界와 接觸했을 때 그 境界를 觀察하는데
境界를 觀察할 때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몸(肉身)입니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할 때 第一 먼저 일어나는 게 몸(肉身)의 反應이기 때문에
몸(肉身)에서 일어나는 微細한 反應들을 알아차리는 게 重要한 거죠.
몸(肉身)에서 갑자기 뜨거운 熱氣가 확 올라오고 화가 나고 그러면서 숨이 가빠지거나
혈압도 올라온다는 거 느껴지기도 하듯이 몸(肉身)에서 第一 먼저 反應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몸에 反應이 올 때 아 내 몸에서 이러한 反應이 일어나는구나 알아차려주는데요.
그 狀況은 나에게 오는 狀況 내가 接觸하는 狀況을 우리는 바깥의 狀況이라고 生覺을 합니다.
내 外部에 그런 화가 나는 固定不變하는 獨立的 實體的인 境界/狀況이 있다고 錯覺을 합니다.
나를 화 나게 할 만한 내 바깥에 實體的인 狀況이 있어서 이 狀況이 問題가 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 바깥에 있다고 錯覺하는 狀況을 實體化 시킨단 말이죠.
이게 진짜가 돼 버리면 진짜에게 휘둘리지 않습니까.
바깥에 敵이 있는데 이 敵이 진짜라면 적과 맞서 싸우잖습니까?
그런데 이 狀況 이게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
이게 진짜가 아니고 實體가 아니라 꿈이라고 生覺하면 맞붙어 싸울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 狀況을 實體라고 錯覺하니까 그 狀況과 맞붙어 싸우는 겁니다.
몸(肉身)을 觀察하라는 것은 바깥에 있는 固定된 實體가 아닌 狀況/境界와 싸우기 前에
우리가 錯覺하는 것이 내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과 싸운다고 生覺하지만 그 외부 境界/狀況은
事實은 내 內面에서 일어나는 內的인 마음 意識의 作用일 뿐인 것입니다. 內面에서 일어나는...
바깥에서는 단지 因緣을 促發시켜 줬을 뿐이에요. 그 일 때문에 나는 화가 나도 되고 안 나도 됩니다.
막 스트레스를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거에요. 外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中立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生覺을 그 화나는 狀況으로 몰아가고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을 選擇했기 때문에
나에게서 화가 나고 몸도 가슴 뛰고 화도 나고 이러는 겁니다. 거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 이제 觀察을
하는 거죠. 觀察을 할 때 가장 生生하게 관찰하는 몸 이건 直接的인 겁니다. 몸이라는 것은.
몸(肉身)에는 微細하게 느껴지다 보니까 우리는 몸 觀察을 안 한단 말이에요.
대번에 우리가 화가 나고 짜증 나는 瞬間은 呼吸부터 가빠지고 가슴부터 막 두근거리고
몸을 觀察하면 몸에서 變化가 分明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랬을 때 바깥에 걸 자꾸 是非 걸지 말고 먼저 내 몸(肉身)을 먼저 보듬어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是非 걸거나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내 몸이 먼저 다치잖아요.
내가 먼저 내 몸과 마음을 먼저 다독거려 주어야 바깥에 智慧롭게 對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心身을 보듬어 주지 못하다 보니까 내 몸이 상하게 돼요.내 몸만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핸드폰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핸드폰 했다.
두 가지 다른 반응이네요.또 하나는, 부모님이 막 싸우신다.
그걸 보고 내가 막 이제 가슴이 뛴단 말이죠.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그때 내 가슴이 뛰는 거 내 몸이 막 경직되고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고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觀察할 수 있어야 합니다. 觀察하다 보며 아주 細密하게 觀察이 됩니다.
이 분도 잘 적어 주셨는데 얼굴 表情부터가 觀察이 될 거에요.내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있구나 내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내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있구나’ 하고 볼 수 있어요 觀察할 수 있어요.
