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不一不異’, ‘不來不出’에 관하여

장백산-1 2015. 5. 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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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一不異’, ‘不來不出’에 관하여
 

 [152호] 2003년 05월 17일 (토) 13:00:00   
 
 
씨앗에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서 줄기가 되며 다시 줄기에서 열매가 생겨 씨앗을 맺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自然스런 世上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存在의 成立基盤으로 本體를 상정하는

本質主義者는 이러한 常識的인 世界象에 대해서 삐딱한 視線을 던집니다. 곧 ‘씨앗’하면 씨앗의 本體,

‘싹’하면 싹의 本體를 결부시켜 生覺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씨앗에서 싹이 생긴”다고 할 때,

本質主義者는 씨앗의 本體와 싹의 本體는 同一한 것인가(一) 서로 別個의 것인가(異) 하는, 겉으로는

상당히 고상해 보이는 ‘사이비 물음’을 제기합니다. 왜 ‘사이비 물음’이냐 하면, 存在하지도 않는 本體를

놓고 같으니 다르니 따지는 것은 애초에 문제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創造主 神을 認定하는

本質主義者는 씨앗이니 싹이니 이 모든 萬物은 萬物의 本體인 ‘神에게서 나와(來) 神으로 돌아간다(出)’고

말합니다. 또 萬物의 本體로 무(無)를 認定하는 本質主義者는 萬物이 ‘無에서 나와 無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哲學의 終言, 形而上學의 終言을 갈파하는 哲學者들은, 특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비둘기의 발처럼 조용히

다가온 革命家’는, 哲學史에 등장하는 위대한 천재들이 대개 이러한 ‘사이비 물음’으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폭로합니다. 나가르주나가 〈中論頌〉 귀경게에서 ‘일이(一異)’, ‘내출(來出)’을 否定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그 타겟은 本質主義者입니다. ‘내출(來出)’ 곧 오고 감이 화제가 되었으니 승조의 詩

한 수가 떠오릅니다. 승조의 〈조론〉가운데 〈物不遷論〉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물불천(物不遷)’은

 ‘事物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變化하고 있는 게 事物인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

모순적인 문장이죠? 승조가 읊은 詩 한 수는 갈수록 사람을 당혹하게 합니다. “돌개바람은 산악을 쓰러

뜨리나 恒常 고요하며, 江河는 다투어 흐르나 흘러가지 않는다. 먼지는 흩날리나 움직이지 않으며, 일월은

하늘을 지나나 돌지 않는다.”(旋嵐偃嶽而常靜 江河競注而不流 野馬飄鼓而不動 日月歷天而不周.)

 

中國의 大儒學者 朱희는 〈주자어류〉(126권)에서 이 詩를 引用하고는, 승조의 空思想이 장자의 說을

도습(盜襲)한 ‘환망적멸지론(幻妄寂滅之論)’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겉으로 보면 주희의 말이 그럴 듯

하지요? 승조가 왜 이렇게 요상한 말을 하는지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면 주희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론송〉에서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미 가버린 것이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는 存在하지 않는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2-1) 이 게송의 취지는, ‘가는 者’라는 本體를 前提로 한 行爲는

成立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곧 “가는 者 가지 않는”다고 말할 때, ‘가는 者’는 本質主義者가 몽매에?

떨쳐버리지 못하는 本體로서의 行爲者이고, ‘간다’는 行爲는 그러한 本體의 行爲입니다. 空思想家로서는

當然히 이 兩者를 否定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게송의 취지를 理解하게 되면 우리는 승조의 알쏭달쏭한 詩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게 됩니다.

승조의 詩에 登場하는 돌개바람, 강하, 먼지, 일월, 이 모든 存在는 空思想의 立場에서 보면 本體가 없는

現象的 存在입니다. 따라서 이렇다 할 ‘本體’의 作用은 없습니다. 現象을 現象으로만 볼 때 돌개바람은

있는 그대로 山嶽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現象의 背後에 그 어떤

本體가 있다고 生覺하는 本質主義者는 자꾸 現象의 힘을 本體와 結附시켜 生覺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本質主義者가 想定하는 本體 및 本體의 作用을 否定하면서 내놓은 表現이 ‘돌개바람은

恒常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승조의 詩는 위진 현학적인 ‘무(無)의 本體論’을 교정함으로써

存在를 있는 그대로 存在로만 보라는 주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佛敎에 대한 주희의

無知를 이렇게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곧 승조는 〈장자〉의 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空思想의 立場에 따라 再解釋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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