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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 / 분별 넘어설 때 비로소 각각의 가치가 드러나

장백산-1 2015. 5. 4.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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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분별-하

     분별 넘어설 때 비로소 각각의 가치가 드러나
2015년 05월 04일 (월) 16:12:39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道를 깨친 이가 아닌 限, 自身의 尺度를, 自己 生覺의 틀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게 옳은 生覺이고 많은 사람들이 共有하고 있는 生覺일수록 내려놓기 어렵다. 道를 體得하지 않고선 分別을 떠나 사는 건 不可能한 걸까? 적과 동지를 가르고, 好惡 美醜를 가르는 動物的 本性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예술이란 觀念을 버리면  모든 것이 예술이 되듯이
分別 떠난 分別 可能하면  모든 存在 意味 볼 수 있어

 

 

흔히 人間은 生覺하는 動物이라고들 하지만, 事實은 그렇지 않다. 人間은 대개 生覺하지 않는다. 特히 自身이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 숙련된 것은 生覺하지 않고 處理한다. 곰곰이 生覺해보면, 人間이란 生覺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動物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일에 熟練되기 위해 努力하는데, 숙련된다 함은 어떤 일을 아무 生覺 없이 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生覺해야 할 때가 있다. 生覺할 수 없는 것과 만났는데 그걸 避해갈 수 없을 때다. 生覺할 수 없는 것이 내게 들이닥치는 곤혹스런 狀況에서 우리는 비로소 生覺하기 始作한다. 分別 또한 그렇다. 生覺 없이, 生覺 以前에 揀擇하는 것, 그것이 分別이다.

따라서 分別은 生覺할 수 없고 理解할 수 없는데, 生覺하고 理解해야 할 때 비로소 停止된다. 그때 비로소 제대로 된 生覺이 始作된다. 感覺도 그렇다. 感知되었지만 무언지 알 수 없을 때, 낯설고 不便하지만 避해갈 수 없을 때, 그 낯선 것을 向해 感覺을 세우며 유심히 보고 들으려 하게 된다. 알 수 없는 그것을 통해 自身의 感覺을 넘어서게 되고, 自身이 ‘生覺’을, 自身의 分別을 넘어서게 된다. 이처럼 生覺할 수 없는 것과의 만남, 感覺되었지만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의 感知를 통해 우리는 自身을 넘어서게 된다. 自身이 옳다는 믿음을 넘어서게 되고, 分別하는 自身을 넘어서게 된다. 이를 철학자 들뢰즈는 ‘超越적 經驗論’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超越’이란 넘어섬을 뜻한다. 分別을 ‘넘어선’ 分別이 始作되는 地點이 여기 아닐까?

分別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가 쉽게 判斷하고 分別하기 힘든, 아니 섣불리 그래선 안 될 他者性의 領域이 存在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他者性이란 내 認識이나 理解, 혹은 意志의 바깥에 있는 것을 뜻한다. 알 수 없는 것, 理解할 수 없는 것이다. 重要한 건 理解할 수 없는 것과 만났을 때 그것을 拒否하고 밀쳐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理解하려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흔히 ‘正義’란 올바른 分別의 基準이라 生覺해서, 正義로운 判斷이란 올바른 判斷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미 確立된 基準에 입각한 正義란, 良識이나 常識처럼 많은 이들이 共有하고 있는 分別의 尺度를 뜻할 뿐이다. 철학자 데리다는 正義를 이와 아주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共同의 基準을 모두에게 公平하게 適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理解하지 못하는 他者性의 領域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最大限 理解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他者性을 通해 지금 ‘正義’라고 믿고 있는 것을 수정하고 바꾸는 것이 正義라고. 이 역시 分別을 넘어선 곳에서 正義는 始作됨을 뜻한다.