그리고 몸이 약간 硬直되는 것 같은 느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단 말이죠. 그때 그 다음으로 넘기지 말고 그 다음으로 화를 낼 건지 對應할건지 그걸 넘기지
말고 自息한테 너 이리와 해서 혼내는 거부터 하지 말고 일단 내 몸과 먼저 接觸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몸에서 두근거리고 가슴 뛰고 하는 것을 일단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을 充分히 觀察해 주는 겁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變化를 觀察해 준다는 것은
곧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變化들을 拒否하지 않고 受容한다는 얘기, 받아들인 다는 말입니다.
모든 問題가 일어나는 理由는 그 問題를 實體的인 問題라고 錯覺해서 問題를 解決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모든 問題가 일어나고 그 問題는 解決이 되지 않는 겁니다.
問題를 받아들이지 않고 解決하려고만 애쓰면 그 問題는 解決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을 觀察하라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단 말이죠.
그 중에 가장 먼저 觀察할 것이 身(몸/육신)을 觀察하는 겁니다.
몸을 觀察하고 잠시 그 두근거리는 뛰는 가슴을 잠시 느껴주는 겁니다.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아 내 몸이 이렇게 뛰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것과 잠시 함께 머물러 주는 겁니다. 빨리 다른 거 하려고 애쓰지 말고 순수하게 몸과만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아마 이 정도 狀況이 되면 끊임없이 生覺이 막 介入이 될 겁니다.
이 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에도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또 했구나. 나를 무시하는구나.
온갖 生覺들이 일어나요. 그런데 온갖 生覺이 일어나기 前에 먼저 몸의 狀態를 있는 그대로
한번 알아차려 주고 몸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몸의 反應도 그 다음
느낌 感情이나 生覺까지 同時 多發的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죠 明確하게 區分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느낌 感情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生覺이고
區分하려고 굳이 애쓸 필요까지는 없어요. 왜냐하면 느낌은 맨 느낌이라는 것 自體는
좋다 싫다 짜증이 났다 이런 느낌이 올라오는 것들도 生覺과 함께 일어나는 거에요.
첫 느낌이라는 것! 맨느낌은 그냥 이 느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일 뿐이거든요.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 일어났구나 이런 감정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 된다는 거죠.
두번째로는 느낌과 感情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아주 重要한 것은 알아차린다는 것 卽, 觀察한다는 것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認定하고
바라본 다음에 이거를 좋다 싫다 判斷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좋다 싫다는 判斷을 하게 되면
왜 왔느냐? 하고 밀쳐내고 싶거나 붙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거나
아니면 그 느낌에 대해서 拒否하고 싶거나 그런 마음이 확 든단 말이죠.
그런데 뭐를 마음에서 演習하는 거냐 하면 受念處라는 것은 이 느낌 그대로를
이게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화나는 느낌이든 짜증나는 마음이든
그 느낌 그대로와 함께 있어줄 수 있느냐? 어떤 判斷도 하지 않고 그 느낌을 認定하고 受容하고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게 느낌을 觀察하는 것, 알아차리는 겁니다.
느낌을 觀察할 때는 그 느낌에게 탓하지 않는다는 거죠. 화내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고
그 느낌 그대로가 일어 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걸 충분히 느껴주겠다.
‘느낌을 拒否하지 않고 充分히 느낌을 느껴주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느낌과 함께 있는 게 중요해요. 우리는 대부분 그 느낌과 함께 있어주는 시간을 대부분
건너 뛰어 버리고 바로 生覺으로 넘어가 가지고 生覺이 이끄는 대로 휩쓸려 버리기 始作합니다.
신수심법(身受心法)할 때 이 身受 몸과 느낌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마음工夫를 하는 것
그게 위빠사나고 그게 마음觀察이고 그게 冥想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몸과 느낌 그 自體만 集中해서 觀察하게 되면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生覺이
만들어 내는 온갖 妄想들에 속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죠. 生覺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은 大部分이
妄想입니다. 내가 필요해서 ‘아 이때 어떻게 生覺을 할까?’ 해서 내가 必要에 의해서
내가 이 狀況에 執着하지 않은 채 이 상황에 휘둘리지 않은 채 이 상황에 그냥 함몰되어 가지고
끄달려 가지 않은 채 내가 어떻게 生覺을 할까? 하고 主導的으로 生覺을 쓰는 것.
