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러분 마음이 편치 않지요. 이제 그런(세월호 침몰) 후진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없어질 때가 됐는데, 物質的인 生活만 나아졌을 뿐이지 精神的으로는 아직도 後進國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며칠 동안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 저보다 世間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더 아팠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共同體의 一員이니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이제 우리도 精神的인 部分을 바꿔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生覺을 먼저 해 보았습니다.
가마니·멍석의 本質 材料가 짚이듯 남·여로 구별된 人間 의 材料 本質은 空 ‘내’가 中道의 原理로 存在하고 있다는 存在의 原理를 바로 깨달을 때 ‘나’만 生覺하는 利己心 消滅
우주삼라만상의 本質인 ‘空’ 이해하면 갈등·대립·투쟁도 사라지고 세월호 같은 사고원인도 제거돼 中道의 原理 ‘雙遮雙照’ 가르침은 나와 너가 하나임을 일러주는 것
잘못된 精神을 바꾸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분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바꾸고자 한 그 精神을 우리가 理解하고 生活한다면 이러한 後進國形 事件·事故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우리에게 傳해주시고자 한 精神을 바꾸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석가모니 왕자님은 出家 前에 四姓階級(카스트제도) 때문에 핍박받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幸福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結局 物質的인 方法으로는 모두의 幸福을 얻을 수 없다는 結論을 내리고, 精神을 바꾸는데서 出發해야겠다는 生覺을 하면서 出家를 決心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出家해서 苦行하고 깨달으신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이고,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內容입니다. 그 깨달음을 우리가 認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生活하면 個人的으로 幸福할 뿐만아니라 葛藤과 對立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幸福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나’라는 存在의 原理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나라는 存在의 原理를 傳해주기 위해 一平生 努力했습니다.
人間 存在의 原理를 100% 깨달은 부처님은 마음은 虛空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生覺에 虛空과 같은 마음이 갇혀 있습니다. 때문에 그 虛空과 같은 마음空間이 좁은 분은 좁은 마음으로 葛藤을 많이 하실 테고, 또 그 葛藤으로 인해서 상처도 많이 받으시게 됩니다. 虛空과 같은 그 마음空間이 조금 넓은 분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을 것이고, 더 넓은 분은 그만큼 더 나을 것입니다. 마음이 虛空과 같다는 人間 存在의 原理를 理解하면 할수록 自己로부터의 解脫을 하게 되고, 나라는 生覺의 작은 世界에서 점점 더 虛空과 같은 마음空間을 넓혀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虛空과 같은 마음 空間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중도(中道)’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런 것들이 다 虛空과 같은 그 마음空間을 넓히는 一種의 方便들입니다. ‘法華經 普門品’에서는 “觀世音菩薩을 한마음(一心)으로 부를 때 자기 所願을 成就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마음, 卽 一心으로 하는 念佛이 마음空間을 넓혀가는 方法입니다. 또한 ‘念佛할 때 妄想피지 말고 一心으로 해라, 參禪할 때 妄想피우지 말고 一念으로 해라, 奉使할 때 나라는 마음 生覺을 비우고 菩薩行을 해라’ 라고 하는 말들도 모두 그 마음空間으로 우리가 進入해서 그 마음空間을 넓혀가는 方法들입니다. 그리고 이때 어느 修行이 ‘좋고’, ‘나쁘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自己에게 알맞은 方法을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念佛할 때 一心으로 하고, 奉使할 때 菩薩心으로 하면 됩니다. 菩薩心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다’, ‘너다’ 하는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없는 텅~비어 空한 淸淨한 마음空間입니다. 이것이 一念으로 가는 길과 같은 길입니다. 그렇게 一念으로 수행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내 存在가 中道의 原理로서 緣起의 理致로 存在하고 있구나’ 하는 事實을 터득하게 됩니다.
事實 八萬大藏經이라는 어마어마한 經들이 모두 中道의 原理, 緣起의 理致 이거 하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中道의 原理만 理解하고 나면 家庭에서 夫婦간에 葛藤하고 對立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또 自息과 父母간의 葛藤도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社會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葛藤도, 또 지금 저 진도 앞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월호 事故도 이 中道의 原理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가정에서의 갈등이나 바다에서의 일이나 다 같은 原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原因이 바로 ‘나’만을 生覺하는 利己心입니다.
