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16. 分別 - 중

장백산-1 2015. 5. 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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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分別 - 중
2015년 04월 27일 (월) 11:12:22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모든 分別은 尺度를 갖는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르는 基準, 正邪 美醜를 가르는 基準이 없다면

分別이란 不可能하기 때문이다. 좋다고 끌어당기는 것이나, 싫다고 밀쳐내는 것이나 모두

分別하는 尺度의 힘에 依한 것이다. 分別이란 그 尺度의 힘, 尺度의 權力을 實行하는 것이다. 여기서 힘이나 權力이란 말은 결코 은유나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쁜 얼굴에 대한 分別의 尺度는 턱을 깎고 코를 높이는 物理的인 權力마저 行使한다. 戀愛도 就業도 그 예쁜 얼굴에 맞추어야 쉬워지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선 엔간한 일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하고, 건장한 몸을 만들어야 하고, 여성들을 주도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런 基準에 맞추어 자신의 신체와 감성을 단련시켜야 한다.

分別하지 말라는 참 意味는  判斷·區別 말라는 게 아니라
好惡 美醜 등 先判斷 떠난 判斷  分別 떠날 때 바른 分別 可能

 

分別은 내가 갖고 있는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基準을 尺度로 하여 행해진다. 그건 어쩌면 當然하다 할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基準 아닌 다른 尺度로 옳고 그름을 分別할 순 없는 일일 테니까. 다른 이도 내가 하는 언행에 대해 自己 基準으로 分別할 것이다. 그로 因해 나는 나대로,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서로 理解하지 못하고 다투게 된다. 그 다툼은 重要하다고 生覺하는 것이나, 愛着을 갖고 많은 精誠을 기울인 것일수록 심하게 된다. 각자가 잘 안다고 믿는 것, 확실하다고 확신하는 것일수록 다툼이나 논란은 해결될 가능성이 적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약 10여 년 전, 함께 공부하며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친한 후배들과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나로선 문제가 있다고 生覺되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셈인데, 그런 批判에 대해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反對로 그런 나를 否當하다고 批判했다. 거기에 感情마저 섞여 葛藤은 걷잡을 수 없이 擴大되었다. 나는 愛情을 갖고 熱誠的으로 챙겨주었던지라, 그런 그들이 아주 서운했다. 앉으나 서나 그들이 무얼 잘못 生覺하고 있는 건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 건지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반박하고 비판하고 있었다. 하려 하지 않아도 그리 되었다. 만나서 얘기도 해보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를 비난하고 미워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쿨하게 헤어질 수도 없었으니, 정말 煩惱 속에 빠져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절에 다녔어도 한 번도 절에 가본 적 없는 ‘유물론자’였건만, 그래도 무슨 因緣이 있었는지 當時 누가 준 佛敎書籍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을 보다 보니 煩惱를 벗어나려면 앉아 坐禪을 하며 되나 보다 싶었다. 하여 방석 깔고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煩惱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더 치성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結局 가슴이 울렁대서 앉아있기도 힘들게 되었고, 안되겠다 싶어 뒤에 있는 관악산 가는 길로 산책을 갔다. 가는 중간에 약수터가 있고 거긴 평상이 하나 있었는데, 無心코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거기 누워있는 生面不知의 老人네가 심한 辱說을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나 말곤 그 辱을 먹을 이가 없었던 셈인데, 辱먹을 짓을 한 게 아니었으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왜 그러시나 하고 다가가는데 그 분의 눈이 풀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아니라 虛空에 대고 그 辱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 瞬間 섬뜩한 느낌이 全身을 貫通했다. 아, 조금 前까지 내가 저러고 있었는데! 다른 거라곤 저 老人은 입 밖으로 내서 하는 걸 나는 입 안에서 하고 있었다는 것 뿐. 나도 미움에 눈이 멀어 精神이 나가 虛空에 대고 辱을 하고 있는 中陰神이었던 거구나 하는 生覺이 들었다. 하여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내려가서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아주머니, 머리 좀 밀어주세요.” 놀라서 말리는 아주머니에게 거듭 부탁하여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러나 머리를 깎는다고 煩惱가 사라질 리 없었다. 다만 그때 그런 生覺을 비로소 했다. 나는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基準으로 후배들의 言行에 대해 이렇게 分別하고 批判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自身의 基準으로 나를 分別하고 批難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야 내가 옳다고 生覺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의 基準이 自己 生覺이니 모두 自己가 옳을 뿐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으로 남들을 分別하는 限, 그들이 무슨 生覺을 하는지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도 그게 귀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我相’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내 基準으로 分別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얘기는 싫다고 쳐내고 맘에 드는 얘기만 期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밀쳐내려는 마음과 貪하는 마음이요, ‘진심(嗔心)’이고 ‘貪心’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貪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맘에 드는 言行을 貪하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自身이 排他的인 사람이라고 生覺하지 않았지만, 실은 내 맘에 안드는 言行을 밀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느꼈던 愛憎의 感情은 事實 이미 내가 내 마음 속에 갖고 있던 好惡의 基準에 이미 豫備되어 있었던 것이다.