執着하지 않고 主導的으로 生覺을 할 수 있는 것은 正思惟, 바른 思惟가 되거든요.
正思惟를 하려면 몸(身)과 느낌(受)을 먼저 觀察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意圖的으로 내가 生覺이 必要할 때만 써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大部分의 일어나는 生覺은 있는 그대로 眞實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주 最適의 狀況에 있을 때, 아주 氣分 좋은 狀況에 있을 때
너무나도 막 행복하고 기쁘고 날뛸 것 같이 기쁠 때 아이가 성적을 백점 맞아 왔을 때
아니면 어디 가서 큰 償을 받아 왔거나 대학교를 합격했거나 너무나도 神이 나는 狀況이었을 때
그런 狀況이면 마음(心)이 完全히 열려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맘이 확 열려 있습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이든 受容할 수 있는 마음이 될 거에요.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확 열렸을 때라면 내가 어떻게 反應을 할까? 生覺해 보면
아주 慈悲롭게 反應을 하죠. 애가 핸드폰을 하든 말든 괜찮습니다. 핸드폰을 해도 괜찮고
애가 좀 싸워도 ‘그러면서 크는 거지’ 하면서 웃어 넘기고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시 말해, 어떤 때는 문제 삼지 않는데 어떤 때는 문제 삼는다.
그런 事實은 마음의 反應 그거 自體가 眞實이 아니란 소리에요.
애가 핸드폰을 하기 때문에 나는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핸드폰을 하기 때문에 가슴이 뛰고
핸드폰을 하기 때문에 저놈이 나를 무시했고 저 녀석이 공부도 안하고 저래 가지고 커서 뭐가
될라고 하는가? 내 말을 어째 무시할 수가 있느냐?
그 아이는 엄마를 무시한 게 아닙니다. 커서 뭐 나쁜 놈이 될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瞬間 핸드폰이 그냥 너무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엄마 마음은 얘가 날 무시했다.
내 말을 안 들었다는 등 온갖 生覺을 가지고 꾸며 내는 겁니다. 妄想을 꾸며 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얘가 날 무시했다고 生覺하니까 더 화가 나는 겁니다.
실제는 그냥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싶은 맘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단 말이죠 그냥. 핸드폰을 할 때 어떤 때는 핸드폰을 하라고 놔두고 어떤 때는 하라고 놔두지
못한다 라는 것은 핸드폰 하는 그 自體가 絶對的으로 잘 못 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핸폰 가지고 논것 그걸 가지고 막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온갖 생각이 개입 되다
보니까 거기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된단 말이죠. 해서 일이 생길 때 먼저 몸의 反應을 觀察하고.
이런 反應 이런 問題 여기는요. ‘어떻게 바꿔야 되느냐?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게 바꿀 수 있죠?’ 이 문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 觀察은 이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冥想이라는 것은요
이 經驗한 일을 제가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되죠?’
‘어떻게 바꿔야 되지요?’ 라는 것을 스님께 묻는 게 아닙니다. 이 명상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答이 나오게 하는 方法을 工夫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모든 經驗 한 일 모든 무슨 問題가 있을 때마다 스님께 찾아가서 답을 해달라고
할려면 여러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님 ‘즉문즉설’ 들으러 쫓아 다녀야 해요.
언제까지 그거 맨날 쫓아다닐 겁니까? 내 스스로 힘과 智慧를 가지고 내 안에서 그러한 어떤 문제든
解決 할 수 있는 智慧가 생겨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걸 하기 위해서 이 冥想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 八正道야 말로 最高의 修行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수행이라고 했는데
八正道는 억지로 八正道를 實踐하려고 해서 八正道가 實踐되는 게 아닙니다.
四念處를 觀察하게 되면 저절로 八正道를 實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生覺이 막 나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혼을 내고 화를 내고 ‘이주 동안 핸드폰 하지마!’