여기서 짧은 옛날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인 中道의 原理가 들어 있습니다. 어느 때 한 스님이 道人스님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도대체 道가 무엇입니까?” 이에 道人스님이 答합니다. “네 눈앞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다시 묻습니다. “눈앞에 있는데 왜 못 봅니까?” 도인스님이 다시 答합니다. “너에게는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다.” 이 스님이 이번에는 대들듯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스님은 보이십니까?” 도인스님이 다시 答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어서 못 보는데 너와 나로 나누면 더욱 못 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묻습니다. “너와 나를 나누지 아니하면 보입니까?” 이때 도인 스님이 마지막 答을 합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뭘 보겠다고 하느냐”고.....
이 마지막 對答이 重要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全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이 事實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 世上도 없고, ‘나’도 ‘너’도 없어요. 本來부터 나도 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와 너를 나누면서 우리에겐 利己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利己心이 우리 社會가 定常的으로 움직이지 않는 原因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다에서 일어난 저러한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가운데 離婚率 1位인 理由도 나와 너를 區分하는 利己心에서 오는 現象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도인스님이 마지막 對答 했던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무엇을 보겠다고 하느냐”에 答이 있습니다. 내가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고, 이것이 생겨나야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집니다.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緣起의 理致 바로 이 事實입니다.
法會 시작할 때 般若心經 봉독하셨지요. 五蘊이 뭡니까? 色受想行識 아닙니까. 色은 이 몸이고, 受想行識은 지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이것' 이지요. 五蘊이 텅~비어 空한 줄(五蘊皆空, 五蘊無我) 알면 삶의 모든 苦痛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人間의 마음 意識은 내가 있다고 錯覺하고 生活합니다. 그래서 恒常 나와 너를 나눕니다. 부부간, 부모자식간도 모든 것을 나누고 그래요. 자꾸 區分합니다.
지금 우리 社會도 進步니 保守니 나눠서 每日같이 葛藤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政治하는 분들에게 쓴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들 低能兒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아마 氣分 나빴겠지요. 그런데 進步와 保守가 뭡니까. 國民을 잘 살게 하겠다고 만들어 놓은 手段 아닙니까. 그러면 그進步 保守는 手段이고, 目標는 當然히 國民을 幸福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手段과 目標를 區分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手段과 目標는 區分을 하는데, 그렇게 매일 진보다 보수다 해서 葛藤하니 저능아, 지적수준이 뒤처지는 애라고 했던 것입니다. 스님들도 그렇습니다. 스님 노릇하는 理由는 道通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스님들에게 왜 스님 노릇하느냐고 물으면, 道通하려고 한다고 답하는 스님이 과연 몇 분이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總體的으로 手段과 目標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돈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어린 학생들이 희생당하는 저런 어처구니 없는 일(세월호 침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우치신 存在의 原理, 中道의 原理의 內容을 理解를 하면 手段과 目標도 分明하게 가릴 줄 알고, 어떻게 해야 人生을 잘 사는 것인지 目標意識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삶도 變化하고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젊어서 결핵에 걸려 지금도 한쪽 肺가 機能을 못하고 있는데요. 절에서 요양하다가 佛敎를 알게 되고 出家를 했는데, 출가 후에는 경전도 열심히 보고 하면서 藥을 먹지 않고 살게 됐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葛藤도 많았고 試行錯誤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佛敎, 卽 부처님 가르침의 貴重함을 알아가니까 이런 이야기라도 해야겠다 生覺해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存在 原理를 바로 보셨다고 했습니다. 般若心經에서 말하는 五蘊皆空을 다시한번 예로 들겠습니다. 五蘊은 色受想行識이라고 했습니다. 色은 몸이고, 受想行識은 精神, 마음, 意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精神과 몸 이것이 空한 줄 알면 되겠는데, 이것이 어렵지요. 五蘊이 空하다는 事實 이것을 理解하는 공부가 佛敎工夫입니다. 그리고 五蘊皆空이 事實을 理解해서 이 宇宙森羅萬象萬物이 텅~비어서 空한 줄 알면, 그때부터 삶의 모든 苦痛으로부터 벗어나고 思考도 바뀌게 됩니다. 이 바뀐 思考를 中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中道 이게 참 理解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南子와 女子가 있지요. 外形은 各各 男子의 모습 女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分明히 다르지요. 身體構造도 다르고요.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事實은 사람에게는 이 外形(色)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外形의 本質이라는 것이 있다는 事實입니다. 人間의 이 本質을 理解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시골에 가면 새끼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마니도 있고, 덕석, 멍석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릅니다. 그런데 새끼 가마니 멍석 덕석의 本質 材料가 뭡니까. 짚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男子와 女子가 外形도 다르고 하는 役割도 다르지만 그 本質에서 보면 男子도 없고 女子도 없는 텅~빈 空한 바탕일 뿐입니다. 그래서 外形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텅~비어 空한 바탕, 本質을 보면 人種, 理念, 民族, 宗敎도 다 超越할 수 있습니다.