이런 觀點에서 보면, 20세기 現代藝術의 역사는 分別心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은 다들 익숙해져 있는 感覺이나 觀念에서 벗어난 것을 사람들에게 들이밀고 들어갔다. 피카소는 앞에서 본 얼굴과 뒤에서 본 몸을 하나의 方向에 같이 그려 사람들의 視覺的 分別을 난감한 당혹 속으로 밀어 넣었다. 뒤샹은 工場에서 생산된 변기를 전시장에 밀어 넣곤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여, 예술과 비예술, 예술작품과 상품을 가르는 分別基準을 물속에 처박아 버렸다. 프랑스 작가 장 뒤뷔페는 “왜 여우의 털은 목에 두르면서 여우의 내장은 목에 두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反問하며, 두터운 진흙으로 똥을 연상시키는 더러운 그림을 그려 전시했고, 이브 클랭은 작품 대신 텅~빈 전시장을 전시(‘텅 빔’)하여 ‘전시’나 ‘작품’이라는 觀念을 와해시켰고, 그에 答해 아르망은 예술작품 전시하는 전시장에 작품 대신 쓰레기를 한 차 갖다 쏟아 부어 놓곤 ‘가득 참’이란 제목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現代 音樂도 그렇다. 루이지 루솔로는 도시나 공장의 소음을 음악이라고 ‘연주’하기도 했고, 에드가 바레즈는 망치소리, 사이렌 소리, 채찍소리 같은 걸 악기 소리와 섞어서 음악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음악적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가르는 分別의 基準을 소음 속에 묻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反復하여 藝術에 대한 生覺이나 感覺을 깨면서, 藝術이 무엇인지 다시 生覺하게 했다. 덕분에 지금은 藝術 아닌 것이 없게 되었다. 好惡와 美醜를 分別하는 藝術이란 觀念, 藝術이란 尺度를 깨어버리자, 모든 것이 藝術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分別의 尺度가 사라지자, 어떤 것도 藝術作品이 될 수 있는 潛在性을 가진 것이 된 것이다. 動物이나 人間을 基準으로 하는 分別의 尺度가 사라지면, 植物은 움직이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좋고, 動物은 움직일 수 있어서 좋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였을 게다. “色身은 부서지는데, 어떠한 것이 堅固한 法身입니까?”라는 물음에 대룡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구나.”  들어보았는가, 장사스님이 봄기운을 본 소식을?

장사스님이 하루는 산을 유람한 후 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물었다.

“스님께선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遊覽(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유람하고 왔다니, 무언가 좋은 것을 찾아간 것 아닌가? 好惡 美醜의 分別을 떠났다면 따로 좋아할 것이 어디 있을 것이고, 따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모두 아름다울진대, 따로 유람할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여 수좌가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갔다 오셨습니까?”

이는 원오스님이 착어대로, 수좌가 한 마디 “내지른” 것이다.

“다녀온 곳이 있으면, 풀 속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香氣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 나선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느니라.”

향기로운 풀은 향기로워서 좋고, 지는 꽃은 지는 꽃이어서 좋다는 말이다. 고인 물은 고여 있어서 좋고, 흐르는 물은 흐르고 있어서 좋다고 함은, 特定한 하나의 尺度로 分別하는 게 아니라 고인 물 흐르는 물諸各各 갖는 美德을 그 各各을 基準으로 ‘分別’하는 것이니, 그것은 이미 分別을 떠난 分別이다. 이렇게 分別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좋은 게 된다. 수좌가 ‘내지른’ 말을 멋지게 받아넘긴 것이다. 다시 응수하는 걸 보면 그 수좌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주 봄날 같군요.”

 

“아무렴, 가을날 이슬방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分別을 떠난 分別은 各各의 것들이 가진 美德이나 價値를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의 巨大한 存在論的 平等性을 보는 것이지만, 그게 언제나 모든 게 다 똑같이 좋다고 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배를 띄우려는 이에겐 깊은 물이 더 좋고, 물을 건너려는 이에겐 얕은 물이 더 좋은 법이다. 그렇기에 分別을 떠난 이는 또한, 어떤 條件에선 어떤 것이 ‘더 낫다’고 分別해 말할 수 있다. 아니, 分別을 떠났을 때, 어떤 條件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正確하게 ‘分別’할 수 있다. 이 또한 分別을 넘어선 分別이다. 分別心을 넘어선 智慧로운 分別이다. 이것이 “境界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境界를 活用”(‘隨處作主,임제록’)하는 것일 게다. 대주스님이 “分別이 없는 本體 가운데서 항사묘용(恒沙妙用)을 갖추어서 능히 一切를 分別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다”(‘돈오입도요문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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