이랬단 말이에요. ‘앞으로 이주 동안 핸드폰 하지마!’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 마음이 어떻겠어요? 反發心이 일어나겠죠? 당연히 반발심이 일어나겠죠?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욱하고 반발심이 일어나고 화가 나는 마음이 일어나고 엄마에게
마음이 닫힌단 말이죠. 언제까지 이런 方式으로 아이와 싸우실 겁니까?
이런 方式으로 언제까지 對應을 할 겁니까? ‘이주 동안 하지마!’ 하고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 말은 아이가 하는 것은 絶對的으로 잘 못 됐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엄마인 내 生覺은 絶對的으로
옳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이런 思考는 어찌 보면 極端입니다. 극단이죠. 말을 하는데 正語가 아니고
正語는 中立的인, 正語는 執着이 介入되지 않은 말을 의미하거든요.
‘이주 동안 하지마!’ 이거는 절대적으로 하지마 이거는 핸드폰 하는건 絶對惡이야.
‘넌 하지마, 하지 말아야 해!’ 하고 極端的으로 얘기한 것이죠? 正語가 아니죠.
그런데 어떻게 되냐면 몸의 反應을 먼저 觀察하고 느낌을 觀察했을 때 아주 重要한 것이
生覺이 일어날 때 느낌 感情도 生覺 때문에 生覺이 개입되니까 느낌 感情이 增幅 되는 겁니다.
‘쟤가 또 했네?’ 하고 쟤가 나를 무시했구나. 엄마를 완전히 가지고 노는구나. 이런 生覺이 개입되면
그 느낌 感情은 더 화 나는 느낌으로 增幅되고 몸도 더 크게 떨리기 마련이란 말이죠.
그래서 중요한 關件이 生覺입니다. 生覺의 奴隸가 되지 않으면 된단 말이에요.
우리들 大部分은 生覺에 휘둘리기 때문에 그 生覺을 妄想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生覺 妄想 分別心 煩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生覺 妄想 分別心 煩惱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 質問을 던져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生覺은 100% 절대적으로 옳은가? 이 生覺은 모든 狀況에 適用되는 絶對的인 眞實인가?라고.
그 아이가 핸드폰 하고 싶다는 生覺이 일어났어요.
이 아이에게 올바른 習慣을 길러줘야 되겠다 어떻게 制裁를 가해야만 할거 같다..
이게 백 퍼센트 절대적인 진실입니까?
핸드폰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 그게 올바른 習慣을 길러주는 絶對的인 要素입니까?
그럼 아예 핸드폰을 사주지 말았어야지 핸드폰이 絶對惡일거 같으면 핸드폰을 뭐하러 주겠어요?
絶對惡일 거 같으면, 絶對 해서는 안될 거 같으면...물론 ‘게임이 좋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지금은 누구나 핸드폰 하고 보살님들도 하지 않습니까? 보살님들도 툭하면 핸드폰 꺼내 들고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툭하면 핸드폰 꺼내 들고 있는데 자식에게는 嚴格하고
나한테는 寬大한 그런 모습들도 많고 나는 툭하면 TV 보지 않습니까? 툭하면 TV 보고 뭐하고
뭐하고 하는 거. 그거 自體가 絶對惡이진 않아요. 절대적으로 잘못된 건 아닙니다.
因緣 따라 狀況 따라 어떨 때는 그것을 좀 안 했으면 좋겠고 어떤 땐 했으면 좋겠는거죠
내가 이 狀況을 그런 나쁜 狀況이라고 解釋했기 때문에 그게 나는 더 화가 나는 것이고
그 生覺이 100% 絶對的 眞實은 아닌 겁니다. 일어나는 生覺 가운데 絶對的인 眞實은 없습니다.
生覺은 絶對 眞實이라고 할만한 事實이 있습니까?
부모님은 싸우면 안 된다? 부모님은 싸우면 왜 안돼요? 世上에 안 싸우는 부모님 어디 있습니까?
싸울 수도 있는 거죠. 싸운다는 것은 누구나 아주 自然스러운 거고 定常的인 狀況인 겁니다.