새끼 가마니 덕석 멍석의 本質이 짚이라는 事實을 理解하면 葛藤, 對立, 鬪爭 이런 것으로부터 自由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멀리보지 마시고 집에서 男便이나 婦人을 보면서 한번 그렇게 生覺을 해 보세요. 텅~빈 空한 바탕, 本質에서 보면 男子도 女子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根本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金剛經’에서는 胎卵濕化, 有色, 無色, 有想, 無想, 非有想非無想이라는 九類衆生까지 나옵니다. 이 모두의 存在 原理가 텅~빈 空한 바탕, 本質 하나일 뿐이라는 事實입니다. 가까운 예로 강아지를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 주변에서 유기견이 생기지 않겠지요. 모든 存在의 外形은 다를지언정 그 本質은 텅~빈 空한 바탕 하나라는 말을 깊이 認識하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볏짚을 이야기했는데, 짚이라는 새끼 가마니 멍석의 本質을 體驗한 분을 우리는 道人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짚이라는 새끼 가마니 멍석의 本質을 理解했을 때 비로소 佛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方便의 가르침, 八萬大藏經은 모두 이 짚이라는 本質, 텅~빈 空한 바탕 하나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外形만 바라보지 말고, 이 外形인 멍석 가마니새끼의 本質이 텅~빈 空한 바탕과 같은 짚의 存在와 恒常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를 볼 때도 텅~빈 空한 바탕, 本質에서는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자식을 볼 때도 本質에서는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직장 동료를 볼 때도 本質인 텅~빈 空한 바탕, 本質에서는‘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라고 生覺할 때 서로 도움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텅~빈 공한 바탕, 本質 거기에는 葛藤이나 對立이 본래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정치하는 분들이 이러한 存在의 原理를 잘 理解해서 葛藤을 줄인다면, 葛藤으로 虛費되는 엄청난 豫算을 갖고 福祉問題, 공짜등록금 문제 등도 다 解決할 수 있을 것입니다. 各者 家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中道 緣起를 理解하지 못하면 佛子도, 스님도 모두 껍데기일 뿐입니다. ‘남자’ ‘여자’,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는 二分法的 思考는 짚이라는 本質, 텅~빈 空한 바탕에서 보면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아니 그 하나도 없습니다. 中道에서는 텅~빈 空한 바탕, 本質 그것을 쌍차(雙遮)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雙은 婦人 男便의 區分이 없는 狀態를 의미합니다. 또 遮는 遮斷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로 부모와 자식으로 區分하는 것을 遮斷한다는 말을 雙遮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分別을 遮斷한 生覺을 토대로 해서 서로서로 交流하고 生活하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합니다. 그래서 中道의 原理를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中道의 原理를 알아서 남편과 내가 둘이 아니다, 아내와 내가 둘이 아니다, 자식과 내가 둘이 아니다,이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고 生覺하고 生活하면 마음이 宇宙虛空처럼 無限 넓어지게 됩니다. 佛敎는 中道의 原理 이것을 理解하는 것이고,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事實도 바로 中道의 原理 이것입니다.
雙遮雙照, 우리의 存在 原理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中道의 原理 이것을 理解하면 幸福해지고 마음空間도 넓어집니다. 生活하시다보면 속상한 일들 많으시지요. 그 속상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結局은 自己만 損害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中道의 原理를 잘 理解하셔서 마음에 맺힌 것도 다 풀어내십시오. 그래서 마음을 便安하게 하시고 즐겁게 사세요. 그것이 佛敎이고 自己의 本質을 理解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環境이 여의치 않더라도 宇宙法界, 眞理의 法, 佛法에 依持해서 虛空과 같은 마음空間의 평수를 조금씩 넓히시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이 법문은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4월20일 대원정사 보라매법당에서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고우 스님은 1937년 고령에서 태어났다. 1961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봉암사, 묘관음사, 축서사, 용주사, 각화사 등 선원에서 정진했다. 1968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고,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와 각화사 태백선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봉화 금봉암에 주석하고 있다.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