煩惱도 번뇌지만, 내가 옳다는 믿음, 내 基準으로 남을 分別하려는 마음의 態度를 갖고 있는 한, 나와 다른 生覺은 결코 理解할 수 없는 법이고, 그렇게 다른 生覺을 가진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건 不可能한 것이란 生覺이 들었다. 서로 間에 差異를 肯定하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共同體를 만들겠다고 生覺은 하고 있었지만, 實際로 내가 옳다고 믿는 걸 基準으로 判斷하는 한, 그런 건 不可能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基準에 맞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듣고 받아들이려 할 뿐임을.....

모든 分別은 다 ‘나’의 基準을 尺度로 행해진다. 거기에는 나의 尺度에 남을 맞추려는 意志가 作用하고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남들도 行해야 한다는 暗默的 假定이 分別의 行爲 속에 숨어서 作動한다. 그 尺度를 내려놓지 않으면 남의 處地가 보이지 않고 남의 生覺이 理解되지 않는다. 내 尺度에 맞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 보일 뿐이다. 내가 좋다고 끌어당기려는 것과 내가 싫다고 밀쳐내려는 것만 있을 뿐이다. 좋아서 가지려는 것인 貪心이고, 싫어서 멀리하려는 것이 瞋心임을 안다면, 分別은 바로 이런 貪心과 瞋心의 作用임을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分別하고 올바로 判斷하기 위해 이런저런 冊을 읽고 옳은 見解를 세우려 애쓴다. 물론 옳은 見解가 있든 없든 우리는 分別하고 判斷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옳은 見解를 세우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옳은 見解가 强하면 强할수록 그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보이는 얘기는 듣지 않고 내쳐버린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틀린 것이 分明하다고 生覺되는 걸 두고, 왜 저 사람이 저런 얘기를 하는 건지, 무엇이 저런 生覺을 하게 한 건지 生覺하게 되진 않는다. 옳지 않은 生覺을 갖는 데에도 나름대로 理由가 다 있을 터인데. 그래서 옳다는 生覺이 强할수록 分別하고 내치는 힘도 强하다.

따라서 ‘正見’이란 옳은 見解를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見解를 내려놓는 것이고, 正思惟란 ‘옳은’ 것을 思惟하는 게 아니라 그런 生覺을 내려놓는 것이다. 好惡 美醜의 尺度를 내려놓고 愛憎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生覺을 하는지 理解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愛憎을 떠나면 모든 게 洞然明白해진다.” 事態가 洞然明白할 때, 비로소 智慧가 發動한다. 分別을 떠났을 때 비로소 올바른 分別을 할 수 있다.