‘싸우면 안 된다’고 生覺하는 내 生覺이 잘못이지. 내가 일으켰던 모든 生覺에 딱 質問을 던져
보는 겁니다. ‘이 生覺은 絶對 眞實인가?’ 절대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生覺한 나의 解釋일 뿐인 겁니다. 내가 그렇게 生覺하고 解釋하다 보니까 거기 휩쓸린 것뿐이다.
그래서 몸(肉身)과 느낌 감정(受)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서 受容해 주고 觀察해 주면서 계속해서
그걸 觀察하게 되는 瞬間에는 끊임 없이 올라오는 生覺을 지켜 볼 수 있으면 아주 놀라운 工夫가
되는 겁니다. 몸과 느낌을 지켜보는 와중에 끊임 없이 올라오는 生覺들을 ‘아 生覺 妄想’ 하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生覺 妄想 煩惱 分別心을 탁 쳐내버리는 겁니다.
또 生覺 妄想이 일어나면 ‘아 妄想 生覺’ 하고 탁 쳐내버리고 그래서 느낌 그 自體를 느껴 보고
몸에서 느껴지는 몸의 反應을 순수하게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生覺(念)이 일어날 때 生覺도 마찬가지에요.
生覺을 觀察한다는 것은 生覺이 일어나는 것 自體에 대해서 是非 걸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겁니다
生覺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게 잘 못 됐다고 할 수 없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生覺은 잘못된
거고 敵이구나 生覺은 싸워 없애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生覺할 必要도 없단 말이에요.
生覺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認定하는 겁니다. 生覺이 일어났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 生覺과 함께
있어주는 거에요. 生覺을 바라봐 주는 겁니다. 生覺으로 두번째 세번째 화살을 몰아가지 않고
일어나는 生覺을 그냥 지켜봐 주는 겁니다. 그럼 그 生覺은 그냥 저절로 내려놔진다.
이와 같이 어떤 狀況이 일어났을 때 내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것을 問題로 삼지 않는 겁니다.
모든 狀況에 대해서 問題 삼기 前에 그냥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子息이 핸드폰 하는 것 때문에 내가 짜증이 나는 이 狀況을 그냥 認定해 주는 겁니다.
내가 짜증나는 이 狀況과 함께 있어 주겠다. 먼저 대번에 버럭 화를 낼 게 아니라
왜 그러지 않습니까? 이걸 시키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정 안되니까
呼吸을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觀察하고 화를 내던가 말던가 하라는 얘기가
먼저 몸의 反應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觀察하고 그것을 受容하고
대번 욱하면서 ‘넌 잘 못 됐다’ 하고 화를 내고 욕할 것이 아니라
그러기 前에 먼저 이 狀況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이 짜증스러운 狀況,
이 녀석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狀況 공부하라는데 공부 안하고 핸드폰만 하는 狀況
이런 狀況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그 정도도 너그럽지 못하면 그 정도도 자비롭지 못하면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나는 왜 이렇게 慈悲롭지 못하지’ 하고 탓할 필요도
없단 말이에요. 그냥 그것이 마음이 일어날 때 그냥 그 마음 生覺을 認定하고 許容하고 그것과 함께
있어 주면서 그것과 함께 存在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觀,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微細하게 觀察할 수 있어요. 몸에서 어떤 느낌 感情이 일어나는지 가슴이 막 터질 거
같은 그 마음을 그대로 觀察해 줍니다. 그것과 함께 있어 줍니다. 거부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없애겠다 하지 말고 없앨 필요 없어요. 이 眞理가 올라왔는데 이 眞理가 일어났는데 이 眞理를
왜 없앱니까? 첫 번째로 올라오는 느낌 感情 生覺 마음 그것은 全部 다 眞理다. 諸法實相이다.
眞理로 올라왔으니까 그것과 함께 있어줘야죠. 그것과 함께 함으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觀察해
줌으로써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나타난 것인데 왜 그걸 거부하려고 하고 버릴려고 하는가?
그래서 어떤 經驗할 일이 생길 때 그 經驗할 일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함께 經驗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 어떻게 反應을 하고 느낌 感情이 어떻게 反應을 하고
어떤 生覺이 일어났는지를 그냥 認定해 주고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단 말입니다. 깨달으려고 굳이 애쓸 必要도 없어요.
다른 때 같으면 觀察하지 못 했는데 이렇게 觀察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自體가 하나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러고 이렇게 이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구나.내가 觀察하다 보니까 生覺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아 이 生覺이..
여러분 미국에 에크하르트 툴레니 무슨 有名한 冥想家들 중에 아주 요즘에 注目 받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바이런 케이티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恒常 이렇게 말합니다
"生覺이 일어날 때 모든 生覺에다 대고 生覺을 觀察하라는 거에요.
뭐라고 말하냐 하면 모든 生覺이 일어날 때 모든 生覺에다 대고
‘이 生覺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하고 물어본다는 겁니다
이 生覺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보세요, 자식이 핸드폰을 하고 있어요.
얘가 공부도 안하고 맨날 이러는 거 아닐까? 오늘 하루만이 아니고 몰래몰래 공부한다고 하고
맨날 핸드폰만 하는 거 아닐까? 온갖 가지 生覺으로 더 화가 나는 그 生覺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生覺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떨까? 生覺이 없다면 거기에 대해서 生覺하고 解釋하는
生覺이 없다면 자식이 핸드폰을 하는 걸 있는 그대로 보겠죠. ‘애가 핸드폰 하는구나!’ 하고 끝이지
生覺이 介入되지 않아요. 그러면 마음이 便安할 수 밖에 없겠죠. 生覺이 介入되지 않아서요.
모든 狀況이 마찬가지에요.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20분 이상 통화를 하고 있다. 몸에서 熱이 막 나고 危險하다
運轉士의 資質이 안됐다 신고를 할까 말까 이런 生覺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으면서 온갖 生覺이 일어나고 事故가 나지 않을까?
저 자질이 안된 사람 신고를 해야 하고 이런 生覺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不安感은 增幅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한번 뒤돌아보세요. 이 사람이 핸드폰 하고 있는데
상관 없이 잘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가 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운전하다가 핸드폰 한 적이 없습니까? 누구나 있어요.
내가 할 때는 安全할거란 生覺이 들어요. 그건 내 生覺일 뿐이지.
운전 기사가 핸드폰을 한다. 그게 위험하다. 내가 그래서 화가 나고 열이 받고 막 이런다는 건
그건 내 生覺일 뿐이지. 내 生覺만 없으면 便安할 수 있습니다. 운전할 때 만찬가지에요.
누가 옆에서 운전을 하는데 편안하게 잘 가다 말고 갑자기 이거 이러다 사고 나지 않을까 하고
神經을 쓰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때부터 不安해지고 오금이 저리는 경우를 經驗하셨을 거에요.
그 生覺이 없으면 내가 事故 날 지 모른다는 生覺이 없으면 그냥 우리 便하게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 生覺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모임에 갔는데 친구가 자기와 生覺이 다른 사람을 욕한다. 또는 다른 정당을 욕한다.
그런데 난 또 다른 정당의 편이다. 이럴 때 ‘어떻게 저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 생각이 없으면 어떨까? 여당이니 야당이니 어느 정치인을 편들고
우리는 그런 生覺이 없이 있는 그대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 生覺이 나를 괴롭게 할 뿐이지.
이게 얼마나 참 中道的이지 못합니까? 어떤 사람은 여당이라고 낙인 찍어놓고 어떤 사람은 야당이라고
딱 낙인 찍어놓고 내가 야당이면 무조건 여당 사람 다 싫은 거에요. 내가 여당이면 무조건 야당 사람 다
싫은 거에요. 이게 얼마나 중도적이지 못한 논리입니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봐야지
그 사람의 性向 때문에 그렇다면은 기독교인들은 불교인들을 다 싫어할 겁니다. 이게 진실입니까?
기독교인들은 불자들을 다 싫어할 거에요. 이게 있는 그대로 진실입니까?
제가 만나 본 목사님 신부님들 정말 훌륭하신 분들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계신 분들 많단 말이에요.