分別하지 말라는 것은 判斷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며, 區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好惡 美醜의 先判斷을 떠나 判斷할 때 제대로 判斷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을 게다. “至極한 道는 어려울 게 없으니 다만 揀擇하지 않으면 될 뿐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揀擇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는 質問에 祖州 스님은 “天上天下에 나 홀로 尊貴하니라”라고 對答한다. “그것도 揀擇입니다”라고 응수하자 조주 스님이 소리를 빽 지른다. “이 맹추야, 어느 곳이 揀擇이란 말이냐?” 揀擇하면 안 된다는 말에 사로잡혀 어떤 揀擇도 해선 안 된다고 믿고, 揀擇이란 말에 얽매여 好惡와 愛憎을 떠난 揀擇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렇게 ‘맹추’ 소리를 듣게 된다. 또 “말만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揀擇인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指導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엔 “지극한 道는 어려울 게 없으니, 다만 揀擇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라고 대답한다. 揀擇하지 말라는 말 또한 하나의 揀擇이고 分別이지만, 그 말은 分別心을 떠난 揀擇이고 分別인 것이다. 여기다 대고 論理的인 모순을 지적한다면, “묻는 일 끝났으면 절하고 물러가라”는 얘길 듣게 될 것이다. 分別과 智慧는 이렇게 종이 한 장의 두께를 두고 갈라지는 것이다.

이런 分別은 個人的으로 行해질 뿐 아니라 社會的·集合的으로도 行해진다. 分別의 尺度가 社會文化的으로 習得된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맛에 대한 感覺은 물론 味感도, 옳고 그름의 基準도 많은 경우 集團的으로 共有하고 있다. ‘常識’이나 ‘良識’은 集團的으로 共有하고 있는 分別의 基準들이다. ‘財産에 대한 處分權이야 所有者에게 있지’라는 常識이나 ‘結婚은 南女가 하는 거지’ 하는 式의 良識이 그러한  集團的으로 共有하고 있는 分別의 尺度다. ‘부처란 이런 것이고, 중생은 이런 것’이라는 良識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게 종종 ‘災難’이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늑대들에게 그랬다. 알다시피 西區에서 늑대는 羊과 같은 ‘착하고’ 순한 동물을 잡아먹고 괴롭히는 惡한 動物로 看做되어 왔다. 미국인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서부의 황야 가까이라면 어디서나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더해 양을 키우는 목장이 거대화되면서 늑대들에게 잡아먹히는 양들이 늘어나자 敵對感은 더 늘어갔다. 늑대나 코요테 같은 동물에 대한 도덕적 적대감은 그들 모두가 共有하는 ‘良識’이고 ‘常識’이었다. 그들은 이 동물들을 ‘邪惡한 野獸’라고 부르며 일종의 도덕적 ‘범법자’로 간주했다. 생물학자인 스탠리 영조차 이렇게 썼다. “늑대들은 피에 굶주려 살인하는 100% 죄인이며…모든 늑대들은 살인자들이다.”

그래서 1900년대 初 政府 官吏들로부터 保守的 道德主義者와 進步的 自然主義者들까지 손을 잡고 自然을 ‘淨化’하겠다며 늑대와 코요테 박멸운동을 벌인다. ‘야수와의 전쟁’을 위해 농업성 생물보호국은 총을 든 사냥꾼과 덫, 독극물에 독가스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사냥했다. 덕분에 얼마 되지 않아 늑대와 코요테는 거의 滅種 상태에 이르게 되고, 어디서도 늑대 울음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肉食動物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데 무슨 惡이란 말인가! 善惡의 범주를 사용한 서구인들의 道德的 分別이 늑대와 코요테에겐 더없이 끔찍한 재난이 되었던 것이다.

常識 이하의 일들이 흔히 벌어지는 곳에서는 常識을 回復하고 良識에 따라 살자는 호소가 자주 등장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良識과 常識이 支配하는 社會는 集團的인 分別이, 그런 分別의 基準이 거기서 벗어난 다른 生覺이나 感覺, 行動의 可能性을 닫아버리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재난’이 될 수 있음 또한 기억해야 한다. 分別揀擇을 警戒하는 禪師들의 말은 산속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 世間의 거리에서 더욱더 重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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