그게 宗敎가 다르다고 政黨이 다르다고 價値觀이 다르다고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極端으로 나눠놓고 判斷하는 내 生覺이 問題인 것이지.
그런 生覺이 없다면 우리는 便安 할 수 있어요. TV를 보면서도 여당이 나오든 야당이 나오든
뭔 일이 있든 있는 그대로 봐 줄 수 있단 말이죠. 生覺을 가지고 공연히 내 마음을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生覺이 필요할 땐 生覺을 할 수 있겠죠. 내가 필요에 의해서 여당을 찍어야
될 때 여당을 찍고 야당을 찍고 싶을 땐 야당을 찍고 그럴 순 있겠죠. 내 판단을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내 마음까지 남들 욕하면서 내 맘을 괴롭혀 가면서 그럴 필요는 없는 거죠.
[사례] 자전거 타러 가는데 아들에게 헬맷을 쓰고 타라고 助言을 하는데 아들이 싫어한다,.
부모 말 좀 듣지 危險한데..언짢고 밉다. 이런 生覺을 한단 말이죠.
여러분 자전거 탈 때 헬맷 쓴적 있습니까? 우리 어릴 땐 헬맷도 없었어요. 그냥 탔지.
십년 이십년을 타도 사고 안 나는 사람도 있고 맨날 헬맷 잘 쓰다가 그날 하루 괜찮겠지 하고
살짝 안 썼는데 그 날 사고 날 수도 있고 이게 헬맷을 안 썼다고 무조건 절대적으로
무조건 옳고 그름을 없애라는 게 아닙니다. 그 순간에 이것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 생각에 과하게 사로 잡히지 않게 되면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안전벨트 매!’ 안전벨트 안 메면 큰일 날 수 있을 것 같고 안전벨트 매 하고 화를 버럭버럭
낼 수도 있죠. 안하고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거 가지고 내가 過度하게 화를 낸다는 것은 내 執着心 때문에
‘안 메면 절대 안 된다’는 그 집착심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죠.
제 말은 뭐냐 하면 절대적으로 안전벨트를 매야 된다 헬맷은 써야 한다 라는 生覺에 사
로잡혀 있으면 아이한테 對應하는 方式이 極端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正語가 안되고 너 혼난다 하면서 때리거나 辱을 하거나 ‘너 앞으로 안메면 혼날줄 알아’ 하고
화를 내거나 그럴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거기에 확 사로 잡히지 않고
執着하지 않게 되면 正語가 나갑니다. 내가 사로 잡히지 않으니까 이 狀況을 어떻게 하면
智慧로운 方式으로 이 아이에게 헬맷을 쓰게 할 수 있을까? 안전벨트를 하게 할 수 있을까?
智慧로운 方式으로 狀況을 보게 되는 마음의 餘有가 생겨요. 執着을 내려 놓으면 全切가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한테 ‘얘야 네가 보니까 엄마 진짜 화난 거 처럼 보이나 본데
지금 몇 번째 엄마는 하라고 하는데 너는 안 하니까 엄마 마음은 화도 나고
엄마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참 이거 걱정이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 생각도 안전벨트 하는 게 낫겠지? 헬맷 하는게 맞다 하는 걸 아는데 너도 이게 잘 안되는구나?’
‘네 맞아요.라고 자식도 대꾸합니다. 마음을 받아줘 버리면 애도 대번에 알게 됩니다.
‘저도 하긴 해야 한다는 걸 알긴 아는데 하기 싫은 마음이 들어요, 엄마’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긴 해야 하는데 ‘맞아 하긴 해야 해요 그런데 나 하기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이 한번 얘기해 보는 겁니다. ‘네가 잘하면 엄마가 너무나 행복할 텐데
네가 잘하면 당분간 엄마가 네가 정말 좋아하는 뭘 한번 준다던가 이렇게 한번 해볼까’
나름대로 이렇게, 뭐가 될지 몰라도 執着하지 않으면 욱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게 절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당을 선택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이 정당은 좋고 이 정당은 싫고 집착하면 상대와 싸우게 됩니다.
시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집착하지 않게 되면 그냥 그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구나 父母님이 自息과 싸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보니까 그러대요. 어르신들은 여당이고 자식들은 야당이라
정치 얘기는 부모 자식 간에 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그러던데 그 한 생각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집착하니까 괴로운 겁니다. 여당이 좋고 야당이 좋고 그럴 수 있죠.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당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과도하게 집착 하면 문제를 만들어 내서 싸우게
되고 많은 문제를 양산을 합니다.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집착하는 생각은 아닌가? 일어나는 생각에 대해서 물음표를 해 보는 겁니다.
이 生覺이 絶對的인 眞理이냐? 그건 아니거든요. 이 生覺이 없다면 나는 어떨까?
幸福할 수 있습니다. 그 生覺만 없으면.
이와 같이 몸(身)과 느낌(受)과 생각(心)의 反應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적어 놓으셨던 것에
대해서끊임없이 한 번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觀察을 하는걸 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잠시만 冥想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해 주시구요. 눈을 반쯤 감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힘을 빼고 온몸의 힘을
최대한 빼 봅니다. 어깨에도 힘을 빼고 다리에도 긴장이 있으면 힘을 빼고 몸을 한번 觀察해 봅니다.
잠시 들려오는 새 소리에 意識을 集中해 봅니다.
여러분께서 四念處 觀察 修行日誌에 적어주셨던 것 중에 한가지 經驗한 일 그 經驗으로 因해서
내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가 났거나 그랬던 어떤 하나의 過去 經驗을 했었던 그 場面 속으로
오늘 아침이나 어제나 가까운 時期에 있었던 작은 經驗 속으로 가봅니다.
그때 내가 화났던 狀況 속으로 生覺을 가져 가 봅니다.
그때 내 몸(身)은 어떻게 反應을 했는지, 내 느낌感情(受)은 어떠했는지?
어떤 生覺(마음/心)이 일어났는지 잠시 살펴 봅니다.
그때 일어났던 몸의 느낌과 느낌 감정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受容해 주고
그때의 느낌과 가만히 하나가 돼서 잠시 머물러 존재해 봅니다.
그 生覺과 느낌에 判斷을 가하지 않고 解釋을 가하지 않고 또 다른 生覺을 介入시키지 않은 채
그 때 일어났던 느낌 내 몸의 느낌 내 마음의 느낌 그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봅니다
그것과 잠시 아무런 解釋을 가하지 않은 채 함께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 봅니다.
그 때의 욱하고 올라오는 感情과 함께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아차려 봅니다.
그때 그 生覺을 할 때 生覺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마음이 搖動친다면
혹은 지금 내 몸에서 가슴 뛰거나 特定한 反應이 올라온다면
지금 여기 이 瞬間의 그로 因해 올라오는 몸의 反應과 느낌도 함께 알아차려 봅니다.
生覺을 몰아가지 않고 단순한 이미지만 떠올린 채 그때의 느낌과 감정 속으로 함께 존재해 봅니다.
生覺이 일어난다면 그때의 이미지만 잠시 떠올린 뒤에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變化나 感情들 이런 것들을 觀察하는데 生覺을 자꾸 하지 않고
한번 그 이미지를 떠올린 뒤에 現在로 돌아와서 지금 現在 그걸 떠올렸을 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感情은 어떤지 몸의 變化는 어떤지를 느껴지는 그 부분을 집중해서
그것과 가만히 함께 있으면서 그 느낌을 한번 느껴봅니다.
답답하거나 화가 나거나 가슴이 뛰거나 할 때는 ‘그래 괜찮아! 답답해 보자’
‘가슴이 뛰어도 괜찮다! 가슴이 함께 뛰어보자.’ ‘화가 나도 괜찮다. 충분히 화가 나보자.
화 나는 그 마음과 그냥 함께 있어줄게’ ‘답답한 마음 괜찮아.’ 하고 답답해 보자
‘마음껏 답답하자.’ 하는 마음으로 답답해 주는 겁니다.
(죽비소리) 탁! 탁!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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